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빈틈이 사라진 시대,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가 통절하다
지금 지구촌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자체를 정화할 수 있는 ‘빈틈’이 사라진 세계다. 끊임없이 착취하여 확대재생산하여 축적해야만 존속하는 자본주의는 이제 자연에서든, 국가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의 마음에서든 빈틈을 거의 없애버렸다. 그 바람에 지금 세계는 어둠에 가득 차 있으며, 인류 종말의 유령이 환경 재앙과 경제공황, 도덕 붕괴의 모습을 띠고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다.
중세의 암흑을 열어젖힌 혁명의 빛은 거의 사위었다. 독점과 화폐와 탐욕으로 깃발은 짓밟히고 다른 구호와 이미지가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 늘 그렇듯 민중이 피를 흘려서 쟁취한 혁명의 성과는 엘리트가 독점했다. 산업화와 근대화, 이와 결합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는 굶주림과 빈곤, 질병과 미신, 신분과 제도의 억압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대신, 자연과 인간성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해체했으며 소외를 심화하면서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고 새로운 억압을 형성했다. 이제 돈이 신이 되어 인간답고자 추구했던 아름다운 가치, 우애, 협력, 정의를 게검스레 포식해버렸다. 대중은 신과 고향을 잃었고 자신의 존재 의미마저 상실하였다. 자본에 예속된 사람이나 국가는 더 많은 돈과 물질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기, 폭력, 살해, 전쟁을 서슴지 않는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모든 인종이 다른 인종에 대해, 모든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모든 종교가 다른 종교에 맞서서 행하는 싸움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주술의 정원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던 이성은 계몽의 빛을 상실한 채 합리성의 이름 아래 도구화하여 이런 야만에 제동을 걸기보다 외려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억압을 심화하고 있다.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마지막 보루인 대학과 종교조차 자본과 제국의 식민지로 변했으며, 도덕과 윤리, 신의 말씀은 탐욕과 천박함을 고상함으로 감추는 위장술로 전락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 문제를 해결할 대안인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마저 해체하고 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시민사회가 기존의 권력에 맞서서 형성했던 공공영역은 날이 갈수록 위축되고, 시민이 피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는 모든 국가에서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국가는 자본의 야만을 견제하기는커녕 동맹을 맺고 자본의 앞잡이를 자처하고 있다. 국가는 정당성을 상실한 채 자본의 이익과 권력의 유지를 위해 시민과 노동자를 억압하고 통제하고 있다. 민중이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인류의 보편적인 원칙이 되어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명시되었지만, 제국과 국가, 자본의 연합체는 이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모든 나라의 언론은 자본에 종속되었으며, 진리는 권력의 담론 내지 이데올로그의 선전물로 전락했다.
미국의 연방대법관인 벤자민 카도조Benjamin N. Cardozo가 1937년 팔코 대 코네티컷 재판에서 판결한 대로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모체이자 절대 필요한 조건”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무너지자 다른 자유 또한 급속도로 훼손되고 있다. 자유는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의 독점물로 변질되고, 약자들은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거나 자본을 축적하는 데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리고 있다. 아니, 거의 그들을 위해 생산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유만 주어지고 있을 뿐이다. 자본과 권력이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그리 선출된 자들은 시민 대신에 자본과 권력의 명령에 따라 법을 만들고 정책을 편다. 자본과 국가가 아무런 규제 없이 노동자가 생산한 것을 빼앗고 수조 원에 달하는 국민의 혈세를 빼돌리고 금융 사기를 부려도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는다. 노동자와 시민이 항의하면 집회는 원천봉쇄당하고 말들은 검열로 사라진다. 도, 감청과 사찰로 세상은 커다란 원형감옥panopticon으로 변했다. 국가기관이 빅브라더가 되어 시민과 노동자를 감시하고, 초국적 자본에 조종되는 미국은 전 세계의 메일과 통화를 도청하고 있고 구글과 페이스북은 기꺼이 협조자로 나선다. 그 속에서 노동자와 시민은 무의식마저 지배당한 채 노예도 같고 죄수도 같은 삶을 겨우 이어가고 있다.
2008년을 기점으로 도시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세계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날마다 자연을 파괴하고 소비에 치중하면서 쓰레기를 양산하는 데 동참하고 있다. 절반에 가까운 생명체가 멸종 위기에 놓일 정도로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는 극심하며, 산업화의 동력이었던 화석연료는 80년 치가 채 남지 않았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행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적대로 노숙자가 죽는 것은 보도가 되지 않는데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졌다는 것이 뉴스가 되는 시대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인간성과 존재 의미를 잃고 물신과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1퍼센트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불평등한 제도를 강제하고 그 풍요와 자유를 특정한 사람들에게 몰아주는 바람에 총체적인 불평등이 인류 사회를 공멸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73억 8천만 명의 전 인류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정도로 매년 22억 톤에서 25억 톤에 이르는 곡물이 생산되지만, 사료나 연료로 쓰고 이의 배분이 정의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메이저 곡물회사들이 바다에 버리면서까지 곡물가를 조작하는 바람에 10억 명 이상이 굶주리고 있다. 1퍼센트들은 별다른 규제 없이 마음대로 99퍼센트를 착취하고 수탈하고, 99퍼센트는 교육 등 삶을 개선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생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불평등은 나날이 심화하고 이로 말미암아 경제발전은 위축되고 곳곳에서 공동체가 파괴되고 전쟁과 테러와 폭동은 점증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극한 경쟁이나 공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 상황에서 중심국과 주변국, 서양과 중동, 미국과 중국, 1퍼센트와 99퍼센트, 종교 및 종파 사이에 갈등은 점점 고조되고 전쟁과 테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로 최소한 5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향과 조국을 떠나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 선진국의 상류층은 겉으로는 풍요 속에서 행복한 듯하지만 실은 소외, 불안, 고독, 스트레스, 우울증, 비만, 탐욕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고 있다.
한쪽에서는 수억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 한쪽에서는 너무 먹어서 병이 드는 부조리가 지속되고 있다. “해마다 대략 1500억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가난한 이가 적절한 영양과 식수는 물론 기초적인 교육과 의료와 위생 시스템을 보장받고 여성의 경우 적절한 산부인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넉넉잡고 1500억 달러면 10억 명의 사람들이 영원히 굶주리지 않게 함은 물론 그들에게 기초적인 의료와 교육을 실시하는 체제를 만들 수 있는데, 해마다 기아에 허덕이는 8억여 명이 먹고도 남는 양, 4000억 달러(약 439조 원)어치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며, 미국 한 나라에서만 너무 먹어서 비만 관련 의료비로만 매년 147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으며, 군사비로 2014년 한 해에만 1조 7760억 달러를 썼다.
중심에 의한 주변의 착취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본의 야만을 규제하던 모든 가치와 제도를 자유의 이름으로 풀어버리고 제국과 중심이 마음대로 지배하고 착취하고 조작하는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부의 국민은 풍요에 의한 병으로 죽어가는 반면에, 주변부의 국민은 밥과 빵은 물론, 맑은 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미국은 군사력과 달러화를 무기로 삼아 전 세계 경제를 자국에 유리하게 조정하거나 조작하고 있다. 때로는 신용평가 회사와 WTO, IMF 등 제국의 합법적 장치를 동원하여 제3세계의 정책을 조정하거나 국가 부도로 몰아, 헐값으로 민족 기업과 자원을 인수하고, 때로는 그라나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처럼 정복 전쟁과 침략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1퍼센트들은 금융과 신용을 조작하여 부당한 이득을 챙기고, 시장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남발하고 노동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더욱 야만적으로 99퍼센트를 수탈하고 있다.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절반가량을 가져가는 나라도 태반이고 경영층의 급여는 같은 회사 직원의 100배에서 300배에 이른다. 그럼에도 99퍼센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점점 더 가난해지고 굶주리고 있다.
폭력은 더욱 격화하고 있다. 공권력이 시민에게 과도하게 폭력을 행하고 있으며, 집단학살도 끊이지 않는다. 종교든 인종이든 민족이든, 그것만의 동일성의 틀에 갇힌 이들이 희망과 대안을 상실하고서 절망에 잠기면 다른 종교, 인종, 민족을 타자화한 집단폭력과 테러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수많은 젊은이가 이 유혹에 이끌리고, 여기저기서 집단폭력과 테러가 속출하고 있다. 제국은 반테러를 명분으로 세계 곳곳에서 인권유린, 고문, 시민의 사찰과 도청, 민간인 학살을 버젓이 자행하고 수십,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쟁도 주저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은 권력이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갈등을 조장하고 전쟁을 감행한다. 군산복합체는 이런 구조 속에서 이를 부추겨 무기를 팔아먹는 데 광분하고 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원본과 실체는 사라진 채 그를 이미지와 기호가 대신하고 있으며, 말들은 타락하여 텅 빈 기표로만 부유한다. 대중은 자본과 권력이 만든 이데올로기와 이미지에 조작당하여 비판적이고 변증법적인 이성을 시나브로 상실하고 탐욕과 경쟁심을 점점 키우면서 과도한 일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고 있다. 지금 지구촌이 견고하고 질서정연한 것 같지만, 세계대전, 테러, 핵발전소의 사고, 신종 질병, 컴퓨터 바이러스, 메가 가뭄 등 급격한 기후변동으로 인한 슈퍼 재앙이 한순간에 이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준거는 너무 많아서 없다. 의미와 이야기가 사라지자 존재 또한 망각했다. 인간이 늘 행복할 순 없다. 대신 어두울수록 별은 맑게 반짝였고 고통이 클수록 의미는 깊어졌으며, 타인의 고통은 공감과 연대로, 고통의 기억은 진보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본은 고통에서 경험과 물질성을 제거하여 이마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상품으로 만들었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결국, 지금 여기에서 원본을 찾을 수 없는 현실, 의미를 상실한 존재, 깨달음을 망각한 수행, 실존으로 이어지지 않는 불안, 거룩함이 사라진 신, 함께함이 없는 행복, 부정과 생명성이 없는 예술, 그리움이 말라버린 고향, 지표를 지워버린 유토피아, 성찰 없는 과거, 초월 없는 현재, 거듭남과 변혁 없는 미래가 갈마들며 거미처럼 영혼의 체액을 빨아먹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돈과 물신의 숭배, 자본의 과도한 착취와 소외의 심화, 국가의 통제와 억압,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환경 파괴, 공동체의 붕괴, 존재의 의미 상실, 제국의 착취 및 수탈과 폭력 등 20세기의 모순은 21세기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 심화했다. 이에 더하여 이성과 과학의 이데올로기화, 신자유주의 체제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 및 1퍼센트의 독점과 수탈, 슈퍼 재앙, 위험과 위기의 일상화, 재현의 위기, 상징과 무의식의 조작과 억압, 탐욕과 경쟁심과 스트레스의 증대, 천연자원의 고갈 등 21세기 사회의 모순이 더해지고 있다. 이 속에서 인간은 제국과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든 상품과 탐욕에 영혼을 저당 잡힌 채 과도한 일과 스트레스, 불안, 절망, 소외로 시달리고 있으며, 때로는 이를 타인, 특히 소수의 약자에 대한 증오와 폭력으로 표출하고 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나라도 지구촌의 위기를 공유하면서도 차이를 보인다. 대한민국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25억 년 동안 불과 물과 바람이 깎고 다듬은 자연은 어딜 가든 기묘한 형상을 한 채 산과 내와 들이 아리땁게 어우러진 명품이었고, 마을은 그 어울림 안에 늘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품새로 자리 잡았다. 예부터 사람들의 인심이 순후하고 아이나 무지렁이도 도덕과 윤리를 숭앙하여 공자도 예禮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말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굶주리면서도 더 가난한 새를 위하여 까치밥을 남기고 거지가 오면 개다리소반에 밥상을 차려주었다. 돈보다 꽃을 좋아했고, 경쟁하기보다 함께 어울리는 신명과 풍류를 사랑하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정을 주고 이것이 끊어져 한이 되면 신명으로 승화시키는 풀이와 놀이와 예술 행위를 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외침을 받으면서도 5천여 년 동안 독자적인 말과 글, 사상과 예술을 형성했다. 지금도 뜨거운 국을 먹으며 시원하다고 하듯, 세계를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아우르고자 했다. 개인보다 늘 함께 잘사는 공동체를 꾸리고자 했고, 이기적이거나 물질을 밝히는 이들은 지탄을 받았다. 칼보다 붓, 무사보다 선비를 숭상했고, 선비들은 돈과 권력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대의와 지절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달을 좋아하여 달 밝은 밤이면 모두가 나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했다.
하지만 지배층의 부패와 탐학, 봉건 체제 개혁의 실패 등 내부 요인도 작용했지만, 압축적 근대화와 서양화, 일제강점기와 개발독재,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내 조국은 가장 추한 나라, 노동자와 청년에게는 지옥처럼 살기 어려운 ‘헬조선’으로 변했다.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 속에서 전통의 가치와 문화를 빨리 버리고 근대화와 서양화를 수용하는 자들이 권력과 명예, 자본을 얻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낙오했다. 일제는 한국의 모든 자원과 노동력, 몸과 성을 야만적으로 수탈하면서 한국적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말과 글, 사상, 가치, 문화를 억압하고 왜곡하고 일본화와 식민지적 굴종을 강요했으며, 고유의 문화와 사상, 예술 가운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합리화할 수 있는 부분만 남겨 전통으로 포장했다. 미 군정기와 한국전 이후 기독교, 미국적 가치와 생활 방식이 우리의 고유 종교, 문화와 가치, 생활 방식을 대체했으며, 대중문화는 몹시 빠른 속도로 미국화했다. 일본 무사로 육성된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달의 나라를 칼의 나라로 바꾸었다. 박정희부터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 정권은 독점자본 및 미국과 동맹을 맺고 온갖 폭력을 동원하여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노동자와 환경을 야만적으로 희생하고 착취하면서 제국과 자본에 편향된 산업화와 개발을 군사작전처럼 추진했다. 민주화 정권은 인권의 가치를 보편화하고 대의민주주의를 구현했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를 추진했고 반노동정책을 견지했다. 국가를 통째로 사유화한 이명박 정권과 지독하게 무능하고 독선적인 박근혜 정권은 민중이 피를 흘려 쟁취한 1987년 체제를 사실상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신자유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갔다.
이런 상황에서 아름다운 곳에는 개발의 삽질을 하고, 세계나 사람은 철저히 둘로 나뉜 채 치열하게 싸움질을 한다. 풀이와 놀이와 예술은 상품으로 전락하고, 사람들도 물신과 탐욕, 동일성에 사로잡혀 돈 몇 푼에 사람을 살해하거나 해를 끼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강대국 사람에게 굽실거리고 약소국 사람을 천대한다. 선비는 사라지고 졸부가 허세를 부린다. 나쁜 제도와 시스템, 지도자로 인하여 착한 사람이 더 고통을 받고 손해를 보기에, 사람들은 서로 악마성을 조장한다. 감시체계가 무너져 견제세력이 사라지자 관료와 정치인은 마음대로 비리를 일삼고 1퍼센트들은 불법과 사기까지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고 있다. 부패와 비리가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은 데다가 구조적이어서 대형 사고가 연이어서 발생한다. 아이는 경쟁에 불타고 어른은 불륜과 외도로 눈이 뒤집혔다. 자기실현이 아니라 생존을 하거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과도한 노동을 하느라 모두가 피로하여 아무도 주변을, 별과 달을 쳐다보지 않는다. 대다수 대중이 지배층에 투항하거나 포섭되었다. 극소수가 저항하지만 언제나 섬이 된다.
지금 공멸이나 혁명의 전야와 같은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희망과 인간다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인간은 모순적 존재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살해하면서도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너무도 부족하고 한계가 많지만 완성을 지향하며, 의미로 가득한 텍스트를 통째로 던져주어도 단 한 낱말도 모르다가 전혀 의미가 없는 자리에서 새로운 해석을 하고, 불안과 두려움과 무력감에 빠지지만 실존을 하고, 상황에 얽매여 야만을 범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되풀이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먼지처럼 작아 우물 안 개구리를 반복하지만 전 우주를 사유하고, 수많은 실수와 죄를 저지르지만 성찰하고, 끝없이 욕망하면서도 비워서 나누고, 너무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지만 극단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만들어 결단하고 도전하여 바꾸고, 현재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더 거룩한 것을 향하여 나아간다. 전자와 후자 모두 인간의 본성이겠지만, 인간다움은 전자에서 후자를 지향할 때 발현되는 것이다.
인간이 직업과 지위 고하, 인종과 신앙을 떠나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명제는 21세기 오늘에도 유효하다. 모두가 이고득락離苦得樂, 곧 슬픔과 고통을 멀리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하며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그럼 행복의 길은 무엇인가. 불행의 원인이 나의 탐욕과 무지와 성냄 때문이라면 더욱 깨우치고 수양할 일이다. 내가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 자본, 국가, 제국에 있다면, 그에 저항하여 새로운 시스템과 세계를 만들어야 하리라.
주체란 관계 속에서 생성되기에 인간은 나만 홀로 행복할 수 없다. 네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있다. 모든 인간은 서로가 깊은 연관을 맺고서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조건이 되고 영향을 미치고 의지하며 서로를 만들어주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다. 주체란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허상이지만, 자기가 공空하다고 함으로써 타인을 생성시키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기 안의 부처, 곧 인간다운 본성을 형성하는 눈부처-주체다. 그의 꿈, 지혜, 말과 행동을 닮거나 가슴에 품으려 할 때 내가 생성되며, 나 또한 그에게 그리 작용한다. 그가 미소 지을 때 내 얼굴에서도 긴장이 풀리고 웃음으로 화답한다. 나보다 더 아픈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 자리에 나의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게 되며, 신 또한 거기에 자리한다. 내가 그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때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하여 나는 오늘 저항한다. 그를 만들고 나를 만들기 위하여. 그를 행복하게 하여 내가 행복하기 위하여. 오늘의 나와 미래의 사람들을 위하여. 진정으로 건전하고 해방된 세상을 향하여.
늦었지만, 대한민국이든 세계든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성찰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돈키호테보다 프로메테우스가 되려면, 좀 더 차가운 머리와 멀리 보는 눈이 필요하다. 저항이 수영장 안의 물장구질이 되지 않으려면, 화살은 부조리한 세계의 심장을 곧바로 향해야 한다. 낡은 틀과 구조 자체를 해체하지 않는 그 어떤 대안도 미봉책일 뿐이다. 현실에 발을 디디지 않는 비전은 허망한 꿈이거나 관념의 유희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혁신하지 못한 비전은 낡은 구조를 찍어낸다. 알을 깨는 고통을 감내하는 새만이 바깥세상을 보며, 둥지의 안온한 행복과 결별하는 새만이 푸른 하늘을 비상한다. 깨달음은 안과 밖이 동시에 감응할 때 찾아오며,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이루어질 때 새 하늘은 열린다.
지금 비판과 부정을 본령으로 할 인문학마저 대중화를 명분으로 시장에 포섭되어 상품화하고 지식인은 자본과 국가의 마름 구실을 충실히 하고 있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이 인간이란, 인간에 관한 학문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인문학은 가장 아픈 자리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질문과 공감에서 출발해야 한다.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직시하는 것이며, 듣는다는 것은 그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며, 산다는 것은 이를 가슴으로 끌어안아 결단하여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구름에서 땅으로 내려온 철학인 마르크시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오늘, 자본과 인간, 세계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이보다 유용한 이론은 없다. 소련이 해체되었지만, 화폐와 상품을 매개로 가치가 달라지고 노동과 인간관계가 변질되는 과정을 통찰하는 정치경제학으로서, 화폐와 상품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자본과 노동이 대립하는 사회를 분석하는 사회과학으로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는 가치 체계로서, 모든 대립물의 투쟁과 상호 의존의 통일을 추구하는 변증법의 원리로서, 강자나 가진 자가 아니라 약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민중철학으로서, 노동이 해방되고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개인의 연합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유토피아로서 마르크시즘은 아직 인류의 빛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지지 못한 자가 주인이 되어 함께 잘사는 세상을 연 볼셰비키 혁명, 그 불은 찬연히 타올랐지만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사위고 있다. 교조는 언제나 지성의 무덤이자 폭력이다. 낡은 체제와 권력에 대한 저항은 진보를 향한 꿈과 열정,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대와 더불어 성찰을 동력으로 한다. 아무리 숭고하고 정당한 진리라 하더라도 인간을 넘어설 수는 없다. 자유 없는 정의와 평등이 개인을 억압한다면, 정의와 평등이 없는 자유는 개인의 악마성을 키운다. 자본의 해체 없이 국가가 공동선을 추구할 수 없고, 국가로부터 권력을 빼앗지 않고서 자본을 해체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나와 세계의 변혁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이 변해야 세계가 바뀌며 새 하늘이 열려야 개인의 거듭남도 유지된다. 진보의 한계와 오류를 성찰하고서 그를 보완할 지혜를 붓다에게서, 이를 화쟁의 원리로 하나로 아우른 동쪽 변방의 철학자 원효에게서 찾는다. 마르크시즘과 진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거듭나야만 21세기에도 빛과 힘으로 남을 수 있다.
하버마스(ürgen Habermas는 불교와 유교, 기독교가 공존하는 한국에서 의사소통 이론의 한계를 극복할 지혜를 얻고 싶었는데, 정작 한국 지식인은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의 태도를 취했다. 수많은 서양 이론이 한국에 수용되었지만, 모두 유행처럼 스치고 지나갔고 수입오퍼상이란 오명만 남았다. 민족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종합하는 것은 현실과 이론의 종합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서구추종주의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으로 서양 학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동양이 대안이라는 주장이 일고 있지만, 고물상인지도 모른 채 당위와 선언으로 그치고 있다. 서양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편성을 상실한, 우물 안 개구리의 합창이다.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동양식 전제정권,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중세의 봉건사회로 퇴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더 낫다. 현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의 모순에 대한 인식과 비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복잡해진 21세기의 사회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현들의 현학적이고 신비적인 은유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는 모든 이론은 관념의 유희다.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서양 이론은 실체론과 이분법, 동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연기론과 퍼지fuzzy식 논리, 차이의 사유를 하는 불교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그릇에 담길 수 있다. 초역사적이고 관념론에 치우쳤으며 과학성과 합리성을 결여한 불교는 마르크스와 서양 이론을 통해 중생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직시하면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결합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틀과 방법론을 빌리면서 유심론에 유물론적인 인식을 끌어안을 수 있다. 하여 불교가 개인의 깨달음에 머물 때, 마르크시즘은 세계 자체를 전복하고 모두가 해방되는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마르크시즘이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모순에 대해 첨예하게 분석하면, 불교는 양자를 하나로 아우르는 길을 펼칠 것이다. 마르크시즘이 현대사회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는 과학이 되면, 불교는 그 너머를 사유하는 지평을 열 것이다. 마르크시즘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불교는 그 비전을 향하여 깨달음과 보살행의 사다리를 놓을 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별이 될 것이며, 그 빛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새로운 세상으로 개벽하는 순간,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며 마르크스도 죽이고 부처도 죽일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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