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는 코다입니다
코다를 만나다
- 당신과 나의 기억의 조각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는 한국 농사회 안에서도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다. 농인 중에도 ‘코다’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나는 나를 부르는 이름이 코다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다큐멘터리 기획에 돌입했다. 농부모의 반짝이는 세상 이야기를 청인 자녀의 시각으로 풀어내는 사적 휴먼다큐멘터리였다.
2012년 여름부터 기획 단계에 돌입하여 약 2년 간의 제작기간을 거쳤다. 그리고 2014년 5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반짝이는 박수 소리〉라는 제목으로 첫 선을 보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이야기인 줄 알았다며 연락해온 이가 있었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 보고 친구 신청했어요. 저도 겪었던 비슷한 일들을 스크린을 통해 접하면서 많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엄마, 아빠도 보면서 함께 웃고, 울었고요.
〈표희선〉
우리는 초면이니 가볍게 커피 한잔 하자며 만났지만 장장 3시간 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이야기인 기억이 오갔다. 농부모의 장녀로 태어나 통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착하게 자라야 한다는 것을 빨리 깨우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부모가 부끄러웠던 것도, 그러나 부모의 반짝이는 세상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도 모두 나의 기억과 비슷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이런 이들이 세상에 더 많이 있는 걸까, 이런 경험은 코다로서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일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던 중 한국농아인협회 측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코다가 모일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침 협회 측에서도 그런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 있었다며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 한국농아인협회 중앙회 주관으로 〈코다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행사 시작 5분 전에 헐레벌떡 도착한 토크 콘서트 장은 낯설었다. 많은 농인들이 있었고 행사장은 생각보다 더 넓었다. 두툼한 외투를 벗고 찬찬히 숨을 고르니 그제야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코다 토크 콘서트〉라고 쓰인 현수막 아래로는 여러 명의 수화통역사*가 오가고 있었고 커다란 화면 위로는 한글 자막이 지나고 있었다. 화면 옆에는 여러 대의 컴퓨터가 있었는데, 다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속기사용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우리가 평소에 쓰는 키보드와는 다른 형태의 자판이었다. 그들은 급하게 타자를 치지 않았다. 서로 분량을 나누어 타자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선율에 맞추어 피아노를 치는 것 같았다.
행사가 시작되자 입으로 말하는 사람과 손으로 말하는 사람이 나란히 무대에 섰다. 한 사람은 입을 열어 사회를 봤고, 다른 사람은 그 말을 손으로 옮겼다. 그들 옆에는 그들의 입말과 손말이 문자 언어로 적혀 스크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평등한 자리였다.
오늘의 연사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어떤 이는 마이크를 잡았고, 어떤 이는 손과 표정을 움직이며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수화통역사는 음성언어를 수어로 옮겼고, 마이크를 잡아 수어를 음성언어로 옮겼다. 수어동시통역은 최적의 세팅이 15분마다 통역사를 바꾸어주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바로 그 광경을 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코다라는 정체성을 갖고 무대에 선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그들의 입과 그들의 손에서 나의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언니들이 겪었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였고, 나의 이야기는 곧 그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어떻게 나의 삶이 이다지도 당신의 것과 닮았을까. 나는 웃다가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러 개의 조각이 되었고 나는 천천히 당신과 나의 조각을 맞추었다.
농부모 아래서 자라다
엄마, 아빠는 입술 대신 얼굴 근육을 크게 또는 미세하게 움직이며 손으로 말했다. 후천적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엄마 뱃속에 내가 있었다. 내가 세상에 처음 머리를 내밀었을 때 그들은 나를 보고 기뻐했지만 그들의 부모는 나의 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부모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는 밤에 서로 돌아가며 깨기도 하고, 아빠가 돌보는 시간에는 엄마가 잠깐 눈을 붙이고, 엄마가 돌보는 시간에는 아빠가 눈을 붙이고. 엄마는 설거지를 할 때 애기가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빠 보청기를 빌려서 귀에 착용하고애기가 울면 가서 안아주고…. 보청기는 부부 사이에 공유되는 물건이었어요. 그렇게 예쁘게 자라는 이 아기의 목소리가 어떨까, 혹시 자기의 목소리를 닮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딸내미 목소리가 어떻소, 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다행히 말을 잘하는구나 하는 안심도 해보고 그랬다고 해요.
〈이현화〉
엄마와 아빠는 청각장애 2급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보청기를 착용하면 아주 작은 소리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소리이고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리가 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수였던 아빠는 하루 종일 톱밥을 날리며 대패질을 했다. 아빠는 저녁이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제일 먼저 귀에 보청기를 착용했다. 일을 할 때에는 굳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지만, 집에서는 꼭 들어야만 했다.
나는 입술 대신 손으로 옹알이를 하며 엄마와 아빠의 언어를 습득했다. 손으로 한 단어씩 수어를 배웠고 엄마와 아빠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표정으로 소통을 했다. 그러나 아이는 다른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음성언어를 잘하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그렇게 나는 부모로부터 수어를 배웠고 세상으로부터는 음성언어를 배웠다. 엄마와 아빠는 그 누구보다 나를 애지중지하며 키웠고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다. 둘은 말 대신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손과 몸짓을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했다. 그 언어는 굉장히 직접적인 것이었고 그렇기에 매우 친밀했다.
수어를 쓰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표정이 굉장히 크잖아요. 저도 대학 와서 친구들에게 “손을 항상 움직인다” “얼굴 표정이 크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게 저의 특징이고, 제 최대 장점이에요. 또 저는 사람 눈을 보면서 대화를 해요. 저는 이게 어렵지 않아요. 왜냐면 엄마, 아빠와 대화할 때 항상 이렇게 했거든요. 눈과 손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표희선〉
어딜 가나 엄마와 아빠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은 입을 열어 엄마에게 말을 걸었지만,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엄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고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아, 어, 웨어 아 유 프롬” 하고 되물었다.
러시아 무용수를 닮은 이국적인 외모의 엄마는 종종 시골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슨 말?” 하고 내게 궁금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입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청각장애인이거든요.”
그럼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힘내렴” 하며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쥐어줬다. 혹은 “부모가 장애인이어도 너는 절대로 그걸 부끄러워하면 안 돼, 알겠니?” 하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이런 반응이 몹시 지겨웠다. 그러나 어른 말에 토를 달면 버릇없는 아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에서 자랐는데,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할매들이 불쌍하네, 장하네, 대견하네, 뭐 이런 이야기를 해요. 듣기 좋은 꽃노래라도 계속 들으면 안 좋잖아요. 난 충분히 사랑받고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할머니가 뭔데 그런 이야기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민지〉
“네 엄마, 아빠가 안 들리는 사람이니까 너는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이런 말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제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컸어요. 착한 딸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 삭혔어요.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걸 거야’라고 미리 재단하고 포기한 거죠. 예를 들면 중학교 때 악기를 연주하는 관악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클라리넷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악기라는 건 부모님이 아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경험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고, 악기가 왜 이렇게 비싼지도 모르시고. 돈을 들이는 만큼 재미도 있어야 하는데 엄마, 아빠는 전혀 재미가 없겠구나 싶어서 설득을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걸 미리 고민하다 보니 하고 싶은 걸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표희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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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통역센터'와 '수화통역사' 같은 명칭은 아직 공식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수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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