들어가는 말
개츠비는 그냥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다. “가장 위대한” 개츠비다. 고등학교 시절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읽으며 왜 위대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해도 말이다. 그 나이엔 나도 개츠비가 위대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졸업반 학생이던 내게 닉은 평범했고, 개츠비는 속을 알 수 없었다. 잘나가는 데이지에게도 공감할 수 없었다. 카페테리아에 앉아 빛나는 머릿결을 뽐내며 뭐든 다 아는 척하는 고약한 소녀들과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위대한 개츠비》는 그저 부자들의 지루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40년이 지난 후. 지금은 2010년 추수감사절, 자정을 막 넘긴 시간이다. 나는 쉰다섯 살이며 괜찮은 대학의 영문학 교수이고 미국 공영라디오방송NPR의 서평가다. 대단한 문화 자본을 지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엔 별 의미가 없다. 남편 리치와 나는 뉴욕 시 42번가의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류장 앞의 긴 줄에 섰다. 워싱턴 D. C.의 우리집에는 새벽 5시에야 도착할 것이다.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 저녁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아흔 살 넘은 양가 어머님 두 분과 열두 살 난 딸, 개 두 마리를 대접해야 하는 특별한 만찬을 위해 미리 예약해둔 ‘6인용 칠면조 요리’를 찾아와야 한다. 우리는 워싱턴에서 16시간 전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일정이 빠듯할 때면 중산층의 선택지라 할 수 있는 앰트랙 열차나 요새 나온 새 디럭스 버스를 이용한다. 하지만 이번 연휴는 이틀간 모든 차편이 매진이라 그레이하운드 버스 말고는 뉴욕행 왕복 좌석을 구할 수가 없었다. 왜 이리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사랑 때문이다. 이미 매진되었다던 조지프 팝 퍼블릭 시어터의 연극 <개츠> 표 두 장이 운 좋게도 우리 손에 들어왔다. 2010년 뉴욕 극장계의 화제작이었다. 엘리베이터 리페어 서비스 극단이 7시간에 걸쳐 《위대한 개츠비》 책 전체를 소리 내어 읽는 공연이었다. 어쨌거나 우리한테는 봐야 할 연극이었다. 《위대한 개츠비》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 훗날 내가 몇 시간 동안이나 《위대한 개츠비》의 ‘낭독을 듣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순례를 떠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 나 죽기 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거라는 말을 들은 양 믿지 못했으리라. 성인이 된 다음 내가 《개츠비》를 자진해 쉰 번도 더 읽고, 대학에 신입생이 들어올 때마다 《개츠비》를 강의하고, 전국을 돌며 호기심 많은 독자들 앞에서 《개츠비》에 대해 열렬하게 이야기하리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면 나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의 나 자신(바보!)을 배신한 일과 똑같은 일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평론가와 독자들도 《개츠비》를 다시 읽고는 나처럼 홀딱 반했던 것이다.
《개츠비》의 마력은 시와 같은 힘찬 문체에 있다. 미국 사람의 일상 언어가 다른 세상의 언어로 변한다. 그뿐 아니다. 우리가 어떤 미국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콕 짚어내는 힘도 있다. 지금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말이다. 《개츠비》의 매 쪽마다 이런 소망이 넘쳐흐르며, 그래서 이 소설은 미국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반면 가장 저평가되기 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분량도 짧고, 어긋난 사랑 이야기인데다, ‘광란의 20년대’와 그와 비슷한 분위기로 범벅되어 있다. 동급의 두 경쟁작과 견주어도 《개츠비》의 배경은 너무 좁다. 《모비 딕》의 공간은 드넓은 바다지만, 《개츠비》는 수영장이다. 《허클베리 핀》은 “개척지를 향해 떠나지만”, 개츠비는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부터 맨해튼까지 도로 몇 마일만 왔다 갔다 한다. 하지만 분량이 짧다는 점은 대작들을 따돌리기에 좋다. 필독 도서에 포함될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사실 미국 사람이 정규교육 과정 중 읽은 딱 한 편의 소설은 《개츠비》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나 심지어 중학생 때(덜덜덜!) 우리가 이 책을 읽게 된다는 사실은 나쁜 소식이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리고,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고, 회한이 인생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알 길이 없다. 사슬에 줄줄이 묶인 죄수들마냥 발을 질질 끌며 《개츠비》의 세계로 처음 들어갈 때, 우리는 시험 준비를 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T. J. 에클버그 박사의 눈이며, 개츠비의 자동차 색깔이며, 데이지네 집 앞 부두 끝 녹색 불이며, 이런 장치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며. 이러다 보니 소설의 더 큰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바보 같은 일이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녹색 불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녹색 불을 향해 개츠비가 ‘손을 뻗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 미국 소설이다. 반세기 이상 전국 고등학교 필독 도서 목록의 대들보였기 때문에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읽지는 않은, 적어도 제대로 읽지는 않은 작품이지만 말이다.
제목만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확실히 그렇다. 그래서 아직 읽지 않은 사람도 이 소설을 식상하다고 느낀다. 개츠비라는 이름은 식당, 콘도 개발지, 컴퓨터 게임, 맞춤 양복점(그 멋진 셔츠들이란!), 미용실, 케이트 스페이드 클러치 지갑(양장본 책 표지 모양이다), 온수 욕조(수영장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인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구린 센스다)에 우아한 느낌을 선사한다. 아기 이름 작명 사이트인 네임베리닷컴은 개츠비가 “힘 있고 혈통 좋은” 소년 소녀의 이름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고 전한다. 피츠제럴드가 지은 이 책 제목은 여기저기 거듭 등장한다. 어느 과체중 록 뮤지션의 별명은 “위대한 곱창비”(원문은 ‘the Great Gutsby’이다. - 옮긴이 주)이고, 어느 캘리포니아 포도 농장이 운영하는 ‘와인 시음 겸 독서토론회’의 명칭은 “그레이프 개츠비”이다. 한 친구가 “위대한 캣츠비”라는 이름으로 누군가가 페이스북에 올린 고양이 농담을 보내준 적도 있다. 이 목록들은 고양이가 배 속에 헤어볼을 쌓듯 부풀어 오른다. 실제 소설 작품을 말장난과 온갖 소비주의의 쓰레기로 칭칭 감으면서. 문화계에서 만들어진 수준 높은 파생 상품들도 있다. 다섯 편의 영화(이 책을 쓰던 당시 개봉한 바즈 루어만의 최신 3D 역작도 포함하여)며, 발레며 오페라며, 라디오극과 무대극, 앞서 언급한 낭독 공연 <개츠>까지. 그리고 숱한 현대 소설이 《개츠비》를 서사의 본보기로 삼았다. 예를 들어 로스 맥도널드의 《검은 돈》, 케이틀린 메이시의 《놀이의 기초》, 조지프 오닐의 《네덜란드》, 톰 카슨의 《데이지 뷰캐넌의 딸》.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개츠비》는 너무 자주 눈에 띄고, 너무 자주 광맥 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책장에서 오래된 문고판을 뽑아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보자. 자개 빛깔처럼 다채로운 피츠제럴드의 언어를 빌리면, 그럴 때마다 이 소설은 “인간의 궁금해하는 능력에 걸맞은 무엇”이 된다.
하지만, 먼저 우리는 더 똑똑해져야 한다. 나이도 더 들어야 하고, 일상의 슬픔과 사랑스러움 양쪽 모두에 상처받을 수 있도록 더 민감해져야 한다. 소설의 화자 닉은 더 똑똑해져야 했다. 2년이 지나고서야 그는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개츠비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닉은 콜리지의 <늙은 선원의 노래>에 등장하는 늙은 선원처럼 개츠비와 1922년 여름이 남긴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남은 생애를 보낸다. 닉은 우리에게 개츠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로서는 이야기를 ‘다시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의 깊게 듣고, 세부 사항 하나하나에 다시 돌아가 더 집중하고, 구절구절을 다시 한번 읽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셈이다. 한두 해라도 《개츠비》를 멀리했다가 다시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늘 목격해왔다. 내 조교를 맡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빠진 힙한 신진 이론가는 지난 학기 1학년 문학 수업 때 쿨 하게 장담했다. “더 좋은 소설로 느껴져요!” 내 사무실에 찾아와
문학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하는 똑똑한 역사 학도도 이렇게 말했다. “이건 미국 문학의 180쪽짜리 시스티나 성당이에요!” 이 학생들도,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도 처음부터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소설의 겹겹이 쌓인 의미를 더 잘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미국의 도서관과 서점과 시민회관을 다니며 홍보를 했다. 미국예술기금이 후원하는 사업인 빅 리드에서 《개츠비》를 강의하기 위해서였다. 빅 리드는 뉴딜 정책에서 따온 사업이다. 반쯤은 이상적인 문학 운동이고, 반쯤은 요란한 쇼랄까. 연방 정부 기금을 가지고 《앵무새 죽이기》, 《화씨 451》, 《허클베리 핀》,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위대한 개츠비》 같은 미국 고전소설들을 전국적으로 읽는(어쩌면 다시 읽는) 운동이다. 내가 방문한 도시 대부분에서 내 강의가 있기 전 몇 주 동안 ‘광란의 1920년대’ 무도회나 로버트 레드퍼드와 미아 패로가 등장하는 1974년 작 <위대한 개츠비>(졸린 영화다)를 상영하는 등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행사를 열었다. 이스트 배톤 루지 패리시 도서관의 블루보넷 지역 분관은 방수포 청테이프 패션쇼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 쇼는 지역 청소년들이 책으로 플래퍼(1920년대의 신여성. 미니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보브컷으로 짧게 자르고 재즈 음악을 들었으며, 화장을 하고 술을 마시고 자유롭게 연애했다. - 옮긴이 주) 패션을 연구해서 푸른 방수포와 청테이프를 가지고 1920년대 옷들을 만들어 보는 행사였다. (이 행사는 《개츠비》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에도 눈길을 모았다. 당시 그 지역 어디에나 푸른 방수포와 청테이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행사는 놓쳤지만, 그 지역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열린 나의 빅 리드 강연 때 어느 지역 주민이 조상의 화려한 플래퍼 드레스와 랩코트를 찾아내 전시하긴 했다.
이 강연들을 하는 동안, 엉뚱한 말이 많이 나왔다. 톰 뷰캐넌이 하는 식의 말들도 있었다. 대략 지난 10년 사이 《개츠비》를 둘러싸고 기발한 지적이 하나 새로 등장했다. 2장 마지막 쪽에 집착하는 해석이다. 닉이 머틀 윌슨의 아파트에서 벌어진 술판을 떠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틀의 이웃집 남자인 사진작가 매키의 침대 곁에 서 있더라는 대목이다. 미국 전역에서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의 ‘게이더’가 핑핑 돌고 ‘적색경보’가 떴다. 이렇게 빅 리드 순회 강연을 다니며 나는 유행하는 문화 평론도 듣고 광기 어린 달뜬 말도 들었지만, 《개츠비》에 관한 참된 말 하나도 거듭해서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좋네요.” 아멘! 형제님들, 자매님들, 그건 정말이다.
위대한 미국 소설로 선정할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건 바로 《위대한 개츠비》다. (물론 어떤 책이든 그런 것은 선정하지 말자는 주장도 정당하지만.) 나는 2012년에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심사하러 들어갔었다. 세 심사위원이 보기에 《개츠비》는 북극성과도 같았다. 우리는 망루에 올라 《개츠비》가 해낸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을 성취한 다른 소설이 없나 열심히 찾았다. 그 과업이란, 미국에 대한 큰 담론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글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었다. 《개츠비》라는 작품만이 그토록 높은 곳에 올라가 홀로 머무르다니 어찌된 영문일까? 비평가들과 싸워 이기고, 소설 읽는 취향까지 바꾸면서 말이다. 어째서 《개츠비》는 미국 전역에 걸쳐 고등학생 필독서가 되었는가? 그리고 《개츠비》가 살면서 적어도 두 번, 또는 5년에 한 번씩은 읽을 가치가 있는 미국 소설인 까닭은 무엇인가?
아직도 지속되는 《개츠비》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은 이상의 질문을 살펴본다. 영문과 교수로서 나의 꿈은 언젠가 《개츠비》 한 편만 가지고 세미나를 하는 거였다. 우리는 제임스 조이스의 팬이 《피네건의 경야》를 읽듯 《개츠비》를 읽을 것이다. 한 주에 한 번씩 만나 소설 몇 쪽만 가지고 단체로 이맛살을 찌푸릴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몸담은 대학은 이런 과목을 선뜻 열어주지 않았다. (읽기와 가르치기의 시장 원리에 따르면, 책이란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가치도 높게 마련이다. 《실낙원》 같은 특대형 고전이라면 한 학기 내내 세미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하지만 줄마다 쪽마다 완벽한 작품이라면, 분량이 무슨 문제겠는가. 내가 보기엔 《개츠비》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걸작이다. 마흔네 살에 죽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살았으며, 이 작품은 소설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수준에 도달한 완벽한 작품이다. 기술 하나하나에 어긋남이 없다. (물론 피츠제럴드는 단어를 잘못 쓰는 실수가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피츠제럴드는 T. J. 에클버그 박사의 ‘망막’이라고 썼지만 ‘홍채’라고 써야 맞다. 그는 개츠비와 닉이 그레이트넥을 나와 퀸스버러 다리를 건너 아스토리아로 갔다고 썼는데, 그의 친구 링 라드너가 고쳐주었듯, 사실 다리 저편은 롱아일랜드시티다.)
내 생각에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사람들의 기대를 몽땅 저버렸음에도 거의 완벽한 작품이다. 탁월한 영문학자 모리스 딕스테인은 이 소설이 “글쓰기 강좌마다 가장 먼저 배우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야 한다는 원칙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척 봐도, 이 책은 거의 모든 쪽에서 “설명”하고 있다. 《개츠비》에서 현재 일어나는 사건은 과거 회상 말고는 없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 이 책이 “어떤” 소설인지 설명하려다 보면, 책은 차츰 다른 내용으로 변한다. 엇나간 사랑 이야기가 돼버리는 것이다. (“글쎄, 오랫동안 한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여자는 결혼했고 말이지…….”) 이런 실패를 겪고 난 후, 우리는 다시 한 발 물러선다.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드는 힘은 플롯이 아니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 즉 그 믿을 수 없는 언어라고 말이다.
《개츠비》에 관해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 플롯과 과거 회상을 보면, 이 소설은 꼭 유럽의 어느 우울한 실존주의자가 쓴 작품같다. 어떤 부분은 10년 뒤에 나온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만큼이나 암담하다. 《개츠비》는 고전적인 필름 누아르 영화와도 닮았다. 플롯도 비슷하고(자살과 살인으로 사람이 셋이나 죽는다!) 테크닉도 그렇다(1인칭으로 회상하는 닉의 내레이션이 작품 전체에 깔린다). 내용이 이런 것도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빠져나갈 구멍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모두 닫혀 있다. 이야기 가운데 소개될 비극은 사실 이미 일어난 상태다. 결말은 정해졌다. 제이 개츠비 자신부터가 누아르 장르에 반드시 등장하는 호구 유형의 남자다. 자기가 뜻하는 대로 자기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본새가 딱 그렇다. (고전적인 필름 누아르에는 자기가 망할 줄 모르는 사람이 넘쳐난다.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영화 <과거로부터>에 나오는 로버트 미첨은 영웅적이지만 바보다. 영화 <킬러들>의 젊고 섹시한 버트 랭커스터는 젊고 더 섹시한 에이바 가드너에게 반한다. 이 걸작 누아르 영화의 설정 숏에서 그는 초라한 침대에 쓰러져, 과거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쫓아와 결국 그를 파괴하리라는 씁쓸한 사실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과거를 어찌해볼 수 없다는 깨달음은 비관적이다. 이런 점에서 《개츠비》는 이 필름 누아르 영화나 여기에 영감을 준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개츠비》와 마찬가지로 1920년대에 문학계에 등장했다)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하드보일드나 누아르 장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뇨? (…) 당연히 할 수 있어요!”라는 개츠비의 유명한 대사에서 파국을 떠올릴 것이다.
기억 속의 행복한 과거를 현재로 연장할 수 있다? 망상이다. 내가 사랑하는 소녀는 내게만 충실하고 영원히 진실하리라거나, 미래는 내 결정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거나 하는 것도 모두 망상이다. 《개츠비》의 주요 인물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살펴보면, 이 책을 긍정적인 읽을거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위대한 미국 소설의 지원자들을 다시 한번 모아보자. 《모비 딕》, 《보이지 않는 인간》, 《주홍글씨》, 《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 이 작품들에 가득한 것은 들뜬 마음과 그에 따른 낙담이다. 완곡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이 책들은 미국식 낙관주의에 젖어 명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에 한 방 먹이기 위해 날아간다. 대체로 반미국적이다. 《개츠비》의 삭막한 결말에 충격을 받을 사람은 널렸다. 소설 첫 부분(닉의 회고적 서문이 끝나고 그다음 부분)이 ‘광란의 20년대’식 낙관주의의 거품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티는 끝나고 빛은 꺼진다. 개츠비의 세상에서 미국은 디즈니의 세상과는 반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는다. 소설의 결말에서 닉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은 지금껏 미국에 대해 쓰인 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 개츠비가 명예를 잃고 몰락했으니 엄숙한 상황이기는 하나, 소설의 언어는 들떠 있다. 《개츠비》의 줄거리는 아메리칸드림이 신기루일 뿐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하지만 작가가 골라 쓴 단어들을 보면 그 유혹에 저항하기 어렵다. 《개츠비》는 양쪽 모두에 걸쳐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미국 고등학생들이 빨리 읽어치우기 딱 좋은 분량의 다른 책들과 사실 거리가 멀다. 미국의 정체성과 가능성에 대해 직관적이지만 모순된 시적언어를 쏟아내는 우아한 사기꾼이다.
나는 이 책에서 《개츠비》를 다시 읽으려 한다. 이 이상하고 얇은 명작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이 책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고 싶다. 또 피츠제럴드 본인이 《개츠비》를 어떻게 읽었고, 어떻게 다시 읽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초고를 엄청나게 고쳐 썼다. 1925년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되자, 평론가들은 돌아가며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책을 잘못 읽었다. <개츠비> 영화들도 마찬가지였다. 피츠제럴드는 1940년에 사망했는데, 그 무렵 그의 가장 위대한 소설은 거의 사장된 처지였다. 피츠제럴드는 할리우드에 거주하는 동안, 친구들에게 자기 책을 선물로 사주고 싶어 했다. 그가 서점에 가서 《위대한 개츠비》를 찾으면, 점원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을 것이다. (몇몇 서점 주인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 본인이 《개츠비》를 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2013년 5월로 가보자. 바즈 루어만의 현란한 영화 덕분에 《개츠비》열풍이 정점을 찍었다. 《개츠비》 페이퍼백 판매량은 미국 전체 책 판매량에서 2위까지 올랐다. 보통 이 책은 1년에 50만 부쯤 팔렸다(전자책 18만 5천 부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2013년에는 판매량이 세 배로 뛰었다. 전 세계적으로 《개츠비》는 약 2천5백만 부가 팔렸고 42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개츠비》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왜 부활했을까? 《개츠비》가 너무도 위대하기 때문일까? 이 질문들의 답을 구하기 위해 나는 책상을 벗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프린스턴 대학,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소장된 귀중한 피츠제럴드 자료들을 보러 갔다. 뉴욕 시 기록보관소에서 스콧과 젤다 피츠제럴드 관련 문서들을 발견했다. 《개츠비》 전문가 및 민간인 독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민간인 독자들이란 켄터키 주의 볼링 그린, 아이오와 주의 페리, 보스턴, 워싱턴 D. C., (앞서 언급한) 피오리아에 사는 독자들이다. 나는 뭍에서나 물 위에서나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를 찾는다. F.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중요한 장소들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나만의 작은 비법이 하나 있다. 과거를 다시 살 수는 없지만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옛날에 졸업한 고등학교를 방문하는 것이다. 나의 모교는 여전히 《개츠비》의 무대인 퀸스의 아스토리아에 있는데,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고 토론하는 교실들을 찾아갔다. 이전에는 《개츠비》를 읽기에 고등학생은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모교를 다녀와서는 생각이 바뀐 것 같다. 이런 일들을 해나가는 내내, 나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음이 복잡하다. 나는 피츠제럴드를 사랑했고, 이 책을 쓰면서 더욱 사랑하게 됐다. 그는 마음이 열린 사람, 관대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도 깊었다. 젤다는 오랫동안 정신장애를 앓았는데, 그는 그동안 그녀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녀가 민간 시설에서 가장 좋은 치료를 받도록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했다. 유명한 작가라면 형편없는 아버지일 것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피츠제럴드는 좀 엄하기는 했지만 다정한 아버지였다. 1930년대에 젤다가 오랫동안 요양원에 입원했으니 스콧은 사실 외동딸 스코티에게 홀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에겐 악마가 있었다. 진, 맥주, 샴페인이라는 악마. (그의 길지 않은 인생 후반부에 네 번째 악마인 알약이 나타났다.) 다들 말한다. 알코올 때문에 피츠제럴드는 훨씬 형편없는 사람이 됐다고.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피츠제럴드를 술주정뱅이로 깎아내렸다. 실라 그레이엄과 버드 셜버그와 ‘잃어버린 세대’ 주위를 어슬렁거린 몰리 캘러헌이 쓴 회고록에도 피츠제럴드에 관한 우울한 이야기가 많다. 최악의 상황에 놓인 피츠제럴드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젤다와의 빛나는 결혼이 결국 어찌되었는지 아는 것도 그렇다. 돈 C. 스키머는 프린스턴의 원고 담당 큐레이터이자 그곳에 있는 탁월한 피츠제럴드 관련 자료의 관리인이다. 병원에 입원한 젤다가 1930년대 후반 스콧에게 보낸 엽서와 편지들을 사서들이 정리했는데, 스키머의 말에 따르면 편지들은 보통 이런 말로 시작했다고 한다. “수표 고마워요.”
피츠제럴드의 인생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좋은 친구들과 그를 좋아하는 팬들이 있었다. 그에겐 맥스웰 퍼킨스와 해럴드 오버라는 최고의 편집자와 최고의 저작권 대리인이 있었다. 그의 마지막 비서 프랜시스 크롤 링은 1939년할리우드에서 스무 살의 나이로 그와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이 책을 쓰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피츠제럴드의 인간성과 천재성을 옹호한다. 그리고 그의 딸 스코티는 자라서 아버지의 작업을 충실히 관리했다. 이들의 이름은 앞으로 자주 등장할 것이다. 피츠제럴드 작품을 연구하고 모으는 일에 전념한 터프가이 교수 고故 매슈 J. 브루컬리 같은 피츠제럴드 연구자들의 이름과 더불어.
“뼈를 조사하는 것 말고는 남은 게 없지.” 프린스턴의 피츠제럴드 문서를 조사하러 갔다가 아무 소득 없이 일을 마쳐야 했던 어느 날 오후, 스키머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피츠제럴드의 인생은 대부분의 미국 작가들보다 훨씬 더 많이 채굴됐다. 문서들에 더하여, 피츠제럴드 본인도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기록했다. 금전출납부, 노트, 편지, 그리고 단편과 장편소설로. 그가 기록한 많은 자료들이 이미 출간됐으며 《위대한 개츠비》 원고는 피츠제럴드의 금전출납부 및 몇몇 작품들과 함께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디지털화되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프린스턴과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의 피츠제럴드 컬렉션에서 허가한 덕분이다. 나는 학문적 혹은 전기적으로 무언가를 더 보탤 생각은 없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로 떠나는 개인적인 여행이다. 나 말고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사랑한다. 나와 함께 《개츠비》를 다시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직 읽지 않았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썼다. 문학적, 역사적 평론이 유용하다고 판단되었다면, 평론가로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20세기 중반의 대중적 지식인들이 취한 ‘열린 포용의 자세’를 취하고자 했다. H. L. 멘켄, 앨프리드 케이진, 라이오넬 트릴링, 메리 매카시, 피츠제럴드의 오래된 친구 에드먼드 윌슨 같은 비평가들 말이다. 이들은 교육받은 비전문가라는 폭넓은 독자층을 상정하고 글을 썼다. 내가 매주 미국 공영라디오방송의 <프레시 에어>에서 책을 비평할 때 상정하는 청중과 똑같다.
“이제 지겹지 않아?” 내가 이 책을 쓰면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는 동안 남편과 친한 친구들이 종종 묻곤 했다. 나는 아직도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다. “아니.” 피츠제럴드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작품을 썼다.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내린 위대한 책의 (잠정적) 정의란 이렇다. 무궁무진한 작품. 최근 몇 년간 《개츠비》를 다시 읽으면서, 이 책의 냉혹함이 눈에 딱 띄었다. 언어의 서정성과 충돌하는 그 냉혹한 태도라니. 《개츠비》가 냉혹한 태도를 취하는 몇몇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데, 이 책 전체에서 탐구할 것이다.
첫째로 사회 계급이다. 미국에서 계급은 여전히 어색한 주제로, 학계 다문화 워크숍에서나 우물우물 언급하다 끝난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은 자동으로 인종과 연결 짓는 것 말고는 계급이라는 주제에 대해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모른다.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어느 인종이든 상관없이) 다수의 미국인들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드는데, 미국인은 이 사실을 인식하기 싫어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사실, 그 분야 고전들(《모비 딕》, 《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 《보이지 않는 사람》, 《빌러비드》) 가운데 인종 대신 계급을 중시한 작품으로는 유일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개츠비》를 읽을 때 계급이란 주제를 어찌어찌 다루게 되어도, 그 장애물은 극복된 것이라고 말한다. 제이 개츠비 본인이 벤저민 프랭클린 식으로 성공했으니까. (힘들게 노동하고, 돈 버는 일만 생각하고, 주류 밀매까지 손을 댔는데 성공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나 이 소설이 개츠비의 아메리칸드림을 진심으로 동경하고 지지한다면, 정말 그렇다면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나야 한다. 개츠비를 자랑스러워하는 가여운 아버지와 많은 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된다. 행복한 결말에서, 개츠비는 자신의 집에 살아 있고 데이지가 그의 곁에서 방울이 울리듯 “돈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하리라.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바즈 루어만은 2013년 영화에서 이 중요한 대사를 빼버렸다. 소설의 계급 비판을 제거하려는 큰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 같다.) 계급은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개츠비를 잡아채 결국 넘어뜨려, 잎이 둥둥 떠다니는 차가운 수영장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그를 가라앉힌다. 플라자 호텔에서 대결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톰 뷰캐넌은 개츠비를 “어디도 아닌 곳에서 온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며 조롱하고 무시한다. 톰처럼 ‘타고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창조된 존재인 제임스 개츠는 너무 ‘뉴 머니’라서 ‘올드 머니’로 봐줄 수 없고, 상류층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수도 없다. 몇몇 비평가들은 “인종 속이기”라는 주제에 천착한다. 개츠비의 성의 연원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과 그의 피부가 “황금빛”이라는 점 등을 숙고하는 것이다. 어떤 민족적, 인종적 혈통이 신비로운 개츠비 씨의 피를 더럽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에서 문화정치학적으로우려되는 부분들을 고려하면, 개츠비는 “남쪽 백인 소녀”의 화신 데이지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없다.
미국 사회는 1차 대전 이후 변화하고 있었으므로(이 소설에서는 인물들을 아무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로 묘사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매 장마다 인물들이 서로를 빠르게 평가하고 사회적으로 어디에 어울릴지 결정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닉 캐러웨이는 처음에 독자들 보란 듯이 본인의 계급 증명서를 제시한다.
“지금보다 어리고 그래서 마음도 여리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하나 해주셨는데 나는 그 충고를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한다.‘네가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너처럼 혜택을 받은 건 아니라는 걸 기억해라.’”
이 짧은 말은 《개츠비》에서 ‘길러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 알려준다. 또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의 의미가 얼마나 애매한지 보여준다. 사실상 《개츠비》의 언어가 워낙 애매해서 이 소설은 분량이 짧은데도 더 긴 이야기처럼 읽힌다. 우리에게 자신의 혈통을 소개하고 있는 닉을 고상한 체한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본인이 속한 계급의 특권을 알고 타인에게 공감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니 그에게 점수를 주어야 하나? 닉이 어떤 인상을 주고 싶어 하든, 이 소설은 어떤 주제에 천착하는지를 널리 알리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계급’이다. 이디스 워턴이 묘사한 세기 전환기의 뉴욕에도 마찬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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