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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해 절제하라?
엄숙한 종교 원칙에 따라?
우리는 다시 행복의 문제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히슬로다에우스는 아주 긴 지면을 할애하여 행복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어떤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 이상적인 사회인지가 이 문제에 달려 있으므로, 이 부분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행복이 자기들 삶의 목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덕과 쾌락을 논하지만,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의 행복이며, 행복이 한 가지로 이루어졌는지 여러 가지로 이루어졌는지를 따집니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이 거의 대부분 쾌락으로 이루어진다는 견해에 다소 과도하게 경도된 듯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진지하고 엄격하다 못해 가혹하고 엄숙한 종교를 통해 이 쾌락주의적 철학을 옹호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행복을 논할 때는 그들의 철학적 합리주의에 반드시 종교원칙을 결부시킵니다. 이러한 종교 원칙 없이는 철학은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때 미약하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95~96)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행복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데, 행복은 쾌락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쾌락을 추구해야겠네요.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유토피아 사회는 전반적으로 공동체 전체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눌러야 하는, 꽤나 금욕적인 곳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나라가 추구하는 최고 가치인 행복의 요체가 쾌락이라고 하면 뭔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말하는 쾌락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행복과 연결되는지 생각해 봐야겠지요.
위에서 말한 내용 중에 아이러니한 점이 또 있습니다. 진지하고 엄격하다 못해 ‘가혹하고 엄숙한 종교’를 통해 쾌락주의적 철학을 옹호한다고 합니다. 추구하는 것은 쾌락인데, 이를 아주 가혹하게 종교적으로 옹호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토머스 모어가 우리를 또다시 기묘한 논리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요? 한번 그 논리를 따라가 봅시다.
먼저 이 나라 종교 원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종교 원칙은 이런 것들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며, 신의 선함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행복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사후에 덕과 선한 행위에 대해서는 보상받고 죄에 대해서는 벌을 받는다. 이것들은 분명 종교적 믿음에 속하는 내용이지만 그들 생각에는 인간의 이성이 자연스럽게 이것들을 믿고 수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96)
이 나라 종교가 기독교는 아니지만, 당연히 기독교와 비슷한 종교라고 설정했겠지요. 그러니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사후에 보상 또는 처벌로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쯤에서 모어가 앞으로 어떤 논리를 펼칠지 한번 짐작해 보겠습니까? 지금까지 그의 논리 전개를 보아 온 터라 조금 익숙해 있을 테니까요.
뭐, 이런 식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쾌락을 추구하겠지만, 그 쾌락을 종교적 대의에 맞는 방향으로 추구해야지 마구잡이로 허튼 쾌락을 추구하면 오히려 불행에 빠진다고요. 혹시 이렇게 예상했다면 여러분은 저자의 논리가 어떤 식의 결을 따라 흘러가는지 벌써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덧없는 쾌락을 피하고, 덕을 실천하기
모어의 논리는 앞서 설명한 그 방식대로 이루어지는데, 조금 더 자세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쾌락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종류이며, 크고 중요한 쾌락과 작고 하찮은 쾌락이 있다고 나눈 다음 작은 쾌락이 큰 쾌락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폅니다. 물론 큰 쾌락의 추구는 종교적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겠고요.
“작은 쾌락이 큰 쾌락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고통이 뒤따르는 쾌락을 피한다는 것만이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종교적 원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광기에 빠져서 엄혹하고 고통스러운 덕만 추구하고, 생명의 쾌락을 포기하며, 아무런 유익함이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사후의 보상이 없다면 사람은 쾌락이 없는 생애, 즉 비참하게 그의 전 존재를 보낸 것에 대해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이 없게 됩니다.”(96)
그리고 이런 원칙도 밝힙니다.
“유토피아인들은 행복이 모든 종류의 쾌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정직한 쾌락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믿습니다. 그들 말에 따르면 덕 자체가 우리의 본성을 그런 종류의 쾌락으로, 즉 지극한 선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96)
그러니까 결국 이들이 말하는 쾌락은 우리가 그 말을 할 때 떠올리게 되는 향락 따위가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선하고 정직한 쾌락’은 지적인 덕이며, 곧 종교적인 원칙에 부합하는 종류의 쾌락입니다. 결국은 덕을 실천하고 따르는 종류의 쾌락이 행복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덕은 또 무엇입니까?
“유토피아인들은 덕이란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신은 우리를 그런 목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어떤 것을 선택하고 다른 것을 거부할 때 그는 자연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성의 첫 번째 법칙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인간의 모든 행복을 가능케 한 신을 사랑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두 번째 법칙은 가능한 한 번민으로부터 자유롭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것이며,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그 목적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97)
신을 사랑하는 것, 덕성스럽게 사는 것,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남도 그런 삶을 살게끔 인도하는 것! 이런 것이 행복이며,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삶을 살고자 한다고 믿습니다. 행복도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이 우선이지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즐거운 삶, 다시 말해서 쾌락을 우리 행위의 목표로 지정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사는 것을 덕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서로의 삶을 유쾌하게 만들라고 명령한 이상, 우리의 이익을 탐한 나머지 이웃에게 불행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계속 경고합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서 그만이 자연의 특권적인 고려 대상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자연은 똑같은 형상을 부여해 준 모든 생명에 똑같이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98)
사람은 우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에 더해서 공공의 이익까지 추구한다면 그것은 경건한 행위’지만, ‘자신의 쾌락을 확보하기 위해 남의 쾌락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부정의’입니다. 한편 ‘다른 사람의 쾌락을 증대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감소시키는 것은 인도주의와 선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자기 이익보다 남의 이익을 더 먼저 고려하고 애씁니까? 히슬로다에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베풀면 오히려 그 자신이 더 큰 이익을 누립니다. 먼저 자기 자신이 훌륭한 행위를 한 사실을 의식하게 되니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뿌듯하겠지요(이건 심리학적으로 타당한 이야기 같습니다). 또 사람들의 감사를 받아 정신적으로 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가 짧고 일시적인 쾌락을 포기한 데 대해 신께서 엄청나고 영원한 기쁨으로 보상해 주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논리로 사람들에게 자기 이익보다 남의 이익을 위해 애쓰라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이런 시민 정신이 길러지면 우리 사회도 훨씬 더 따뜻한 곳이 되겠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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