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멋모르고 들여놓은 법학이 평생 업이 되었다. 정년퇴임을 기다렸다. 법학교수 전廛을 거두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은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수시로 다짐했었다. 새삼스레 해묵은 자료를 뒤진다. 빛바랜 복사물을 챙긴다. 1987년 초, 귀국 뱃짐에 켜켜이 쌓여 실려 온 내 청년시절의 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교수 자리를 얻기 전에 논문 형식으로 그의 저술과 판결문을 분석했다. 이제 다소 풀어진 글로 그의 삶과 시대를 되돌아본다. 이 책은 미국법을 공부한 나의 학문 궤적의 일부이기도 하다. 왜 내가 법학교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떤 법학자로 살고 싶었는지, 약간의 단서가 담겨있다. 내게 더글라스는 멋모른 채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나라 미국의 법을 공부하게 만든 중요한 이유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인전을 싫어했다.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 군자와 소인, 위대한 사람과 비열한 인간,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 두 부류의 인간만 있다고 가르치는 듯했다. 읽는 이의 열등감을 강요하는 주인공의 행적에 압도되었다. 위인은 모두 진실하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도식이 불편했다. 내가 읽은 법률가는 시종일관 약자와 정의의 편에 서는 사람뿐이었다. 옳은 일을 하는 인간은 조그마한 도덕적 흠도 없어야만 했다. 살아 보니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었다.
유려한 필치의 창의적인 판결문으로 초년 법학도의 혼을 앗았던 나의 사법영웅은 알아갈수록 흠투성이 인간이었다. 세상을 이끌고 깨우치는 출중한 법관은 응당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일 것이라는 유아적 환상을 벗어나면서 오히려 그의 인간적 결함에 애착이 갔다. 나잇살 먹고 보니 내가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일 뿐 행태는 비슷했다. 더글라스의 행장에서 때때로 내 삶의 자취가 엿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드러난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법률가로서 그의 사상과 철학만은 변함없이 내 의식을 지배해 왔다. 어느 사회에서나 90퍼센트의 법률가는 상위 10퍼센트 국민의 이익에 기식하여 삶을 영위한다. 나머지 10퍼센트만이라도 더글라스처럼 90퍼센트의 지친 영혼에게 연민의 눈길을 주는 나라, 그런 나라야만 살만한 가치가 있다. 행여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소수의 독자에게나마 그런 취지로 읽히기 바란다.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우선 나와 내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역사학자 약전 김성식藥田 金成植(1908~1986)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암울하던 군사독재 시절 ‘마지막 선비’로 칭송받던 약전선생님이야말로 언행일치의 표상이셨다. 1980년,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나서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시면서 선생님은 딱 한 마디 하셨다. “돌아오는 거지!” 1986년 1월, 유학과정을 마무리한 나는 일시 귀국하여 선생님께 진로를 상의드렸다. 한 주 후에 다시 뵙기로 했다. “네 아버지 묘소에 가거든 너를 남겨주어서 고맙다는 내 말을 전해라.” 사흘 후, 경남 밀양의 산촌 고옥에서 나는 선생님의 돌연한 부음을 접했다. 황망했다. 그때 심경을 이렇게 썼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가심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리라. 지난 10여 년 간 캄캄한 내 세계를 밝혀주던 큰 별은 사라졌고, 그 찬란한 빛을 내 어디서 다시 찾으리오만,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찾으리라. 끝내 찾지 못하면 내 작은 반딧불로라도 스스로 밝히리라. 언젠가는 별빛도 반딧불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그날이, 밝은 태양이 내 조국 산하를 영원히 비출 그날이 오리라 굳게 믿으면서.”
여섯 달 후, 나는 더글라스의 판결문을 분석한 논문집을 첫 저서로 출간해 선생님의 영전에 바쳤다. “선생님은 필자에게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주셨다. 선생님의 생전에 바치고 싶었던 소망은 불과 몇 개월의 시차로 무너졌지만 천국에서라도 이 책을 보시면 대견해하시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약자의 고난과 슬픔에 동참하는 행위라고 하신 선생님이기에 약자의 대변인, 인류의 후견인 다글라스 판사가 흘린 연민의 눈물에 합루合淚하시리라.”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모란공원에 모셨던 선생님의 묘소마저 내 기억과 추적권을 벗어났지만 선생님께서 주신 감화는 한 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대 대학원 시절의 지도교수 금랑 김철수琴郞 金哲洙 선생님이 베푸신 학은은 학자로서의 내 삶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자애로우신 선생님의 배려를 학문적 성취로 보답하지 못한 내 성정과 역량이 아쉽고 죄송스럽다. 그러나 당시 우리 학계를 지배하던 강력한 독일 ‘국가학’의 전통 아래서도 국가권력보다는 국민의 기본권에 비중을 둔 선생님의 민주헌법 철학만은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예비학자로서는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나를 모교의 교수로 채용해 주신 석암 배재식碩岩 裵載湜(1929~1999) 교수님의 열린 자세에 때늦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초임교수의 객기로 적지 않은 불편함을 안겨드렸지만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품어주신 배 학장님의 은혜는 내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을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대학원 시절 이래 우범 이수성又凡 李壽成 교수님에게서 받은 특별한 총애는 내 평생의 축복이다. 함께 재직했던 많은 선후배 동료들의 인도와 사랑에 감사드린다. 더글라스처럼 나이가 들어도 늙은이가 되지 않도록 청청한 정기를 공급해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산타클라라는 나의 미국법의 고향이다. 조지 알렉산더 학장님George J. Alexander(1930-2013)과 러셀 갤로웨이Russell W. Galloway(1940-1993) 교수님, 두 스승은 만학의 이방인 학생에게 미국헌법과 인권의 안목을 넓혀 주셨다. 선생이자 영원한 친구인 필립 히메네스Philip Jimenez교수의 우의는 내 가족 모두의 자산이다. 동급생 중에서 데니스 정Dennis Jung, 에밀리오 후에타Emilio Huerta, 미구엘 데마판Miguel Demapan, 유키오 덴고클Yukiwo Dengokl, 네 사람과 나눈 진한 우정은 오랜 추억거리다. (이들은 모두 더글라스 철학의 찬미자들이었다.) 워싱턴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더글라스 자의 열람에는 B.A. Kufner, Pablito Fuentes Garcia, 두 분의 노고가 컸다. 더글라스의 향리, 야키마와 왈라왈라 방문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야키마 역사박물관연구회Yakima Valley Museum History Society의 다이애너 리Dinah Lee, 스탠리 와그너Stanley Wagner Jr. 변호사, 두 분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2004년, 당시 생면부지의 필자에게 자신의 저술을 헌정했던 시카고 대학의 톰 긴즈버그Tom Ginsburg교수에게 때늦은 답례를 드린다.
많은 분들이 초고를 읽는 부담을 자원하였다. 그중에서 정종휴, 육성철, 김애경, 세 분은 필자가 그린 더글라스에 대한 인물평도 함께 돌려주었다. 편집과 교정의 가심질은 김종철 교수가 주도하는 영미헌법연구회 회원들의 몫이 되었다. 두 차례 독회를 거치면서 한결 가다듬어졌다. 김재원, 주한길, 김상준, 정인희, 장원일, 한상훈, 김영진, 이우영, 박종현, 최정인, 백재형, 최유경,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독회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오랜 시일 도움을 준 이동민과 강건우를 뺄 수 없다. 표지의 더글라스 초상은 이영비 화가의 작품이다. 출판 시황이 극도로 나쁜 시기에 또 다시 최형임과 KPI 출판그룹 라이프맵의 신세를 졌다. 고맙다는 말로는 크게 부족한 빚이다.
이 책을 오랜 친우 박용일에게 드린다. 용일은 내가 알게 된 무수한 법률가들 중에 더글라스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불우한 초년을 살아 넘긴 의지의 삶도 그러하려니와 작은 불의도 참지 못하는 원칙론자의 성마름, 산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열정과 사랑, 가히 주위를 위축시키는 강건한 신체, 때때로 방향을 예측하기 힘든 과도한 낭만성…. 이 모든 점에서 용일은 내게 더글라스의 현신이었다. 게다가 더글라스와는 달리 가족의 무한 신뢰라는 축복을 누리고 사는 그를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 헌법재판관이 되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2016년의 초입에서
안 경 환
1장
유년의 뜰
1980년 1월 23일, 워싱턴
윌리엄 더글라스 장로교목사는 맏아들, 윌리엄 오빌 더글라스가 부모처럼 신앙심이 깊은 인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아들은 자신의 영결 예배에서 옛 찬송가,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Shall We Gather at the River?〉를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생의 마감이 다가오면서 어린 시절 가족이 함께 불렀던 기억이 절실했던 것이다. 또한 〈주기도문〉 찬송가를 서부의 카우보이 옛 친구가 불러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세상을 하직한 지 오래다. 문상객들은 늙은 카우보이 대신 육군합창단의 솔로, 윌리엄 쿠겔 상사의 바리톤 목소리로 찬송기도를 들었다.
실로 생산적이었던 82년 긴 생애 동안 더글라스의 종교는 아버지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20세기 초에 아버지 더글라스 목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미네소타 북부의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아들은 설교단 위에 서지 않았다. 종교든 정치든 그는 정통교리를 신봉하지 않았다. 대신 인류 전체의 믿음과 소망을 전파하기 위해 이란과 외몽고의 외딴 마을을 찾았고, 원시림에 저술과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어느 장소보다도 미국연방대법원 판사석에 앉아서 자신의 설교문을 썼다.
더글라스 목사는 점잖고 겸손한 성직자로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아들은 무수한 사람의 찬양은 받았지만 결코 점잖거나 겸손한 인물이 아니었다.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고 언제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이 강할수록 더욱 강력한 투사가 되었다. 1950년대에는 매카시 광풍에 맞섰고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미국정부를 상대로 반대의 군단을 이끌었으며, 1970년대 초에는 민주주의의 근간과 법치주의의 기초를 유린하는 닉슨행정부의 강력한 적이 되었다. 대법원 사상 유례없는 네 차례의 탄핵시도를 버텨 낸 의지의 인물이기도 했다.
36년 7개월의 대법원 재직기간 동안 더글라스 판사는 헌법 속의 권리장전을 현실의 규범으로 만들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데 진력했다. 전통적인 기준으로 볼 때 형식과 내용에 있어 파격의 극치였던 그의 판결문들은 자신의 말대로 ‘국민의 몸에서 정부권력을 떨쳐내는’데 과녁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말의 의미는 멸시당한 자, 눈물과 한숨 밖에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돈지갑이 얇은 국민을 포함하여 모든 국민이 헌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더글라스의 공적 이미지는 그의 실제 삶과 항상 부합되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 일한 동료 중 일부는 그를 차갑고 타산을 앞세우는 인간으로 경멸했다. 그를 모셨던 연구원과 직원들은 몹시 가혹한 상사로 기억한다. 한마디로 더글라스는 멀리서 찬양할 수는 있지만 가까이서 좋아할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더글라스의 개인사도 공적생활만큼이나 비정통적이었다. 무려 네 차례나 결혼했고, 아내들과 자녀에게 냉혹하거나 무관심했다. 아버지 더글라스 목사가 천상에게 개탄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들도 아버지처럼 인류를 위해 봉사했다. 그것도 아버지가 감히 상상조차 못할 큰 무대 위에 우뚝 서서 수천만, 수억 지구인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주었다. 1980년 1월 23일, 수도 워싱턴의 장로교회National Presbyterian Church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 열렸다. 미합중국 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 상하 양원의 지도자들, 그리고 연방대법원 판사 전원이 함께 자리하여 찬란했던 고인의 생애를 묵념으로 반추했다. 전 국방장관 클라크 클리포드의 조사는 이렇게 마감했다.
“빌 더글라스, 그로 인하여 우리들 각각이 더욱 자유롭고 안전하고 그리고 강력해졌습니다.”
병치레 아이, 어머니의 보물
1898년 10월 16일, 미국 미네소타 주 북부의 한 지방신문 〈퍼거스폴스 위클리 저널The Fergus Falls Weekly Journal〉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강화회담 소식을 실었다. 미네소타는 맥킨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사악한 스페인을 상대로 하는 합중국의 전쟁에 지원병을 보낸 최초의 주였다. 미.서전쟁의 결과로 미국이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파리 발 뉴스와 함께 독자는 아직도 합중국 땅 안에 19세기적 위험이 잔존하고 있음을 알리는 소식을 읽었다. “리치 레이크 인디언, 합중국 군대 습격, 퍼구스 폴스 북쪽, 리치 레이크 전투에 치페와 인디언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출동하고 있었다. 양쪽 다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
전쟁과 평화의 소식을 함께 실은 신문은 지역의 일상사도 보도했다. 윌리엄 더글라스 목사가 퍼구스 폴스 북쪽 15마일 지점 엘보우 레이크의 장로교회에서 설교한 소식이 실려 있다. 그러나 더글라스 목사에게나 미국국민에게나 더욱 중요한 기사는 아주 작은 활자로 단 두 줄 찍혀 있었다. 퍼구스 폴스 북쪽 10마일 지점의 작은 마을 메인Maine에서 목사부부의 아들, 윌리엄 오빌 더글라스가 출생한 소식이었다.
1871년에 조성된 메인은 다섯 개의 호수와 농부들의 개척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척민을 따라 교회가 몇 개 들어섰다. 그 중 하나가 1887년 지역 신도들이 희사한 성금 5백 달러로 건축한 메인 장로교회였다. 최초의 목사는 ‘주님께서 지역에 내리신 선물’로 칭송받는 알프레드 프티트Alfred Petit였다. 1895년,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아 출신의 신학교 학생, 윌리엄 더글라스가 부목으로 합류했다. 큰 키에 구레나룻이 진하고 표정이 진지한 청년이었다. 청년의 조부 콜린스 더글라스는 1773년 스코틀랜드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노바 스코티아의 미들리버 동쪽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부와 장로교 신자의 삶을 살았고, 그의 삶의 패턴은 아들 알렉산더에게도 승계되었다. 그러나 손자 윌리엄은 신심은 깊었지만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 공부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은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고 노래하는 전도사로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목청을 잃고난 후로 성가와는 인연이 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은 깊은 신앙심은 그를 목회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시카고의 성경학교로 보낸다. 그리고는 미네소타로 이주시킨 것이다. 윌리엄은 메인 장로교회의 프티트 목사 아래서 부목의 일을 보면서 교회의 오르간 주자, 줄리아 피스크와 사랑에 빠졌고, 1년 후 둘은 정식 부부가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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