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아포칼립스의 위로
길거리에서 나눈 잡담과 부엌에서 나눈 대화
(1991-2001)
바보 이반과 황금 물고기에 대해
-제가 뭘 깨달았는지 아세요? 바보 이반이나 바보 예멜,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하는 러시아의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들 빼고는 한 시대의 영웅이 다른 시대의 영웅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에요. 러시아의 전래동화에는 주로 운수가 좋거나 행운이 따르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요. 기적 같은 도움의 손길에 대한 기대, 감나무 아래에 가만히 누워서 저절로 감이 떨어지길 바란다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죠. 따뜻한 페치카 앞에서 누워 빈둥거려도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 속에서는 페치카가 알아서 척척 팬케이크를 구워내고, 황금 물고기는 모든 소원을 이뤄줘요. ‘난 이걸 원해, 저걸 원해! 아름다운 왕비님과 결혼하고 싶어! 난 우유강이 흐르고 젤리가 강가를 이루는 그런 왕국에서 살고 싶어!’ 등등. 우리 러시아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몽상가예요! 정신은 열심히 일하고 괴로워하는 데 반해 실제 행동은 더디거든요. 정신에 온 힘을 쏟느라 행동으로 옮길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일은 항상 제자리를 맴돌죠.
또 러시아인은 수수께끼의 영혼을 가졌어요. 그래서 모두들 러시아인을 이해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해요.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도대체 저 영혼 속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죠. 그런데 말이죠, 우리 영혼 속에는 또 다른 영혼이 있어요.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거나 책읽기를 좋아해요. 러시아인의 가장 대표적인 직업은 독자이자 관객인 셈이에요. 그런데도 우리 러시아인은 근거 없이 자기네 민족을 특별하고 유일하다고 인식하고 있어요. 사실 석유와 가스를 빼면 특별할 것도 없는데 말이에요. 이러한 점들이 한편으로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고나 할까요? 우리는 러시아가 뭔가를 창조해야 한다, 뭔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신이 선택한 민족, 고유한 러시아인의 길을 주장하죠. 우리 주변에는 오블로모프(곤차로프의 대표작으로 허무감에 빠지고 무기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 투성이에요. 모두가 소파에 드러누워 기적을 바라고 있죠. 반면 슈톨츠(박력 있고 실리적인)는 없어요. 민첩한 행동파 슈톨츠는 보이지 않아요. 러시아인은 자기들이 아끼는 자작나무숲과 벚꽃동산을 베어버렸다는 이유로 슈톨츠를 증오해요. 그곳을 밀어낸 뒤 공장을 짓고 돈을 번다는 이유로요. 우리들 사이에서 슈톨츠는 타인이에요.
-러시아의 부엌이라……. 형편없고 초라하고 코딱지만 한 ‘흐루쇼바(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시행한 주택보급사업으로 지어진 5층짜리 서민 아파트)’ 같은 부엌이죠. 보통 9~12제곱미터 면적에 얇은 벽 하나를 두고 화장실과 연결되어 있어요(이 정도면 행복하죠!). 소련식 설계가 그래요. 부엌 창가에는 양파가 자라고 있는 마요네즈 병이 놓여 있고, 코감기에 좋다는 아가베 화분도 있죠. 러시아인에게 부엌은 요리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때로는 식당, 때로는 응접실, 때로는 사무실, 때로는 연단, 때로는 집단심리 치료의 장소이죠.
19세기 러시아 문화가 귀족들의 저택에 집중됐었다면, 20세기에는 부엌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도 마찬가지고요. ‘60년대 사람들(1925~1945년생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를 가리키는 말, 소련 체제에 반대하며 페레스트로이카를 환영했다)’의 삶은 바로 ‘부엌에서의 삶’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흐루쇼프에게 감사해요! 그 사람 덕분에 우리가 공동주택에서 벗어나 각 가정마다 개인 부엌을 갖게 됐으니까요. 그렇게 가지게 된 부엌에서 우리는 정부를 욕할 수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부엌에는 가까운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욕을 할 수가 있었다는 거예요.
부엌에서 아이디어와 공상적인 프로젝트들이 떠올랐죠. 우린 누가 질세라 유머를 만들어내곤 했어요. 그 시대는 유머의 전성기였어요! 예를 들면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읽는 사람들이고, 반공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이해한 사람들이다’라든가. 아무튼 우리 모두는 부엌에서 자랐고 우리의 아이들도 그랬어요. 아이들도 우리와 함께 갈리치와 오쿠드자바, 비소츠키(‘60년대 사람들’에 속한 예술인들로 주로 반체제 노래를 불렀다)의 노래도 줄기차게 틀었죠. BBC 주파수도 잡곤 했어요. 부엌에서는 못 하는 얘기가 없었어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만인의 행복이란 어떻게 얻는 것인지 등등. 언젠가 한번은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우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엌에서 자정이 넘도록 수다를 떨고 있었고, 열두 살짜리 우리 딸은 소파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시끄럽게 언쟁을 하고 있었나 봐요. 우리 딸이 비몽사몽 간에 빽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정치 얘기 좀 그만해요! 또 그 지겨운 사하로프, 솔제니친, 스탈린…….” (웃는다.)
우리는 부엌에서 커피와 보드카를 끊임없이 마셨어요. 1970년대에는 쿠바산 럼주를 마시기도 했죠. 그때 우리 모두는 피델(피델 카스트로)과 쿠바 혁명 그리고 베레모를 쓴 체(체 게바라) 씨에게 푹 빠져 있었어요. 그들의 인기는 할리우드 스타 못지 않았어요! 당시에 우리는 늘 떨고 있었어요. 누군가 엿듣고 있을지 모른다는, 아마도 엿듣고 있을 것이라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에요. 대화 중간중간 꼭 누군가는 전등이나 콘센트를 쳐다보면서 농담처럼 “소령 동무, 동무도 들었지요?”라고 말하곤 했어요. 일종의 모험이나 게임 같은 거였어요. 이런 이중생활에서 만족감을 얻었던 것 같아요. 대놓고 반항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고, 대부분은 ‘부엌에서만 불순분자’들이었죠. 주머니 속에서 세 번째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지금은 가난한 것도 부끄럽고 취미로 운동 하나 안 하는 것도 부끄러운 시대요. 한마디로 쫓아가기가 벅차지. 난 ‘청소부와 수위 세대(소련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은 노동자, 엔지니어, 기술자였다. 반면 청소부나 수위는 가장 하위에 있던 직종이었다. 하지만 급여는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이요. ‘내적 망명(야만적 현실로부터 자기 내부로 시선을 돌려 내적 도피처를 찾는 망명 행위)’이 있던 때지. 난 살아가면서도 창밖의 풍경이 어떤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살았소. 나와 내 아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아내는 청소부로, 나는 보일러실에서 불을 때는 사람으로 취직했소. 하루는 일하고 이틀은 쉬는 식이었지. 당시 엔지니어들이 130루블씩 받았고, 보일러실에서 일하던 나는 90루블을 받았다오. 40루블을 덜 받았지만 절대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지.
우리 부부는 항상 책을 읽었소. 그것도 아주 많이. 대화도 많이 했지. 우리는 우리가 사상을 생산한다고 생각했소. 혁명이 일어나길 꿈꾸기도 했지. 혁명이 올 때까지 살아있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말이오. 한마디로 폐쇄적인 삶을 살았던 게야.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소. 우리는 온실 속 화초였던 거요. 그때 우리는 별의별 사상을 다 만들어냈지.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사상이 우리의 상상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서방세계, 자본주의, 러시아 민족을 머릿속에 그리곤 했소. 한마디로 환상 속에서 살았던 거요. 책 속에서 보거나 우리 집 부엌에서 말했던 그런 러시아는 어디에도 없었소. 우리 머릿속에만 있었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오. 자본주의가 터진 봇물처럼 쏟아집디다. 90루블의 가치가 10달러 정도로 곤두박질했지. 그 돈으로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난 부엌에서 길거리로 나서야만 했소. 나만의 세계를 벗어나 보니 우리에게 사상이란 것이 없었다는 것을, 그저 항상 둘러앉아 계속 떠벌떠벌 말만 늘어 놓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어디선가 전혀 다른 류의 사람들이 출현했소. 산딸기색 재킷을 입고 굵직한 금반지를 낀 젊은이들(신 러시아인을 묘사하는 표현)이었소.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말해주었소. 돈이 있으면 인간이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법칙을. 내가 헤겔 전집을 읽은 사람이라는 걸 대체 누가 알아준단 말이오? ‘인문학도’라는 말은 병명같이 들렸지. 인문학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만델스탐의 작품집을 손에 들고 있는 것밖에 없다고 조롱하는 것 같았소.
미지의 세계가 열린 뒤 인텔리겐치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빈곤해졌소. 우리 동네 공원에서 주말마다 크리슈나파 교도(힌두교의 주요 종파 중 하나)들이 길거리 노점을 차려서 수프와 간단한 음식을 배식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노인네들로 줄이 얼마나 길게 늘어섰는지. 그걸 볼 때면 목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올랐소. 그중 어떤 노인들은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오. 그때 당시 우리 부부 사이에는 두 명의 어린 자식이 있었소. 우리는 원초적으로 배를 곯았지. 결국 우리 부부는 공장에서 아이스크림 4~6박스를 떼어다가 시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다오. 냉장고가 그때 어디 있기나 했겠소, 몇 시간 뒤면 아이스크림이 물이 되어서 뚝뚝 흘렀지. 그런 상태가 되면 우리 집 꼬맹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곤 했소. 얼마나들 좋아했는지! 얼마 뒤 아이스크림은 아내가 팔고 나는 짐을 옮기거나 운전을 하는 일을 했소. 물건을 파는 일만 아니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소. 난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적잖이 불편했지.
예전에는 우리의 ‘부엌에서의 삶’을 자주 떠올리곤 했소. 사랑이 많았던 그 시절을 말이오! 여성들은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때 그 여성들은 부자들을 증오했었소. 매수를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지. 하지만 이제는 감정에 허비할 시간이 없는 시대요. 모두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폭발과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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