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정체성의 문제
먼저, 이 수수께끼 같은 책 제목1)부터 설명해야겠다. 소문자로 시작되는 ‘브라질’brasil과 대문자로 시작되는 ‘브라질’Brasil의 근본적인 구분이 필요하다. ‘소문자 브라질’은 브라질 국명의 기원이 된 나무 이름, 또는 식민지 개척 당시 포르투갈이 사용한 교역소feitoria의 명칭이다. ‘대문자 브라질’은 민족, 국가, 가치 체계, 삶의 가치와 선택, 이상理想 등의 총체를 의미한다. ‘소문자 브라질’은 생명 없는 객체, 주관적 자의식 또는 내부의 미미한 흐름, 소멸했고 더 이상 시스템으로서 재생될 최소한의 여지도 갖추지 못한 물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19세기의 몇몇 사회 이론가2)들은 ‘포르투갈과 유럽의 유실된 파편’인 이 땅에서 병적이고 저주 받은 인종들의 총체를 보았다. 이 땅의 인종들은 피가 섞인 데다가 무성한 자연과 열대기후의 영향이 가세해 퇴폐적이 될 운명, 생물학적・심리학적・사회적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대문자 브라질’은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대문자 브라질’은 나라, 문화, 지리적 장소,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국경과 영토이자 동시에 보금자리이며, 브라질 국민들의 땀이 서린 토대이자, 안식처, 기억이면서, 특별하고 유일하며 완전하게 성스러운 연결 고리를 가진 공간에 대한 의식을 가리킨다. ‘대문자 브라질’은 또한 자신만의 사건들을 지닌 독특한 시간이요, 카니발 축제 속에서 가속화될 수 있고, 죽음과 기억 속에서 멈춰질 수 있으며, 좋은 추억 속에서 곱씹을 수 있는 시간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게 지역화된 리듬을 지닌 시간과 시간성은 대체가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일단의 가치를 추종하고 오로지 그들만의 기준 안에서 인간의 행위를 판정하는 사회. 그 사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유기성 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합쳐지고 확대되는 그 어떤 것으로서 자아 성찰과 의식으로 충만한 살아 있는 실체다. 여기서 ‘대문자 브라질’은 위대하고 강력한 영靈처럼, 부분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고 부분적으로는 신비스러운 존재다. 마치, 모든 곳에 임하고 그 어느 곳에도 임하지 않지만 자신을 우월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정해 줄 인간들을 필요로 하는 유일신Deus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브라질 태생의 성인成人이라면 그가 어느 공간에 속해 있든 간에 ‘대문자 브라질’이 함께한다. 하지만 그 존재의 신성함에 구체성과 권위를 느낄 수 있도록 그 존재감을 나타내거나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동시에 그와 반대로, 그 존재는 우리가 매일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존재감이 없고, 비교나 대조 같은 것을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떤 징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식하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이 만들어 낸 특정한 신들은 특정한 순간, 특정한 인식 틀 안에서만 존재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회에 대한 지식, 특히 우리 브라질 사회에 대한 지식을 가장 공식적이고 존귀한 표상들을 통해 습득하는 데 익숙하다. 교회를 통해 신성함을 접할 수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일반적으로 좀 더 ‘교양 있는’ 목소리를 통해 인지된다.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는 전통주의자들에게, 신들은 기도하고 헌신하는 성소나 예배당 그리고 성서에나 등장하는 존재다. 상상력이 떨어지고 무딘 관찰자들에게, 사회는 과학과 문학과 예술 안에서만 존재한다. 공적인 시각은, 국민의 목소리와 시각, 더군다나 모든 곳(성당의 화려하고 엄숙한 제례 의식에서, 인간의 숙명에 대한 염려의 창살 안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삶의 복합적 의미의 환상적인 무게에 짓눌려 겪는 신비주의적 환영 속)에서 넉넉하게 신을 보는 인간적 조건 속에서의 경험과 모순된다.
우리는 이 책에서, 비교를 통한 개방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비전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인류학의 도움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브라질 사회, 신성한 것으로 섬기며 사랑하는 브라질 사회의 여러 가지 양상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대문자 브라질’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공식 언어로 이야기해야 하는 법, 정치, 경제 영역에도 ‘대문자 브라질’이 존재하고, 또한 우리가 먹는 음식과 입는 옷, 거주하는 집, 사랑하고 아끼는 여인들에게조차 ‘대문자 브라질’은 존재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법률에서 사용되는 명증한 단어들이 더욱 권위를 더해 주는 법원, 의회에서 행해지는 고귀한 의식 가운데서 ‘대문자 브라질’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법원 건물의 대리석처럼 차갑고 준엄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더라도 실제로 법이 집행될 때 발생하는 ‘제이칭뉴’jeitinho 3), ‘말란드루’malandro 4) 안에도 ‘대문자 브라질’이 또한 존재한다. 이처럼 ‘대문자 브라질’은 어느 곳에나 있다. 아니, 어디에서든 조우할 수 있다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잘못은 우리 사회가 마치 외부에서 주어진 공학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기계처럼,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장소(번지수가 틀린 곳)에서 ‘대문자 브라질’을 찾으려는 것에 있었다.
성스럽고 진지하며 법적인 것에서 비롯된 ‘대문자 브라질’이 좀 더 일반적이고 친숙하다는(친숙한 시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나는 다른 관점들과 질문들을 통해 ‘대문자 브라질’을 이 책에서 밝혀 보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전적으로 공식적인 시각만을 전달하거나, 대부분의 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고 학교에서 교사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재생산해 내는 수준의 사회・역사적 지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을 것이다. 대신 전적으로 브라질 국민들과 그들의 일상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대문자 브라질’을 다룰 것이다. 음식 속에, 여인네 속에, 식견 높은 신부들의 복잡한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종교 속에 깃들어 있는 브라질. 일상 속에서, 희로애락을 주고받으며 작동하는 우정과 혈연의 법칙들이 작동하는 브라질,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영위해 가는 집과 가정에 깃들어 있는 브라질. ‘말란드라젱’malandragem 5)과 카니발의 기발하고 발랄한 장난들(우리는 딱히 범죄자가 될 필요 없이 이 장난을 치고, 그러면서 시작과 끝 시간이 정해져 있는 주변부적 상태를 경험한다) 속에 깃들어 있는 브라질. 이 ‘대문자 브라질’들은 은행 계좌의 돈이나, 혹은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기술 관료와 이념가들에 의해 고무된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전적으로 설계되고 패권적으로 표준화된 삶을 거부한다. 법을 다수에, ‘사람’pessoa 6)을 ‘개인’indivíduo 7)에, 사건을 구조에, 상한 음식을 구조적 빈곤에, 신성한 국가國歌를 출처 불명의 삼바와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힘에, 카니발을 정치적 집회에, 남성을 여성에게, 그리고 심지어 한술 더 떠서 신을 악마에 그토록 잘 결합시킬 줄 아는 것이 바로 ‘대문자 브라질’이다.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앞으로 전개해 갈 글을 통해, 금기시되어 왔고, 이러저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 ‘소문자 브라질’, ‘대문자 브라질’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할 것이다.
이는 관계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주목하라. 브라질 사회 자체가 분리가 아닌 통합을 원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왜소한 브라질뿐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브라질 또한 원치 않는다! 우리는 두 개의 브라질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기 원한다. 각각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방식, 그리고 두 개의 브라질이 우리가 ‘조국’이라고 부르는 대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현실을 형성하는 방식을 밝히려 한다. 좀 더 정밀하고 사회학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먼저 ‘소문자 브라질’은 (개별적인) 인간의 가능성들에 주어진 것으로, ‘대문자 브라질’은 보편적인 가능성들의 특별한 조합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설명하기 힘든 구분이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중요하다. 그 관계야말로 보편적인 것들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특징적인 스타일, 존재 방식과 생존 방식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에세이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든 사회든 간에 모두 자신들의 스타일, 일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 만약 인간의 존재 조건 가운데 먹고, 자고, 일하고, 후손을 생산하고, 기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와 가정을 꾸리고 어떤 신에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개별적인 요소들이다. 이처럼 사전에 정해지지 않은 개별적 영역으로부터 차이들이 필연적으로 태동됐고, 그 차이 안에서 존재와 현존의 방식들, 그 각각의 ‘제이뚜’jeito 8)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별적인 인간 집단, 어떤 구체성을 띠는 집단만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조건을 갱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 외의 것들은 극장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버려진 소품들마냥, 마치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자신들을 선택하지 않은 우리를 원망한다.
여기에는 어떤 개별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깔린 보편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인문학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매혹적인 질문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전제된다. 그것은 언제나 정체성의 문제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체성을 파악하고 정당화하고 차별화하는 능력을 통해 다른 동물과 구분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정체성이므로, 타자들을 통해 자신을 아는 일은 철학적 탐구가 아닌 인류학적 탐구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숙제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안다. 내 이름은 주제 다 시우바José da Silva이고, 브라질 사람이고, 기혼남이고, 공무원이고, 플라멩코Flamengo 축구팀의 팬이며, 망게이라mangueira 삼바학교의 팀원이며, 물라따mulata 여성을 선호하고, 가톨릭 신자이면서 웅반다umbanda 9) 교도이고, 제법 축구를 잘하는 편이고, (사람은 신뢰하지 않지만) 운을 믿어서 상습적인 복권 구매자라는 사실을. 나는 주제이기에 나폴레옹이나 뉴욕 시민인 윌리엄 스미스나 소비에트연방의 애국자인 이바노비치가 될 수 없다. 나는 나를 이런 식으로 구별한다. 나를 일련의 속성에 강하게 연계시키고, 이 속성들을 이용해, 그리고 이 속성들을 통해 하나의 역사, 즉 나만의 역사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인간으로서 그리고 브라질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경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회적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브라질에서 민족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이런 질문은 삶 속에 가려진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 답은 바로 사람들과 사회에 부과된 경험들의 집합에서 나온다. 즉 인간이 먹고, 자고, 죽고, 후손을 보는 일 등과 같이 생존 자체에 필요한 것들이 있고, 우연적이고 표면적인 것들로서 브라질이 중국인이 아닌 포르투갈 인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브라질의 중남부 지역에 위치한 산맥들이 이러저러한 특성을 띠고 있다는 것과, 브라질 사람들은 다른 곳이 아닌 유럽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고 프랑스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19세기에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로 천도했다는 것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각각의 사회와 각각의 인간은 제한된 수의 ‘사물들’과 경험들을 활용해 유일하고 경이롭고 성스럽고 ‘합법적인’ 그 무엇을 구성할 뿐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가 미국인이 아니고 브라질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햄버거가 아닌 페이조아다feijoada 10)를 좋아하고, 다른 나라의 것들, 무엇보다 다른 관습과 사고에 대한 수용력이 낮고, 옷 입는 법이나 제스처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아주 기발한 감각을 가졌고, 뉴욕에 살지 않고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 살고, 영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로 말하고, 대중음악을 들을 때 그 리듬이 삼바samba인지 프레부frevo 11)인지를 단번에 구별할 줄 알고, 축구가 손이 아닌 발을 사용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변에 가는 이유가 꼭 수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과 얘기하고 여자들을 보고 일광욕을 즐기기 위해서이기 때문이고, 카니발 축제 때 나의 사회적・성적 판타지를 표현할 수 있고, 공식적인 상황에서 ‘아니요’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들이 제이칭뉴를 인간관계나 우정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고, ‘담벼락 위에 있다’[방관하다]em cima do muro라는 표현처럼 어떤 상황에서 입장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 전략이 우리(브라질)의 문화 안에서는 오히려 솔직하고, 현실적으로 필요하며 실용적인 처세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고, 가톨릭신자이면서 동시에 아프리카 오리샤Orixá 12)들도 믿고, 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운명을 믿으면서도 학문과 교육, 브라질의 미래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친구들에게 신의를 지키고 가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 친구들이 자기 스스로를 개인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나를 이 세상에 혼자이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브라질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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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원서 제목은 『무엇이 소문자 브라질, 대문자 브라질을 만드는가?』O que faz o brasil, Brasil?다.
2) 환경결정론이나 인종 결정론을 주장한 이론가들을 가리킨다.
3) 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 현실의 문제를 사적으로 해결하는 브라질식 편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품앗이처럼 서로 편의를 봐주는 방식으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부정부패로 연결된다.
4) 길에서 무위도식하면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것을 얻는 인물을 지칭한다. 정당한 노력이나 노동의 대가 없이, 혹은 불법적으로 이득이나 기회를 챙기려는 브라질 국민성의 부정적인 부분을 드러낼 때 사용한다. 제이칭뉴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과도하게 써먹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영어로 쓸 때 불량배나 사기꾼을 가리키는 ‘Rogue’로 번역했다.
5) 말란드루가 저지르는 행위들 일반을 가리킨다.
6) 저자가 특정 의도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용어다. ‘사람’peesoa은 개인적, 가족적, 정으로 빚어진 그물망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7) ‘사람’pessoa와 구분해서 사용. 공적이고 법적인 속성을 지닌 것으로, 극단적으로는 가족, 친우, 혈족 관계를 포함해서 온정적으로 형성된 관계망이 제거된 개념으로 사용. 집단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브라질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진다.
8) 제이칭뉴와 동의어다. 제이뚜가 일반형으로 좀 더 공식적으로 보이고 제이칭뉴는 제이뚜의 축소형으로 좀 더 친근하고 비공식적이면서 고유어로 사용하는 차이가 있다.
9) 웅반다는 앙골라 킴분두어에서 유래된 말로써 ‘마술’, ‘치료 예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에 발원한 흑인 노예의 종교가 모체이지만 가톨릭과 브라질 원주민의 심령주의가 함께 섞인 습합 종교의 총칭으로 불린다.
10) 식민 시대에 노예들이 주인이 버린 음식 찌꺼기(돼지 귀, 혀, 발)를 모아 검은 콩과 끓여 먹었던 것으로, 오늘날에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힌다.
11) 19세기 말에 브라질 북동부 헤시피Recife에서 태동된 카니발 리듬이자 음악이다.
12) 아프리카 요루바족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로 노예 시대를 통해 브라질에 유입되었다. 흑인 노예들이 이들을 가톨릭 성자들로 둔갑을 시켜 명맥을 유지해 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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