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
서장
한 장의 사진: 박헌영, 주세죽, 그리고 현앨리스
─ 1921년, 상하이
이야기는 한 장의 사진(그림 1)으로부터 시작된다. 원기 왕성한 19명의 청년들이 사진에 자리했다. 11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은 보타이나 넥타이를 매고 양복이나 중국옷으로 성장盛裝을 했다. 모두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한껏 자신감 넘치는 포즈로 뒷짐을 지거나 팔짱을 끼었다. 첫째 줄 가운데 앉은 보타이를 맨 앳된 젊은이만 유일하게 약간 삐딱한 자세로 친구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가 팔을 기댄 친구와 그 옆의 친구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사진의 정중앙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선을 집중시킨 중앙의 이 젊은이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전설이 된 박헌영이다.
원래 그 사진은 박헌영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절인 1929년 각국 혁명가들과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왔다. 특히 이 사진에는 호찌민(뒷줄 왼쪽 끝)과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가운뎃줄 왼쪽에서 세 번째) 등 아시아의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상하이 시절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김단야(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양명(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베트남의 호찌민, 중국 의상을 입은 여성들, 일본 여학생 교복을 입은 여성, 앳된 소년 등이 보이므로 한국·중국·베트남·일본의 청년 혁명가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식되었다. 나아가 사진이 주세죽의 유품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박헌영과 주세죽의 외동딸인 박비비안나가 촬영 시점과 피사체의 신분을 확인해주었기 때문에 의문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1929년 모스크바에서 동아시아 혁명가들과 찍은 것이 아니라,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중국에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과 찍은 것이다. 촬영 시점(1929년), 촬영 장소(모스크바), 등장인물(호찌민, 주세죽) 등에서 오류가 있는 것이다.
첫째, 사진에 등장하는 박헌영의 나이와 포즈에서 단서가 발견된다. 1900년생인 박헌영은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동안童顔의 앳된 모습이다. 1923년 박헌영의 체포 당시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후 1925년 체포, 투옥 및 1927년 석방 사진이 남아 있다. 이 사진들은 통관이 선명치 않아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사진보다는 훨씬 더 나이든 모습의 박헌영을 발견할 수 있다. 박헌영의 분명한 생김새는 1928년 소련 망명 이후 주세죽과 찍은 가족사진들에 나타나는데, 1928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찍은 사진 및 1929년 아내, 딸과 함께 찍은 사진과 비교해보면 이 사진에 나타나는 박헌영은 훨씬 연소한 소년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박헌영은 1925년 체포 시점부터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이후로 계속 안경을 착용했는데, 이 사진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은 모습이다. 즉 박헌영이 안경을 쓰지 않던 1920년대 중반 이전의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박헌영은 장난기 섞인 듯 반쯤 가로로 누운 포즈로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국제 혁명가들을 배출하는 엄격한 규율의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포즈다. 즉 이 사진 속 박헌영은 안경을 쓰지 않은 보다 젊은 시절이며, 모스크바 재학 시점은 아니었을 것이다.
둘째, 호찌민으로 알려진 인물도 호찌민이 아닐뿐더러 시기도 불일치한다. 호찌민은 1929년에 모스크바에 있지 않았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 시기 「안남 인민의 요구」The Claims of the People of Annam로 이름을 알린 호찌민은 1923년 모스크바로 가 코민테른에 고용되었고 동방피압박공산대학Communist University of the Toilers of the East에서 공부하며 1924년 6월 코민테른 5차 대회에 출석했다. 호찌민은 1924년 12월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차이나의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고, 1925년 소련을 오간 이후 1927년 4월 소련으로 피신할 때까지 광저우에 체류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1927년 여름을 보낸 후 11월 파리를 거쳐 1928년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1921년에 촬영된 호찌민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주세죽으로 알려진 여성 역시 주세죽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그림 4). 우리는 1920년대 주세죽의 사진 세 장을 가지고 있다. 1920년대 초반 청계천에서 고명자, 허정욱과 탁족濯足하며 찍은 사진에서 주세죽은 세라복을 입고 있다(그림 7). 활기찬 여학생의 모습이다. 1928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헌영과 찍은 사진에서 주세죽은 산후에 부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이다(그림 6). 임신한 몸으로 국경을 건너 산욕에 시달린 후의 모습이 역력하다. 1929년경에 찍은 세 번째 사진은 주세죽, 박헌영, 외동딸 비비안나가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세 장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주세죽은 잘 생긴 외모에 통통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 빛나는 눈, 단정한 코, 넓고 반듯한 이마가 특징이다. 1928년과 1929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마의 정중앙이 아닌 왼편에서 시작하는 오른가르마를 하고 있다. 반면 주세죽으로 알려진 여성(그림 4)은 눈매, 코, 입술, 이마, 가르마, 어깨선 등에서 남아 있는 주세죽의 사진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진의 촬영 시점, 장소, 등장인물을 특정한 것은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으로, 원경스님은 사진의 소장자인 박비비안나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한 것이라고 한다. 박비비안나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박비비안나는 이 사진을 주세죽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아버지 박헌영과 어머니 주세죽이 이 사진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사진 가운데 누가 주세죽인가? 아마도 두 번째 열 오른쪽 끝에 중국옷을 입고 숄을 무릎에 두고 있는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이 여성을 주세죽의 1920년대 세 장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부드러운 얼굴선, 크고 빛나는 눈, 반듯한 이마, 좁고 부드러운 어깨선, 전반적으로 통통한 몸매, 박헌영보다 왜소한 체구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주세죽은 1921년 4월 상하이로 건너와 공동조계 북사천로北四川路에 있던 안정씨여학교晏鼎氏女學校에서 1922년 5월까지 영어와 음악을 배운 바 있다. 이 사진에서 중국 여성 복장을 한 것도 주세죽이 중국에 거주하던 시기에 찍은 사진임을 방증傍證한다. 사진의 오른쪽 상단 일부는 구겨져 훼손되었는데, 이 부분이 우연히 주세죽의 얼굴 중앙을 가로질렀고, 또한 얼굴의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 찍혔기 때문에 박비비안나가 착각했을 것이다(그림 8).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언제, 어떤 장소에서, 누구와 함께 찍은 사진인가? 박헌영은 1920년 11월 상하이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을 시도하다 1922년 4월 2일 중국 안동현安東懸(지금의 단둥丹東)에서 신의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 심문조서에 따르면 박헌영은 1921년 봄 상하이에서 학교를 다니던 주세죽과 결혼했다. 사진은 박헌영과 주세죽이 상하이에 공통적으로 체류했던 1921년 4월부터 1922년 3월 사이에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이 대부분 두터운 누비옷이나 숄 등을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겨울철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진은 1921년 하반기부터 1922년 상반기 사이에 촬영된 것임이 분명하며, 1921년 겨울에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촬영 장소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하이였다. 이 사진에서 주세죽은 중국옷을 입었으며, 다른 대부분의 여성들도 중국옷을 입고 있다. 1929년 모스크바에서 한국인이 중심이 된 모든 여성이 중국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 사진의 촬영 시점과 촬영 장소를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이 사진에 포함된 ‘1920년 상해 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었던 현앨리스’(그림 9)와 그녀의 남동생 현피터(그림 11)의 존재다.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기존의 설명에 따라 1929년 모스크바에서 아시아 청년 혁명가들을 촬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앨리스와 남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일본인으로 생각했다. 현앨리스가 입고 있는 일본 여학생 교복(세라복)과 현피터의 양복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차림새뿐만 아니라 외모에서도 사진 속 여타 인물들과 다른 특이한 분위기를 보였다. 특별한 자리에 갖춰 입은 입성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생활의 연장인 것처럼 보였다. 여하튼 이들의 돋보이는 면모는 단번에 눈에 띄었다. 사진 속 인물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현앨리스 오누이임을 깨달은 후에는 현앨리스 오누이가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오누이는 미국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현앨리스 남매는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1929년 모스크바에서 촬영했을 가능성은 사라졌다.
1955년 북한의 박헌영 재판기록에 따르면 검사총장 리송운은 「국가 검사의 론고」(1955년 12월 15일)에서 “박헌영이가 1920년도 상해 생활에서 조선 민족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이던 현앨리스를 자기의 첫 애인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즉 현앨리스가 1920년 상하이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었다는 것이다. 현앨리스가 1955년 북한의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박헌영의 옛 애인이자 미국 정보기관의 첩자로 등장한 것이다. 현앨리스가 미국 정보기관의 공작원으로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을 포섭하는 ‘한국의 마타하리’ 역을 맡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현앨리스와 현피터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상하이에 체류했다. 박헌영, 주세죽의 상하이 체재 기간과 겹치는 시기였다. 이들이 1920년대 초반 상하이에 체류한 것은 아버지 현순 목사 때문이다. 감리교 목사이자 1919년 3·1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현순은 3·1운동 발발과 33인의 독립선언 소식을 상하이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현순은 3·1운동 직전 상하이로 떠났으며, 상하이에서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에 3·1운동의 발발 소식을 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현순의 가족들은 미국 선교사 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한국을 탈출해 1920년 5월 8일 상하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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