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지금, 여기 사는 즐거움
“지구를 제 집처럼 돌아다니며 목숨을 걸고 배우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의 하나다. 하지만 그런 삶을 대다수인 우리가, 더욱이 일생 동안 계속할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배움과 동경의 여행은 끝나고, 여기에 사는 게 시작된다.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인생 여행의 참다운 시작이다.”
-야마오 산세이, 『여기에 사는 즐거움』(최성현 옮김, 도솔, 2002)
열아홉 살 끝 무렵,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은 갓 상경한 지방 풋내기에게도 ‘도도한 생활’을 안겨 주는 도시였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도도한 생활」에는 정말이지 도도할 것 없는, 피아노의 가장 낮은 음으로 ‘도-도- 하고’ 우는 스무 살 여자애의 반지하 방이 나온다. 그곳에서 여주인공은 “왠지 까맣게 졸아붙은 캘리포니아 햇빛을 씹어 먹는 기분”이 드는 건포도를 생각한다. 나의 반지하 방 역시 까맣게 졸아붙은 햇빛을 담은 건포도의 색을 띠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반만 올라가면 일층’이 나오는 집이 바로 내가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진심으로 도도하기 짝이 없었다. 찧고 까부는 나이라 그랬는지, 부모님과 외떨어져 산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자고로 집이란 따뜻한 물 나오고, 공동 화장실이 아니라 집 안에서 일을 볼 수 있고, 쥐만 안 나오면 된다는 신조였다. 나의 반지하 방은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케리네 집 싱크대 위로 쥐가 지나가는 장면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던가! 암, 내 방이 잘나가는 뉴요커 작가의 방보다 낫다. 큰 빚 없고 홀아비 냄새만 안 나면 된다는 전 룸메이트의 남자 선택법처럼, 나의 집에 대한 희망사항은 명징하고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에 다시 반지하 방으로 기어들어갔을 때, 그곳에서는 소설 속 스무 살 여자애처럼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도- 하고’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머리가 굵어진 탓인지 창문에 비치는 누군가의 하반신이 불쾌했고, 창문 앞에 주차된 자동차가 부릉부릉 공회전을 하며 내뿜는 배기가스에 목이 멨다. 뭐, 그러면서도 서울 어딘가에 열쇠를 따고 들어가 한 발 디딜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눈물겹게 고맙기도 했다. 이런 처지니 서울에 올라와 수십 번 이사를 하면서도 어떤 집에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존재론적 질문은 물고기가 자전거 타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쓰잘데기 없었다. 그 시간에 반지하 방에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단속이나 잘 하는 것이 나았다.
그런 나에게 캄브리아기 대폭발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떤 집에 살지도living 모르는 처지에 어떤 집을 살 것인가buying라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사건은 4년간 반지하 방에 기거하다 친구 세 명과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모아 마포구 합정동에 전세를 얻으면서 시작되었다. 졸지에 가장 낮은 층인 반지하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 층으로 새로운 거처가 정해졌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해피엔딩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럴 리 없었다. 우리가 살던 합정동 집은 2년마다 전셋값이 2천만 원씩 뛰었다. 내 로망이 연봉 2천만 원을 받는 것인데, 그 꿈을 이루기도 전에 전셋값은 4천만 원이 올랐다. 도시로 상경한 중국 농민공들처럼 한 방에서 네 명이 꾸역꾸역 같이 살지 않는 한, 치솟는 전셋값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디아스포라처럼 내쫓기는 이사를 결정하자, 합정동 집은 전셋값을 4년 전보다 4천5백만 원 올려 새 입주자를 맞았다.
반지하와 꼭대기 층의 언저리에서 어리고 말갛던 시절을 보내고 어느덧 중년이 된 나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어떻게든 새로 전세를 구한다. 문제는 천정부지로 솟는 전셋값도 무섭지만, 전세 자체가 멸종 위기 종처럼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르던 시절은 지났고 은행의 저금리 기조 아래 집주인들은 앞다투어 월세로 전환 중이었다. 이번에는 운 좋게 전세를 구하더라도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다. 결국 시간이 가면 전세에서 반전세로, 그리고 월세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애초부터 월세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린 터였다. 『88만 원 세대』에서 ‘도시 빈민층’으로 지목된 시민 단체 활동가 처지에 월세는 개미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다간 저축은커녕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금혼식 날에도 어김없이 월세를 걱정하고 앉아 있을 테지. 월세에 관한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는 작가 존 버거가 여든 살이 넘은 나이에도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서 꼬박꼬박 월세를 내며 산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건 이역만리 땅에서도 책이 팔리는 ‘존 버거’이기에 가능한 낭만 아니겠는가?
둘째, 아등바등 서울에 붙어 있지 말고 전주, 통영, 제주 등 살기 좋아 보이는 지방으로 이주하거나 과감히 귀농한다. 언론인 김선주 씨도 책에서 노후 대책으로 10년에 100킬로미터씩 남하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처음에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으나 그것은 서울에 집 나부랭이 하나쯤 가진 은퇴자의 대책일 뿐, 내 처지에 남하하기 시작하면 지천명이 되기 전에 해남 땅끝 마을에 가 있거나, 고희 때 남극에서 칠순 잔치를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귀농은 어떨까? 내가 다니는 직장은 ‘귀농 트라우마’가 있는데,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 중 으뜸이 귀농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입사 인터뷰는 (떨리는 목소리로) “귀농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언제쯤이요?”로 끝난다. 나로 말하자면 한 명도 도시로 회귀하지 않은 퇴직자들의 ‘귀농 행복 사례’에 담금질되어 있으면서도, 귀농할 마음이 콧구멍만큼도 들지 않아 자격지심을 느껴 왔다. 환경 운동을 한다는 인간이 마음속으로나마 귀농을 꿈꾸지 않다니! 하지만 운전 면허증도 없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없고, 몸마저 비리비리한 나는 시골에서는 영 쓸모가 없는 인간이다. 게으르고 허약해서 농사를 업으로 삼을 수가 있나, 프로그래밍이나 웹디자인 같은 기술로 시골에서도 밥벌이가 가능하기를 하나, 동네 어르신을 모시고 읍내 병원까지 운전할 수가 있나, 영 되는 것이 없다. 내가 보기에 시골에는 운전, 간호, 디자인, 홍보 등 도시에서도 통용될 기술을 가졌거나 농사를 전업으로 삼을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생태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은 도시에 남아 저항하고 싸우며 도시의 숨통을 틔워야 한다.
무엇보다 나는 ‘천상 도시 여자’였다. 깜깜하고 인적이 고요한 시골에서는 저녁 여덟 시만 돼도 밖에 혼자 나가지 못한다. 언젠가 초저녁 어스름 무렵, 한적한 시골 길을 산책하다가 일제히 짖어대는 개들 소리에 오금이 저릴 만치 놀란 뒤로, 시골은 내 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곡식이 햇볕에 영글어 가는 서정적 풍경을 앞에 두고 집 마당에서는 기르던 닭과 개를 잡아먹는 시골의 일상에 동화될 자신도 없었다. 나는 포장육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고기가 생산되는 과정은 외면하고 마는, 가소로운 도시 인종이다. 게다가 결혼 안 한 여자는 사연 있다고 여기실 동네 할머니들과는 또 어떻게 살갑게 지낸담! 도시에서도 취향 맞는 사람만 쏙쏙 고르고 골라 만나는 비사회적인 인간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듬더듬 찾아가며 내 의지로 쌓아온 근 20여 년의 삶과 사회적 관계가 이곳, 도시에 있었다. 그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본질이었다. 나에게 서울이란 자발적으로 사춘기를 앓으며 마음의 나이테를 새기게 해 준 모든 것들이 응축된 도시였다. 결론적으로 지방은 좋은 선택지였지만, 나는 아직 서울을 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인간은 구공탄 굴뚝 연기에 향수를 느끼는 비둘기처럼 코리아의 메갈로폴리스 ‘수도권’에 온기를 느끼고 만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보자.
월세도, 남하도 대안이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남은 건 집안 인구 밀도를 대폭 늘려 전셋값 부담을 줄이던가, 대안적 공동체를 통해 주거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소싯적 ‘도미토리’ 스타일로 한 방에 네 명이 함께 살아 본 결과, 인간도 영역 동물인지라 자신만의 영역이 생존의 필수 조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영역 인간론’을 일컬어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 했고, 팡세는 ‘인간이 불행한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몰라서’라고 했다. 대학가 전봇대에 나붙는 ‘잠만 자는 방’에서 평생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한 방에서 네 명이 함께 뒹굴며 살던 이십 대 초반에는 낭만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요히 머물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행복의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후였다.
그렇다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창 뜨고 있는 주거 공유나 셰어하우스는 어떨까? 이 대안은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면서도 함께 사는 삶과 지속 가능한 방 값 역시 보장하는 새로운 주거 형태로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함께 살기로 약속한 친구도 있었고, 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 주기도 싫은 초개인적인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활동가라는 직업 특성상 ‘입주자 회의’ 같은 절차가 야근처럼 느껴졌다. 시민 단체 조직이란 매일같이 회의하고 토론하는 ‘회의주의자’와 ‘토론토 학파’의 나날인데, 집에서도 어떻게 함께 살지 회의하고 토론하는 삶이 펼쳐질까 두려웠다. 아이를 키운다거나, 오랫동안 혼자 살아 외롭다든가,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에게 부대끼는 직장에 다니지 않는 이상, 주거 공동체에까지 입주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만큼은 회의 따위 없이 독단적이고, 권위적이고, 이기적으로 군림해도 서로를 이해해 주는 한 몸 같은 친구와 오붓하게 지내고 싶었다. 동네에서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그리고 도시에서는 시민적 교양을 지키는 익명의 공동체주의자로,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니?
한때는 월세라도 벌어 볼 심산으로 이직을 생각해 봤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니 잉여 인간인 내가 월세를 가뿐히 내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직업을 갖기는 어려울 듯했다. 청약을 믿고 공공 임대주택을 노려 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그러나 부양 가족도 없고, ‘제조업 종사자’처럼 임대주택 우선순위 직종도 아니고, 무엇보다 게을러터져서 공공 임대주택 정보에 촉각을 세울 자신도 없었다.
이렇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선택지들은 줄줄이 기각되었다. 전세는 없고, 월세는 불가능하고, 귀농은 싫고, 생판 모르는 타인과의 주거 공유도 내 취향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내 인생에 따뜻한 집 한 채가 주어질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목이 멨다. 그런데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생겨난다’고 말했던 게 루쉰이었던가? 가능한 대안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다가 결국 대책 없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에게 루쉰이 말하던 그 길이 보였다. 내 경우엔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서른여섯 살의 겨울, 덜컥 집을 사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써 놓고 보니 집을 사는 변명으로 루쉰을 언급하는 게 찜찜하긴 하다.)
집을 사는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buying 곳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정착하기 어렵다. 『어디 사세요?』(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사계절, 2010)라는 책에 따르면 “세입자와 주택 보유자를 불문하고 (…) 1년에 우리나라 전 인구 다섯 명에 한 명 꼴, 약 870만여 명이 이삿짐을 싸고 푼다.” 집값 상승률 세계 2위, 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주택 임차료에 허덕이는 현실에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들은 오르는 세를 감당하지 못해 계약이 끝나는 2년마다 이사를 떠난다. 집 있는 사람들도 재테크의 욕망과 거주 조건이 맞아 떨어지는 동안만 정착하며, 5년에 한 번 꼴로 집을 옮긴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전 국민의 대다수가 부동산 유목민인 한국에서 정주할 수 있음은 그 자체가 특권”이며, “정주의 터는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결정한다”고 했다.(『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13) 정주할 권리가 사라진 사회는 그 대가로 안정된 삶과 이웃, 그리고 공동체 문화를 잃는다. 특히 오래된 동네가 재개발되면 그곳에 고여 있던 삶들과 무형의 관계망이 모조리 어그러진다. 재개발 시 추가 분담금 때문에 집 소유자의 약 80퍼센트가 떠난다니 세입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우리나라 사정과 달리 이탈리아 볼로냐 시는 재개발된 바닥 면적의 30퍼센트를 이전 집세와 같은 수준으로 그곳 주민에게 임대하도록 규정해 세입자의 정주를 보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특별시, 그것도 ‘시민 단체 활동가’ 나부랭이로 근 10년을, 말 그대로 ‘버텨 온’ 나에게 ‘정주할 권리’는 애초에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나, 나는 역동적이고 잔혹하고 기생적인 대도시, 그와 동시에 적당한 무관심과 자유로움이 매력적인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서울은 “퀴어 페스티벌”이 가장 오래, 그리고 지속적으로 열리는 대한민국 ‘퀴어’의 본고장이 아니던가. 서울의 공기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 이유만으로도 나는, 아직은, 진절머리 나게 서울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사람 구경이라고, 갓 상경한 시골 처녀처럼 서울을 바글바글 채우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내 눈이 호강한다. 그 사람들 사이를 꾸역꾸역 스쳐 지나가며 이어폰으로 얼렌드 오여의 노래를 듣는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Kings of Convenience>의 멤버 얼렌드 오여는 추운 노르웨이를 떠나 한눈에 반한 이탈리아 시라쿠사로 이주해 새로운 정착지의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서울은 시라쿠사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유목민 상태를, 그리고 청춘을 내려놓는다.
나는 지금 여기에 정착한다.
참다운 인생 여행이 시작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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