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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규범과 과대평가된 사료:
벨기에의 역사 교육
카트 윌스Kaat Wills
벨기에 University of Leuven 문화사 교수. De omweg van de wetenschap: het positivisme en de Belgische en Nederlandse intellectuele cultuur, 1845~1914(2005)의 저자
이 장에서는 19세기 초 이래 지금까지 벨기에 역사 교육에서 나타났던 학습 주제와 교육방법의 변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벨기에에서는 국가 표준이 존재했었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20세기에 다음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졌다. 첫째는 교육정책의 지역화였고, 두 번째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 과목의 세계화와 역사 교육의 민주화에 대한 점증하는 요구였다. 이런 변화와 밀접하게 필적했고 부분적으로 이런 변화에 도움을 주기도 했던 역사 교육의 “교수화didacticisation” 현상은, 결국 보다 현재 지향적인 형태의 역사 교육을 가져왔다. 그 속에서는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심적 요소가 되고 역사적 사료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초석으로 인정된다. 물론 이런 접근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료를 탐구하는 것은 역사 교육의 실제에서는 맥락화contextualization의 부족으로 인해 실패할 위험이 있다. 맥락과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역사 접근법에 의해 균형이 맞추어질 때 사료의 활용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역 역사, 국가 역사, 그리고 세계 역사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도전에 응함에 있어서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 그리고 보다 많은 유연성을 부여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사라진 역사 표준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 교육에 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예컨대, 오래되고 진부한 견해 중 하나는 학교 역사 교육은 국가 역사 속에서 영웅적 행위를 칭송하고 소수 엘리트의 정치사에서 나오는 “무미건조한dry”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역사 교육은 비판적 이해력, 민주적 태도, 그리고 다문화적 개방성의 훈련을 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태도와는 상반된다. 교육 개혁가라는 사람들도 학생들의 독립적인 생각은 최소한만 인정하는 순응주의conformism나 학문중심주의encyclopaedism에 경도된 일방적인 교육체제의 이미지를 생성해 내고 있다. 결국, 교실에서의 보다 자발적인 활동을 강조하는 운동을 영원히 절실하게 필요하고 혁신적인 운동으로만 남아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고착된 교육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역사 교육의 일반적 이미지 속에 내포된 두 가지 기본 구성요소를 역사적 관점에서 탐색할 것이다. 지난 2세기 동안 벨기에의 역사 교육이 어느 정도 국가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어 왔는가? 그리고 학생들은 지난 2세기 동안 전쟁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조약이나 왕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작성된 긴 명단을 그대로 외우는 수동적 태도를 어느 정도 강요받아 왔는지? 다른 말로 하자면, 새로운 형태의 역사 교육이 벨기에에서 어떤 발판이라도 마련했는지? 뒤의 두 질문을 받아서 나는 요즘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교육방법들이 취하고 있는 교육형태에 대해 많이 언급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현대적” 그리고 “우수한” 역사 교육의 토대라고 여겨지기도 하는 사료의 활용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문맥 속에서 역사를 생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과거의 규범canon
역사 교육에 대한 국가주의적 경향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오늘날 역사 교육은 아주 강하게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혹은 준국가주의적sub-nationally 관점에서 정의된다. 미국 학생들에게는 미국혁명이 역사 교육의 출발점인데, 이것은 프랑스 학생들에게 프랑스혁명이 출발점인 것과 같다. 스페인 학생들이나 멕시코 학생들에게 1492년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역사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되지만, 두 나라에서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영국에는 네 가지 아주 다른 역사 교육과정이 존재한다.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즈가 그것인데 이 네 가지 역사 교육과정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국가 속의 국가인 각 지역에 도움이 되는 역사를 가르친다. 미국에서의 기초교육은 자유와 진보를 성취한 국가의 이야기를 강하게 지지하는 대표적 사례이고, 북아일랜드에서의 역사 교육은 상대적으로 국가에 대해 초점을 덜 맞추는 사례가 된다. 다양성이나 갈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선택해서 다루느냐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Carretero, Jacott & López Manjón 2002; Barton 2001; Phillips, Goalen, McCully & Woods 1999).
국가 혹은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것은 국민국가nation-state만큼이나 오래되었는데 대체로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보아 이런 해석은 합당하다. 최근 역사학자 지니 보브아-카우체핀Jeannie Bauvois-Cauchepin은 19세기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 교육이 “국가주의화”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비교분석했다. 비교법을 활용한 이러한 엄밀한 분석은 이런 국가 지향성이 각 나라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이런 경향이 19세기의 불변의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는 독일제국 시대 이전에도, 강력한 프러시아 중심의 탁월하고 신화적인 국가 역사가 예견되고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역사 교육의 국가주의화가 1870년의 패전 후에나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이후 곧 이런 경향의 절정을 경험했다. 반면 독일은 crispation identitaire, 즉 직역하면 “정체성 경련”이 바이마르공화국 동안의 일정한 비판을 거친 후인 1930년대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독일의 역사 교육이 지역적 의미의 고향(독일어의 Heimat, 혹은 영어의 homeland)이란 느낌에 의해 조성된 감정적이고 보다 반동적인 국가주의의 영향을 받은 반면, 프랑스의 역사 교육에서는 지역적 감정은 지워 버리고 보편적인 공화국 이념으로 대체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오랫동안 정치적 불만세력에게 힘을 주어 왔던 프랑스혁명이 사회 진보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국가의 명확한 기준 시점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학생들에게 시민정신을 배양하기를 원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로마 가톨릭 교과서가 널리 이런 방식의 사고를 또한 촉진했다. 그런 1960년대 이후 세계대전이 프랑스혁명을 역사의 독점적 기준점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프랑스의 저항주의résistantialisme가 새로운 이념이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적지 않게 문제가 되었던 비시 임시정부Vichy(독일 지배 기간 동안의 임시정부가 있던 중부 도시 이름. 임시정부 시기와 임시정부 자체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됨-옮긴이)와 탈식민지운동에 대한 기억이 주는 부정적 의미를 조금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었다. 달리 말하면, 독일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과거의 역사 교육체제를 완전히 폐기하고 시민교육이라는 이념을 조심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던 것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더 늦게 이런 국가 신화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Bauvois-Cauchepin 2002).
벨기에에서도 19세기의 역사 교육은 그 성격이 국가의 과거 역사를 “정전화canonization”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초등교육에서 역사 교육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벨기에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중등 교육과정은 역사 과목이,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제도나 법령에 대한 복종심을 만들어 냄으로써 조국에 대한 사랑에 기여를 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역사 과목이 살아남은 것은 일반교육이 추구한 시민 인문학civil humanities이라는 이상 덕분이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역사 교육에 하나의 긴장이 조성되었다. 그것은 역사를 고대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고전적 인문학과, 역사가 좀 더 자율성을 지닌 상태에서 중세와 그 이후 역사를 함께 다루기를 주장하는 좀 더 현대화된 역사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이었다. 19세기 말 경에 이르러, 두 번째 경향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고, 이는 국가 역사에 좀 더 많은 기회를 주게 되었다(Van Eekert 2007). 이는 남자 아이들을 위한 기술 교육에서 역사 과목이 차지해 온 지위를 보면 명백하다. 2차 세계대전까지 남자 아이들을 위한 기술 교육에서 역사는 정규 교과목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반사회주의적 해석이 지배적이었던 정치경제학은 개설이 유용한 과목으로 여겨졌다. 여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서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직업 교육이 실제로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형식의 교육이었고, 또한 중·상위계급 여아들을 위한 일종의 보편 교육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 과목이 학습되었다(D’hoker & Henkens 2002).
일반교육의 역사 과목 속에서 국가사가 차지하는 실제적 중요성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1880년대까지 공립학교(중앙정부가 설립한 “rijksonderwijs”)에서는 6년 과정 중 오직 1년만 벨기에의 역사를 공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4학년 이후 학교를 그만두기 때문에 중등 교육과정에서는 벨기에 역사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Van Eekert 2007). “무상으로 운영하는”, 그리고 공립학교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입학하는 로마 가톨릭 학교에서는 6년 과정 중에서 벨기에 역사가 1년 이상을 차지하지 않았다. 나머지 기간에는 보다 “일반적인” 혹은 “보편적인” 역사를 가르쳤다. 역사는 주로 유럽에 초점을 맞추었고, 서양 문명의 요람이자 하나의 도덕적 모범으로서 고대사에 집중했다. 따라서 고전시대인 그리스와 로마의 과거를 배우고 뛰어넘어야 할 위대하고 도덕적인 인물의 사례를 집대성해서 보여주는 “표준exampla”의 형태로 제시되었다(네덜란드와 관련해서는 Toebes(2001)을 참고). 최근의 세계 역사와 관련해서는 다른 지역의 “정전화된” 역사가 외국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비스마르크와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벨기에에서도 거의 지성적이고,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19세기에 중등교육뿐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가르쳐진 벨기에 역사는 몇 가지 고정된 성격이 있었다. “목적 원인론finalism”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몇몇 사람들은 벨기에의 독립은 이미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벨기에적 특성이 실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저와 타키투스가 기술한 “벨기에 사람들Belgians”은 현대 벨기에 국민의 조상이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다. 1830년에 세워진 벨기에라는 나라는 아직 젊은 나라이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된 조국을 현실에 구현한 것이었다. 조국의 진화 이야기는 성격상 주로 군사적이고 정치적이었다. 연대기적으로 구분된 장들은 교훈과 관습, 예술, 과학, 상업, 그리고 산업에 관한 간단한 글들로 마무리됐다. 1860년대부터는 교과서의 열거식 성격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벨기에인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좀 더 낭만적인 이야기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벨기에의 원시시대protohistory 또한 이제는 ─국민들이 인정하는 정당한 권력을 행사한 왕들이 아닌─ 적대적인, “외국” 지도자들의 역사가 되었다. 이 시점 이후로부터 벨기에의 역사는 연속적으로 이어진 왕정으로 짜였고, 왕들의 성격이 벨기에 역사에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De Schryver 2002: Hoebanx 1982).
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조국과 그 제도들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역사 교육의 중요한 목표였지만, 특히 중등교육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왕조가 더 이상 벨기에 역사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아니며, 왕들의 역할 또한 몰개성화, 정치화되었다. 학술계의 제안에 부응하고 여학생들의 관심을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들이 경제와 사회의 발전, 문화와 종교 등을 의미하는 “문명의 역사”로 대체되었다(Van Eekert 2007).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제기된 국가주의 그리고 과도한 국가중심의 역사 교육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이 벨기에에서도 반응을 얻었다. 지식인협력국제위원회commission internationale de coopération intellectuelle가 1926년 작성한 지침은 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는데 이 지침은 국가 간에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교과서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애국주의가 중요한 하나의 목표로 남아 있었고 벨기에의 모든 학교가 전쟁 중에 사망한 영웅적인 학생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정부는 지나치게 맹목적인 애국주의의 위험성 또한 지적했다. 그 결과는 벨기에 역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유럽 역사에 통합되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독일 점령군은 프랑스 교과서의 수입을 금지하고 벨기에 교과서에서 반독일적이라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제거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들의 관심은 대체로 20세기에 국제적으로 독일이 수행한 역할, 그리고 미약하지만 독일의 침략 시기에 그쳤다. 대체로 점령자들은 역사 교육에 비교적 작은 영향을 미치는 데 그쳤다.
언뜻 보기에 2차 세계대전이 벨기에의 교육정책에 미친 영향은 애국적 정신을 조금 수정한 것이었다. 벨기에의 교육제도가 공공의 책임감을 강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쟁 직후에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의 독일 점령군과의 영합, 그리고 보다 폭넓게 진행된 도덕적인 붕괴는 이런 교육의 불가피한 결과로 인식되었다. 이후의 교육부 장관들은 전통적 역사 교육정책commemorative policy(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기념하는 방식의 역사 교육정책-옮긴이)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공민교육을 역사 교육에 통합하는 정책도 제안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향의 정책은 전통적이고, 낭만적이며 감성적인 요소와 계몽적이고 이성적인 특성을 놀라울 정도로 조합해 보여주었다. 따라서 전통적 역사 교육정책은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의 국가적 영웅들을 기념하는 동시에 루이 파스퇴르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같은 국제적 인물들도 기억하는 것, 즉 국제적이고 민주적인 이상을 지지하는 것을 함께 목표로 내세웠다. 1949년의 새로운 학교 교육과정은 이와 유사하게 애국주의와 공민의 책임을 목표로 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역사를 일반 역사 속에 통합하고 좀 더 비판적인 정신을 함양할 것을 요구했다(Beyen 2002).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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