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밤길을 걷는 아이
1장
밤은 산책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여름이면 나는 이른 아침에 외출해서 온종일 들판과 시골 길을 거닐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집을 떠나 있기도 한다. 하지만 시골에 머물 때를 제외하면 어두워지기 전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늘에 감사할 일이지만, 나는 도심의 불빛과 거리에 쏟아지는 그 빛의 경쾌함을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한다.
건강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성격과 직업을 마음껏 추측할 수 있어서 밤 산책은 어느새 내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대낮의 눈부심과 분주함은 나처럼 빈둥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햇빛에 훤히 드러나는 얼굴보다는 가로등이나 상점 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행인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는 편이 내 목적에 알맞다. 그리고 솔직히 상상의 세계가 완성되려는 순간에 여지없이 그것을 무너뜨려버리는 낮보다는 밤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그런데 그 끊임없는 서성거림과 끝없는 들썩임, 울퉁불퉁한 돌길이 반질거릴 정도로 줄기차게 이어지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좁은 길가에 사는 이들은 어떻게 견디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 발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는 성 마틴 거리의 환자를 생각해 보라. 아이에서 어른, 싸구려 낡은 신발에서 값비싼 부츠, 어슬렁거리는 사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 뒤꿈치를 질질 끄는 부랑자에서 즐거움을 찾아 조급하게 걷는 행락객까지 온갖 발소리를 들으며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인 것처럼) 고통과 피곤에 몸부림쳐야 하는 그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항상 귓전을 울려대는 윙윙거리는 소리와 마치 수세기 동안 편안히 쉴 수 있을 거란 꿈은 포기하고, 숨통은 끊어졌지만 의식은 살아 있는 채로, 시끄러운 교회 묘지에 묻힌 사람처럼 불안한 꿈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활 소음을 들어야하는 그를 생각해 보라.
그런가 하면 (통행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다리 위에도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오간다. 날씨가 좋은 저녁이면 그곳에 멈춰 선 많은 사람은 강물이 둑 사이를 지나 점점 넓어지는 물길을 따라가다 마침내 광활한 바다와 만나는 장면을 막연히 상상하며 하염없이 강물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무거운 현실의 짐을 잠시 내려놓기 위해 멈춰 선 누군가는 다리 난간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유유히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바지선의 햇살로 달궈진 방수포에 드러누워 빈둥거리며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와 전혀 다른 부류의 누군가는 자신이 지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익사가 자살 방법 중에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고통스럽지 않다고 전에 어디선가 들었거나 읽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동틀 무렵의 코벤트 가든 마켓 역시 마찬가지다. 봄이나 여름이면 간밤의 방탕한 기운도 제압할 만큼 달콤한 꽃향기가 시장 전체에 감돌고, 밤새 다락방 창가의 새장 속에 갇혔던 개똥지빠귀도 요란하게 지저귄다. 가여운 새 같으니라고! 그들 중 몇몇이 술 취한 구매자들의 뜨거운 손길에 몸을 움츠리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동안, 나머지는 좀 더 맑은 정신의 손님을 기다리며 목을 축이고 몸단장을 하느라 분주하다. 일터로 향하는 나이 든 사무원들은 과연 자신들의 가슴을 시골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채워 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 옆을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내 산책 이야기나 자세히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들려주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어느 산책하던 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어느 날 밤, 평소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도시를 천천히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길을 묻는 듯한 여리고 상냥한 목소리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췄다. 급히 돌아선 나는 내 팔꿈치 높이에 오는 작은 계집아이를 볼 수 있었다. 소녀는 그곳에서 상당히 멀기도 하거니와 완전히 다른 구역으로 가는 길을 내게 물었다.
“그곳은 여기에서 꽤 먼데, 꼬마야.” 내가 말했다.
“알아요.”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밤 그곳에서 왔거든요.”
“너 혼자서?” 내가 적잖이 놀라며 물었다.
“네, 혼자 다니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지금은 길을 잃어서 좀 무서워요.”
“어떻게 내게 길을 물을 생각을 했지? 길을 잘못 가르쳐 주면 어쩌려고.”
“그럴 리 없어요.” 소녀가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신사잖아요. 그래서 느릿느릿 걷는 거고요.”
나를 올려다보던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녀린 몸을 가볍게 떨었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운에 이끌렸다.
“이리 오렴. 할아버지가 데려다 주마.”
소녀는 태어날 때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손을 덥석 잡았고, 우리는 함께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아이가 내 보폭에 맞춰 걸었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보호한다기보다 아이가 나를 보살피며 걷는 형색이었다. 소녀는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간간이 내 얼굴을 힐끔힐끔 엿보았고(매우 날카롭고 예리한 눈매였다), 그럴수록 자기 생각을 확신하는 듯했다.
호기심과 관심이 생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짐작이긴 하지만 작고 여린 체격에 앳되어 보이는 얼굴은 분명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또한 차림새는 옹색했지만 말쑥한 것이 가난하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 같지도 않았다.
“누가 너를 이렇게 먼 곳까지 보낸 거냐?” 내가 물었다.
“아주 좋으신 분이요.”
“그러면 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소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뜻밖의 대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심부름이기에 이렇게 준비된 대답을 하는 것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분명 나쁜 일은 아니며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일이라고만 덧붙였다.
무엇을 숨기거나 교활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소녀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고,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동안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소녀는 이 길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냐는 질문 말고는 집에 대해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소녀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길을 걷는 동안 수백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지만, 딱히 아이의 심부름에 대한 그럴듯한 추측은 나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저 호기심이나 채우려고 지나친 호의를 베풀며 아이에게 접근한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사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갓 내려온 천사와도 같은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소녀가 첫눈에 나를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어 준 것이 기뻤고, 나는 소녀를 자극했던 내 안의 그 본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늦은 시간에 그 먼 길을, 그것도 아이 혼자 심부름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집 근처에서 작별을 고하면 그 인정머리 없는 작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피해 좁은 골목길로 소녀를 이끌었고, 드디어 소녀에게 낯익은 길이 나타났다. 기쁨에 겨워 손뼉을 치며 앞서 달려가던 소녀가 어느 집 앞에 멈춰 서서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집 앞에 이르자 소녀가 돌층계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모든 것이 어두컴컴하고 쥐 죽은 듯 고요해서 처음에는 문 한쪽에 유리문이 달린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 소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아무도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건 아닐까 걱정됐다. 소녀가 두세 차례 문을 더 두드리자 인기척과 함께 유리문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여기저기 널린 잡동사니들을 헤치며 나오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그것으로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긴 회색 머리카락을 한 가냘픈 노인의 얼굴이 그가 든 촛불 아래로 점차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가 들어서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위고 홀쭉한 모습은 분명 가녀린 소녀와 닮아 있었다. 특히 노인의 눈은 소녀의 눈과 같은 푸른빛이었는데, 주름이 깊게 팬 그의 얼굴에 가득한 수심으로 모든 유사함은 여기서 끝이 났다.
오래되고 진기한 물건들이 가득한 그곳은, 마치 불신과 질투 어린 시선으로부터 그들의 케케묵은 보물을 지키기 위해 도시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점 안에는 유령을 연상케 하는 갑옷 입은 기사와 수도원에나 있음직한 기이한 조각품, 녹슬어서 쓸모없어진 각종 무기,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자기나 목재, 철, 상아 따위로 만든 인형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와 기괴하게 세공된 가구는 현실이 아닌 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것들이었다. 작고 초라한 노인은 놀랍도록 그 장소와 잘 어울렸고, 오래된 교회나 무덤 혹은 허물어진 가옥에서 그가 직접 땅을 파헤쳐 이 허접스러운 골동품들을 끌어모았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노인만큼 상점에 어울리는 물건은 없었고, 어떤 것도 그보다 낡거나 오래돼 보이지 않았다.
자물쇠를 풀며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노인이 내 옆의 소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문이 열리자 소녀는 노인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내가 그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이런 세상에!” 노인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쩌다 길을 잃은 거냐? 넬, 너를 잃기라도 하는 날엔…….”
“제가 할아버지를 찾아낼 거예요.” 소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소녀에게 입을 맞춘 노인이 나를 상점 안으로 안내했다. 상점 문이 닫히고 잠겼다. 그가 촛대를 들고 앞장서며 방금 유리문으로 보았던 장소를 가로질러 상점 안쪽의 작은 거실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서 나는 작은 방으로 이어지는 열린 문을 통해 천사가 잠들 것 같은 아주 작고 깔끔하게 정돈된 아담한 침대를 보았다. 소녀가 촛대를 들고 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서 거실에는 나와 노인 단둘이 남게 되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노인이 난롯불 가까이 의자를 끌어다 놓으며 말했다.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손녀를 잘 좀 보살피셔야겠습니다, 영감님.” 내가 대답했다.
“잘 보살피라고요?” 노인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넬리를 잘 보살피라니요. 오, 세상에 저만큼 넬을 아끼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나는 노인의 과민한 반응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왠지 자신이 없는 데다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 노인의 태도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가 노망이 들었거나 정신이 이상한 노인네는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노인의 얼굴에서 손녀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져 그 생각은 접어 두었다.
“그게 영감님이 아이를 그다지…….”
“아끼지 않는다고요!”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인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제가 아이를 위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오, 정말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어린 넬리를! 착한 넬리를!”
어떤 표현으로도 노인의 이 말보다 더 깊은 애정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은 없으리라.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턱을 괸 노인은 난롯불을 바라보며 가볍게 머리만 흔들었다.
우리가 말없이 앉아 있는 동안 소녀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급히 옷을 갈아입었는지 얼굴은 상기되었고,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목덜미까지 부스스하게 내려와 있었다. 소녀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내가 아이를 지켜보는 사이 노인이 나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모든 집안일을 혼자 도맡아 하는 것 같았다. 소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노인에게 집안일을 돕는 다른 사람은 없는지 넌지시 물어봤지만, 넬만큼 착실하고 꼼꼼한 아이도 없다는 대답이 그에게서 돌아왔다.
“이런 일이 항상 저를 슬프게 하죠.” 노인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내가 갑자기 흥분하며 말했다. “어린아이를 벌써부터 혹독한 현실로 내모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믿음과 순수함―하늘이 준 최고의 선물―을 빼앗고, 세상의 기쁨을 알기도 전에 어른들 세상의 슬픔을 먼저 경험하도록 강요하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이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행복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얘깁니다. 더구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즐거움을 찾기조차 힘들죠. 어린 시절에 소박하게 기쁨을 누리고 싶어도 돈이 들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절 용서하십시오, 영감님은 그다지 가난해 보이지 않는데요.” 내가 말했다.
“넬은 제 아이가 아닙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저 아이의 어미는 무척 가난하게 살다 먼저 세상을 떠났죠. 저 역시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할 뿐 모아둔 돈도 없습니다.” 노인이 내 손을 부여잡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넬은 조만간 큰 부자가 돼서 훌륭한 귀부인으로 살아갈 겁니다. 넬에게 집안일을 시킨다고 욕하지 마세요. 보시다시피 넬은 아주 즐겁게 일합니다. 만약 넬의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긴다면 그 애가 서운해할 거예요. 그런데 제가 넬을 위하지 않는다고요!” 노인이 화를 내며 말했다. “정말이지 신만이 아실 겁니다. 저 아이가 제 인생의 희망이자 삶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신마저도 저를 외면하셨죠. 오!”
소녀가 다시 거실로 다가오자 노인은 탁자 가까이로 나를 부르던 손을 내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막 식사를 하려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를 듣고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여느 아이처럼 기쁨에 찬 그 웃음소리에 나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틀림없이 다정한 키트일 거라고 말했다.
“착한 넬!” 노인이 소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넬은 항상 불쌍한 키트에게 웃어 주죠.”
다시 한 번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노인이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촛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키트가 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키트는 지나치게 큰 입과 유난히 붉은 뺨, 들창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한 굼떠 보이는 아이였고,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낯선 방문자를 보고 멈칫하던 그가 쓰고 있던 낡은 모자를 벗어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더니, 발을 바꿔가며 한쪽 발로 문 앞에 서서 거실 안을 힐끔거렸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소녀의 삶에서 희극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길이 멀었지, 키트?” 노인이 물었다.
“그러니까, 꽤 멀던데요.” 키트가 대답했다.
“집은 쉽게 찾은 거냐?”
“그러니까, 찾느라 애먹었어요.”
“배고프겠구나.”
“그러니까, 배고파 죽을 지경이에요.”
키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라도 한다는 듯 말을 하면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어디에서나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 줄 아는 키트의 괴짜 같은 행동은 소녀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 줬고, 나는 아이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도 조금이나마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모두에게 감동을 준 것에 우쭐해진 키트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큰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한바탕 웃는 모습 또한 인상 깊었다.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노인이 주변 일에 무관심한 반면, 소녀는 길을 잃었을 때의 두려움을 말끔히 잊고 키트의 장난기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으며 즐거워했다. (별것 아닌 걸로도 남을 웃게 하는 재주를 가진) 키트는 커다란 빵 한 조각과 고기와 맥주 한 잔을 들고 구석으로 가서 엄청난 식욕을 보이며 그것들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아!” 노인이 때마침 뭔가 생각난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넬을 잘 보살피지 않는다는 건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몰라서 드린 말씀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내가 말했다.
“그럴 수가 없군요.” 노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넬, 이리 오너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가 노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넬, 할아버지가 널 사랑한다는 걸 아느냐?” 노인이 물었다. “어서 말해 보거라. 내가 너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소녀는 대답 대신 노인을 꼭 껴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얘야, 우는 거냐?” 노인이 소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는 거냐, 아니면 할아버지가 너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냐? 그래. 할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네, 알아요.” 소녀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건 키트도 잘 아는 걸요.”
이야기에 무관심해 보이던 키트가 고기와 빵을 한입 가득 넣고 우적우적 씹더니 별안간 크게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넬을 사랑한다는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커다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지금은 가난하지만…….” 노인이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부자가 될 거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 그렇게 될 거야. 암, 그렇고말고. 낭비하며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나 오는 줄 알았는데, 이제 내게도 때가 오고 있단다.”
“가난해도 전 행복해요, 할아버지.” 소녀가 말했다.
“쯧쯧쯧, 넌 가난이 뭔지 모른다.” 노인이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혼자 중얼거렸다. “때가 올 거야. 암, 오고말고. 늦으면 늦을수록 더 좋은 법이지.”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소녀가 그의 무릎에 엎드려 있었지만 노인은 아이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자정이 조금 안 돼서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일어설 채비를 했다.
“잠깐만요.” 노인이 말했다. “키트, 열두 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 안 간 거냐! 어서 집에 가거라. 일이 많으니 내일 아침엔 늦지 않도록 하고. 조심해서 가거라! 손님께도 인사를 드려야지. 넬, 키트가 나가게 문을 열어 줘라.”
“잘 가, 키트.” 소녀가 다정한 눈길로 키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자, 넬.” 키트도 작별 인사를 했다.
“손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지.” 노인이 끼어들었다. “이분이 아니었으면 넬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지.” 키트가 말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그게 무슨 말이냐?” 노인이 외쳤다.
“제가 넬을 찾아낼 테니까요.” 키트가 대답했다. “넬이 살아 있는 한 제가 반드시 찾아낼 거예요. 누구보다 먼저 찾고 말 거예요. 하하하!”
다시 한 번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감으며 스텐터처럼 호탕하게 웃어 재낀 키트가 조금씩 문 쪽으로 물러나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들어올 때와 달리 재빠르게 상점을 빠져나갔다. 키트가 나간 뒤 소녀는 그가 앉았던 탁자를 정리했다.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넬도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저보다 더 고마워할 거예요. 이제 가셔야겠군요. 제가 넬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으니까요.” 노인이 말했다.
나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런데 뭘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덧붙여 말했다.
“그러시죠.” 노인이 흔쾌히 대답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이렇게 귀엽고 영리한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영감님 말고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먼 친척이나 후원자도 없나요?”
“없습니다.” 노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없어요. 그리고 넬은 저 말고 다른 사람은 원치 않습니다.”
“영감님께서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아이도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요? 저 역시 늙은이인지라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밤, 영감님과 손녀의 모습을 본 제가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사 양반.” 잠시 침묵하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보셨겠지만 제가 여러모로 손녀에게 보살핌을 받는 형편입니다. 그래도 자나 깨나 밤낮으로, 아플 때조차도, 오로지 넬만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끔찍이 이 아이를 아끼는지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못 하실 겁니다. 암요. 모든 게 이 늙은이의 궁핍한 삶 때문이죠. 정말 비참한 삶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한 몸 희생해서라도 이루어야 할 큰 목표가 있습니다.”
노인이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나는 벗어놓은 외투를 입고 나설 채비를 했다. 그런데 소녀가 팔에다 외투를 걸치고 모자와 지팡이를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란다, 얘야.” 내가 말했다.
“네, 저희 할아버지 외투예요.” 소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가시지 않는단다.”
“할아버지는 나가실 거예요.”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는?”
“저요? 저는 집에 있어요. 늘 그러는 걸요.”
놀란 내가 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노인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열심히 외투 단추만 채웠다. 나는 다시 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혼자!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이 긴 밤을!
소녀는 내가 놀라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듯 태연하게 외투 입는 노인을 돕고 문 앞까지 우리를 배웅했다. 노인과 내 걸음이 늦어지는 것을 본 소녀가 뒤돌아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기다렸다. 노인은 내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눈치채고도 모른 척 조용히 앞장서 걸었고, 석연치 않았던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상점 안쪽에서 촛대를 내려놓은 소녀가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했다. 노인도 소녀를 안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자라, 넬.” 노인이 나직이 말했다. “천사가 항상 네 곁을 지킬 거야. 기도하는 것 잊지 말고, 아가야.”
“걱정하지 마세요.” 소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천사들이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아요.”
“그래. 천사들이 네 곁에 있단다. 암, 그렇지.” 노인이 말했다. “천사들이 널 축복할 거야.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오마.”
“초인종 누르시면 바로 문 열어 드릴게요.” 넬이 대답했다. “자고 있어도 초인종 소리는 잘 듣거든요.”
소녀는 상점 문(키트가 상점을 나가면서 닫았던 덧문)을 열고 다시 한 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안에서 문이 잠기는 것을 확인한 노인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노인은 길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로 갈 길이 다르다며 인사를 건네더니, 내게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는 내가 자신을 쳐다보지는 않는지, 행여나 뒤쫓아 오지는 않는지 확인하려는 듯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 곧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나는 노인이 떠난 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는데, 아직도 내가 왜 거기에서 서성거렸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아쉬운 맘에 방금 떠나온 거리를 바라보던 나는 다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점 앞을 서성이던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문가에 귀를 바짝 대어보았다. 상점 안은 무덤처럼 고요하고 캄캄하기만 했다.
나는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피해―화재나 강도 혹은 살인자―에 대한 생각과 그곳을 떠나는 즉시 악마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차마 그곳에서 발길을 떼지 못하고 주위를 서성거렸다. 나는 거리 어딘가에서 창문이나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상점 앞으로 달려갔고, 혹시 무슨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길 건너편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상점은 여전히 어둡고, 차갑고,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인적이 드문 거리도 내 마음처럼 울적했다. 극장에서 나와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가는 몇몇 사람들과 가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때문에 옆으로 비켜서야 했지만 곧 그런 발길마저 뜸해졌다. 새벽 한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매번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앞을 서성이며 앞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기대를 안고 부질없는 짓을 했다.
나는 노인이 했던 말과 그의 표정과 태도를 떠올릴수록 내가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 가늠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나는 그가 밤마다 집을 비우는 것이 분명 좋지 않은 일과 관련 있을 거란 강한 의혹을 품었다. 아이의 순진무구함과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도 어떤 설명조차 하지 않은 노인을 통해 나는 그 의혹을 확신했다. 노인의 초췌한 얼굴과 종잡을 수 없는 태도와 초조한 기색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며 노인에 대한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이를 아끼는 마음과 어떤 악행이 서로 연관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깊은 밤 홀로 집에 남겨둘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노인이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다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그의 사랑만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와 나눴던 말과 그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릴수록 그가 좋지 않은 일과 연관됐을 거란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집에 있어요. 늘 그러는 걸요.’라고 말하던 아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늦은 밤, 그것도 매일 노인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대도시에서 벌어진 끔찍하고 비밀스러운 범죄란 범죄는 모조리 생각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상당수가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노인의 경우에 적용할 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 수수께끼는 풀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두 시간 동안이나 이런 생각에 잠겨 그 거리를 서성거렸다. 한참 후에 강한 빗줄기가 떨어지면서 처음에 일었던 강렬한 호기심도 피로를 이기지 못해 결국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방 한가운데서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과 환하게 밝혀진 등불과 오래되어 친숙한 벽시계가 나를 반겼다. 모든 것이 방금 보고 온 음침한 뒷골목과는 너무도 다르게 아늑하고 따뜻했다.
나는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침대에 누워 있을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지켜보는 사람도 어떤 보살핌도 없이 혼자(천사 외에는)였지만 아이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한없이 어리고, 지극히 영적이며, 그토록 가냘프고 요정 같은 생명이 그런 편치 않은 곳에서 길고 지루한 밤을 보내야 한다니. 나는 이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외부 물질에 의해 형성된 인상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회상으로 표출되지만 보이지 않게 자주 우리에게서 벗어난다. 골동품 상점에 움츠리고 있던 환상적인 물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이 하나의 주제에 완전히 빠져들었을 것이다.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골동품들이 서서히 아이를 둘러싸더니 또렷이 아이의 상태를 내 앞으로 데려왔다. 나는 상상의 어려움 없이 모든 것에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 이미지는 아이의 본성과도 이질적인 것이었고, 아이의 성별과 나이로부터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부족한 나의 상상에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혹은 보통의 방에 누워 있는 아이를 상상했다면, 나는 아이의 낯설고 외로운 처지에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우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는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들었다.
“저세상에서 거칠고 기괴한 무리에 둘러싸인,” 쉬지 않고 방 안을 떠돈 후 내가 말했다. “외로운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특이한 추측이 될 거야. 단지 순수하고, 생기 넘치는, 무리 속의 젊은 대상을. 그것은 특이할…….”
나는 정신없이 나를 이끌던 이 주제에 대해 잠시 살펴보다 이미 내가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조금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인정한 나는 쓸데없는 사색이었다고 자책하며 잠자리에 들었고, 그 일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러나 그날 밤 내내, 깨어있거나 잠을 자면서도, 같은 생각이 반복되고 같은 이미지가 지속되며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낡고 어두침침한 방들―유령처럼 서 있던 갑옷 입은 기사, 나무나 돌로 만들어져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들, 먼지와 녹 그리고 나무를 기어 다니던 벌레들―과 온갖 잡동사니와 부패, 그리고 추한 시대의 한가운데 홀로 잠든 아름다운 아이가 달콤한 꿈을 꾸며 미소 짓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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