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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이 끝났다.
프로젝터가 꺼지고 스크린 영상도 사라졌다.
나는 강연대 위에 따라놓은 물을 반쯤 마시고는 웅성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청중 사이로 내려갔다. ‘구도심지 개발과 도시 디자인’이라는 주제였는데 제법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아마도 이해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청의 민간 기획위를 담당한 과장이 나를 안내했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강당 밖 로비로 나갔다. 모두들 등을 돌리고 입구를 향해 걷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 여성이 몰려나가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에게로 다가섰다.
선생님, 잠깐만요.
그녀는 청바지에 티셔츠의 평범한 차림새였고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에 단발머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내 앞으로 내밀어진 쪽지를 보았다. 이름은 크게, 전화번호인 듯한 숫자는 작게 쓰여 있었다.
이게 뭐요?
쪽지를 받아쥐고 내가 묻자 그녀는 벌써 뒷걸음으로 주춤주춤 내게서 멀어지면서 말했다.
예전부터 잘 아시는 분이라고…… 꼭 전화해달라고 하셨어요.
내가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그 젊은 여성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영산읍에 내려갔던 것은 윤병구의 아내가 보낸 문자메시지 때문이었다. 그는 나의 죽마고우다. 나는 고향인 영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윤은 우리집 바로 뒷집에 살던 동급생이었다. 읍내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신작로인 중앙로에 이어진 상가 점포를 가진 사람들이거나 군청, 학교, 읍사무소 등에 직업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마당이 넓고 번듯한 한옥에서 사는 이들은 군의 각처에 농지를 소유한 지주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읍사무소의 서기로 박봉을 받아 처자식을 먹여살렸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다고는 해도 영산은 낙동강 교두보의 안쪽이어서 이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전장에 나갔다가 살아 돌아와 읍사무소에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무슨 고지 전투에선가 무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았으며, 일정 때 군청에서 사환으로 일했던 덕분이었다고 어머니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농투성이들뿐인 읍내 젊은이들 가운데 소학교를 나왔고 일본어와 한자를 읽고 쓸 줄 알았다. 아버지의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귀퉁이가 누렇게 변색된 육법전서니 행정학이니 하는 낡은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중에 시골을 떠나 도회지에 나가서 아버지가 한동안 대서소 서기로 먹고산 것도 아마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다달이 나오는 아버지의 공무원 월급이 있었으며, 해마다 식량이 나오는 외가의 땅뙈기가 있었다. 다섯 마지기의 논은 어머니가 시집오면서 외할아버지에게서 떼어 받은 땅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읍내의 변두리 산자락이 시작되는 언덕바지에 있었는데, 방이 세 칸에다 가운데 대청마루가 딸린 일자집이었다. 병구의 집은 우리집과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그야말로 오두막집이었는데, 처음에는 흙벽에 초가였던 것을 나중에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꾸었다. 병구가 나의 소싯적 친구이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우리 가족은 영산읍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우리가 마흔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서울 중심가의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였을 것이다.
내 누군지 니 알아보겄나?
경상도 사투리로 물어왔을 때 나는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당시에 관공서의 직급 높은 이들처럼 감색 양복에 셔츠 깃을 밖으로 내놓은 그런 차림새였다. 그가 윤병구라는 이름과 영산읍을 말하자마자 내 입에서는 마법에 걸린 듯 신기하게 잊고 있었던 그의 별명이 흘러나왔다.
탄고구마, 자네 탄고구마 아닌가.
혈육이라 할지라도 이십여 년이 지난 뒤에 만나게 되면 서로가 할말이 별로 없다. 대개 가족관계라든가 현재 사는 형편이나 서로 묻고 대답하고, 자연스럽게 커피를 함께 마시고, 명함이라든지 연락처를 주고받고, 언제 만나서 술 한잔 나누자고 막연히 약속하고는 헤어진다. 그러고는 평생 다시 만나지 않든가, 전화 몇 통화 건네든가, 아니면 뒤에 다시 만나더라도 술자리가 싱거워져서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는 사정에 얽힌 이해관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 관계의 접점이 없으면 친척 간에도 제삿날 이외에는 만날 일이 별로 없다. 윤과 나의 새로운 관계가 이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현산건축에 있었고, 그가 중견 건설회사인 영남건설을 막 인수했던 때문이었다. ‘탄고구마’라고 내가 자신의 별명을 기억해내자마자 윤병구의 눈가에 물기가 고이더니 내 두 손을 와락 잡으면서 그걸 잊지 않았느냐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의 집은 우리집 마당 왼쪽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던 담장 뒤편에 있었고, 아침마다 그는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학교에 가자고 외치곤 했다. 그의 집 부근은 동네의 주택가가 끝나는 곳에 있던 국유지였고 잔솔밭이 시작되는 비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인근의 소작인들이 부치던 땅을 떼이고 하나둘씩 모여들어 흙과 돌로 대충 벽을 쌓고 오두막을 짓기 시작하면서 십여 호가 생겨났다. 그들은 읍내의 허드렛일이나 미장일, 목수일, 군청의 잡일을 도맡았으며 수확기마다 주변 농촌의 품앗이로 먹고살았다. 나도 그 집들 중 한 집에서 태어났고, 분명치는 않지만 병구는 초등학교 삼학년 때쯤 우리 뒷집으로 이사 왔을 것이다. 이사 온 날 그가 먼저 나에게 알은체를 했고 우리는 그날 오후 내내 뒷산에 올라가 놀았다. 서글서글한 병구의 엄마가 일 다니는 농가에서 고구마를 캐고 나서 이삭을 거두어왔는데, 맛 좀 보라고 한 바가지 갖다주었던 기억도 난다. 윤병구는 종종 점심으로 고구마 두어 개를 싸가지고 학교에 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디 갔는지 좀처럼 보이지 않다가 집에 돌아오면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지르거나 아내를 때리기도 했다. 그는 인근 도시에서 건설현장의 십장으로 일 나간다고 들었다.
내가 윤병구를 잊지 못하게 된 것은 어느 날 뒷산에 올라가 모닥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다 산불을 냈던 일 때문이었다. 뜨거운 고구마 껍질을 벗기느라 한눈팔던 사이에 불티가 마른풀에 번졌고, 둘이서 정신없이 불길을 쫓아다니며 발로 밟고 윗옷을 벗어 후려치며 불길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불길은 잠깐 사이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다급해진 내가 달려내려가 산에 불이 났다고 외치자 어른들 수십여 명이 집에서 뛰쳐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뒷산으로 몰려가 어두워질 때까지 소동을 벌인 끝에 간신히 산불을 껐다.
병구와 나는 그 소란중에 군청 앞의 공회당 안에 숨어 있었다. 공회당은 일정 때 신사가 있던 곳으로 강당이나 태권도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캄캄한 공회당에서 서로 기대어 잠들었다.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찾아 밤늦게까지 뒷산을 헤매야 했다. 이튿날 학교에 가서 우리가 읍내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게 되었다. ‘불조심’이라고 쓴 화판을 들고 우리는 교무실 앞에서 벌을 섰다. 병구에게 ‘탄고구마’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그 무렵부터였을 텐데, 누가 먼저 그렇게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땅딸보 몸매며 동그랗고 새카만 얼굴에 영리하게 반짝이는 눈을 가진 그에게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내가 건축을 공부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아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나 윤이 건설회사의 대표가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후 죽이 잘 맞았던 것은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이 영산읍을 떠난 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났던 날 어느 일식집에서 자세히 들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헤쳐나온 어려운 과거는 피눈물의 역사일 테지만 그걸 입 밖에 내어 자랑삼을 일은 못 된다. 젊은이들에게 너희는 보릿고개도 모르고 점심 굶은 아이가 찾는 학교 운동장의 수돗가를 알 리가 없다고 탄식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다.
병구는 성적이 바닥이었고 월사금도 거의 못 내는 형편이어서 오학년 때인가 학교를 그만두고 빈둥거리다가 신문을 돌리고 차부에 나가 행상도 하다가 일찌감치 화물차 조수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도시에 나간 뒤 언젠가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 서글서글한 엄마는 읍내 식당에 나가 일하고 바로 아래 누이동생은 미용기술을 배운다며 가출했다. 윤병구와 나는 칠십년대 중반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군대에 갔다. 내가 대학 재학중에 군에 갔기 때문에 그보다는 조금 늦었던 것 같다. 윤은 공병대에 배치되어 중장비 교육을 받았고 이것이 뒤에 그의 인생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제대하자마자 중장비 기술 자격증을 땄고 그맘때에 활발해진 농촌 근대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첫 사업은 포클레인을 임대하여 농지개량사업에 나선 일이었다. 농지개량사업이란 소작농이 떠나고 열 마지기 이하의 소농들마저 견디지 못하여 농촌을 떠난 뒤에 그들의 농지를 취득한 중농 이상을 중심으로 농촌을 개편하던, 새마을운동 시절에 번성했던 작업이었다. 농지의 구획과 물길을 재정비하는 일이었다. 이런 작업은 지방마다 힘깨나 쓴다는 유지들이 나서서 군청과 함께 벌이는 사업이었고, 병구는 그 아래 손발을 자처하고 들어가 일했다. 처음 몇 년은 중장비 대수를 몇 대 더 늘리는 데 그쳤지만, 지방 간선도로 공사를 맡게 되면서 그는 읍을 벗어나 도 단위로 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국회의원이나 판검사들까지 교제 범위를 넓혀갔다. 그의 명함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직함이 빽빽하게 나열된 것들이었다. 우선 건설사 대표이면서 모 당 자문위원에다 청소년선도위원, 장학회 이사, 청년회의소, 로터리클럽, 라이온스클럽 등등. 나를 만날 무렵에 그는 부도난 건설사를 인수하여 대도시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부지런히 전화하고 만나고 몇 건의 사업도 함께 했다.
그의 아내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는 이랬다. ‘그이가 쓰러졌어요. 아프기 전부터 자꾸만 선생님을 찾았는데 한번 내려와주세요.’
썩 내키지 않는데도 내가 영산읍으로 내려가보기로 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아마도 그 며칠 전 김기영이 나에게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공간, 시간, 인간이라고? 우리 건축에 인간이 있었나? 인간이 있었으면 죽기 전에 후회라도 할 텐데. 현산 선생이나 너희들 모두 반성해야 돼.’
김은 나의 대학 선배였다. 그가 말기 암으로 투병중이어서 내가 그냥 부드럽게 웃으며 논쟁을 피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의 어리석은 순진함이며 사람과 세상을 짝사랑하는 태도를 비아냥거리지 않고 좋아했다. 주위에서는 그의 이상주의가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바로 그것이 김기영의 실력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나의 관대함은 세상을 짝사랑하지는 않겠다고 작심한 뒤에 그를 거리를 두고 바라본 데서 온 여유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사람과 세상은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의 욕망은 그런 가치들 가운데 남길 것만 조금 걸러내고 대부분을 자기 위주로 변형시키거나 폐기처분해버린다. 조금 남겨두었던 것들마저 마치 오래전에 소비했던 낡은 물건처럼 또다른 기억의 다락방에 처박힌다. 건물을 무엇으로 짓느냐고? 결국은 돈과 권력이 결정한다. 그런 것들이 결정한 기억만 형상화되어 오래 남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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