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국어사전다운 국어사전을 꿈꾸며
지금까지 우리말을 다룬 책을 몇 권 내는 바람에 남들보다 국어사전을 뒤적일 기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고, 국어사전을 만드느라 애쓴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쉬움 또한 적지 않았으며, 국어사전이 지닌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은 허술함이 심각할 정도였다. 국립기관에서 펴낸 국어사전이라면 당연히 그 나라의 언어 정책과 연구 성과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표준국어대사전』이 그런 성과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디서부터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아보자는 생각에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져가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작업을 진행할수록 절망감이 밀려왔다. 한마디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토록 허술하고 오류투성이인 국어사전을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어사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업을 하는 동안 내 페이스북 계정에 짤막하게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낸 글을 올렸더니, 기자이면서 우리말 관련 책을 낸 어떤 이가 자신은 그동안 『표준국어대사전』에서 3,000개의 오류를 찾아냈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 말이 과장이 아닐 거라는 짐작에 나의 절망감이 자리 잡고 있다. 사전이라면 마땅히 오류가 없어야 한다. 물론 사전 편찬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실수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러한 실수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 게 사전 편찬자들의 역할이다. 국립국어원 관계자와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자들이 그러한 역할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해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내 말이 지나친지 아닌지는 독자들께서 이 책을 다 읽고 판단해 주시기 바란다.
사전마다 편찬 원칙과 기준이 있을 터이다. 표제어 선정 범위부터 표기법, 어원이나 용례 제시 등 세세한 부분까지 미리 기준을 세워두고 작업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부분에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야 사전이 이렇게 질타를 받을 만큼 엉망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립국어원은 자신들이 세운 편찬 원칙부터 돌아볼 일이다. 원칙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원칙이 불합리하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원칙을 고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이미 세워 놓은 원칙에 얽매이다 보면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덧붙여 말하자면 중심을 확고히 잡아야 한다. 국어사전이라면 마땅히 우리말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 하지만 한자어와 외래어에 밀려 우리말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는 게 현재의 『표준국어대사전』이 갖추고 있는 일그러진 현실이다. 나아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화학용어, 물리용어 등 전문어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시피 한 것도 기가 질리게 만든다. 그런 말일수록 뜻풀이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어서 가방끈이 짧은 사람은 접근하기도 어렵다. 그런 반면 정작 보통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쓰고 있는 수많은 낱말들을 사전의 품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에는 소홀하다. 표제어의 수록 범위를 밝히면서 ‘전문어와 고유 명사는 수가 많기 때문에 일부만 선별하여 수록하였다’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지는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국립국어원이나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른다. 다만 결과물인 사전을 보고 판단할 뿐인데, 오류에 대한 점검과 개선 및 보완 작업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한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문의사항뿐만 아니라 오류를 지적하는 글도 자주 올라온다. 그때마다 답변이 달리고, 때로는 사전 내용의 수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임시방편으로는 한계가 있다. 10년, 20년을 내다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편찬한다는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이라도 『표준국어대사전』 개정?보완 팀을 꾸려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기관이 해야 할 도리이다.
이 책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점을 모두 다루지는 못했다. 그럴 만한 능력도,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상식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살펴보았을 따름이다. 나보다 더 많은 우리말 지식을 가진 사람이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기 바란다.
이 책을 쓰기 전에 일본 작가 미우라 시온三浦しをん이 지은 장편소설 『배를 엮다』를 감명 깊게 읽었다. 『대도해大渡海』라고 이름을 붙인 일본어 사전을 편찬하는 출판사 편집팀의 고군분투를 그린 작품이다.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어려움을 헤쳐 가며 언어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멋진 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감동스럽게 다가온다. 실수로 낱말 하나라도 놓칠까 봐 때로는 한 달간 집에도 못 들어가면서 교정지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비록 소설일지라도 자신들의 말을 지키고 가꾸어가야겠다는 소명의식과 애정이 참으로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도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분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끝내 숨진 이윤재, 한징 같은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이들에 대해 내란죄를 적용한 당시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담긴 내용이다. 지금 사전을 편찬하는 이들에게 우리말로 된 사전 하나 만드는 데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그 시절을 돌아보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말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그분들의 정신만큼은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표준국어대사전』은 1999년에 인쇄물로 출판한 이후 지금까지 새로이 출판하지 않고 있다. 대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전자사전 형태로 모든 내용을 제공하고 있으며, 인쇄물 출판 이후 계속 내용을 수정?보완해 오고 있다. 이 책에 나온 모든 낱말과 뜻풀이, 용례 등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실린 『표준국어대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혹시라도 이 책에 나온 낱말과 뜻풀이가 홈페이지에 실린 내용과 다른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작업한 이후에 홈페이지 내용이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2015년 8월 10일을 기준으로 홈페이지에 등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했음을 밝혀 둔다.
국어사전은 그 나라 언어의 보물 창고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 나라 말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지를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이 거듭나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의 숨결 속에 살아 있는 국어사전이 되기를 바란다.
제1장
한자어를 사랑하는 국어사전
우리말과 한자어
국어사전이 우리말보다 한자어를 더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무척 오래전부터 나왔다. 우리말을 찾아서 수록하려는 노력보다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지도 못하고 쓰지도 않는 한자어로 사전을 채워놓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국어사전 편찬자들은 지금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 건너온 한자어까지 마구 끌어다 놓고 제대로 된 설명조차 해 놓지 않는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우리말보다 한자어를 중심으로 사전을 만들고 있다는 건 『표준국어대사전』을 조금만 들추어 보아도 알 수 있다. 직접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말’에 대한 정의부터 짚고 넘어가자. 사전에는 ‘우리말’ 항목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의 말’이라고 매우 간단하게 풀이해 놓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예문 다섯 개를 실었다.
·순수 우리말
·우리말의 우수성
·우리말로 번역하다.
·우리말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자.
·우리말에 대한 인식이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다른 표제어로 ‘순우리말’을 실었으며, 뜻풀이는 ‘우리말 중에서 고유어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놓았다. 그렇다면 ‘우리말’은 고유어보다 넓은 범위의 언어를 가리키며, 한자어나 ‘외국에서 들어온 말로 국어처럼 쓰이는 단어’를 가리키는 외래어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우리말’이라고 할 때는 대개 순우리말, 즉 고유어만을 가리킬 때가 많다. 앞서 사전에 소개한 예문에도 그러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두 번째와 네 번째, 다섯 번째의 예문에 쓰인 ‘우리말’은 누가 보더라도 순우리말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우리말’에 대한 사전의 뜻풀이가 너무 간략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말’ 항목에 ‘우리나라 사람의 말’이라는 풀이와 함께 한자어나 외래어와 구분하여 고유어만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는 풀이를 덧붙여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이 책에서 고유어를 나타낼 때 ‘순우리말’이라는 낱말 대신 ‘우리말’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사전에는 ‘한자어’를 다음과 같이 풀어놓고 있다.
한자어漢字語: 한자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말.
뜻풀이를 대하는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다. ‘기초하여’라는 말도 그렇거니와 굳이 ‘만들어진’이라는 피동형을 써야 하는 걸까? 그냥 ‘한자로 만든 말’ 혹은 ‘한자를 사용하여 만든 말’이라고 하면 훨씬 산뜻하고 귀에 잘 들어오는데 말이다.
같은 뜻을 나타내는 낱말이 여러 개인 경우가 많다. 흔히 이런 낱말들을 동의어同義語라고 부른다. 그런데 동의어 중에 우리말과 한자어가 있을 때 무엇을 중심으로 사전을 편찬해야 할까? 중국어 사전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어사전이라면 당연히 우리말을 앞에 놓아야 한다. 하지만 국어사전은 우리말보다 한자어를 더 받드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사전에서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낱말: =단어單語.
단어單語: 분리하여 자립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이나 이에 준하는 말. 또는 그 말의 뒤에 붙어서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말. “철수가 영희의 일기를 읽은 것 같다.”에서 자립적으로 쓸 수 있는 ‘철수’, ‘영희’, ‘일기’, ‘읽은’, ‘같다’와 조사 ‘가’, ‘의’, ‘를’, 의존 명사 ‘것’ 따위이다. ≒낱말02·어사10語詞「2」.
‘낱말’을 찾으면 ‘단어’ 항목으로 가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단어’ 항목에 뜻풀이를 자세히 달아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단어가 들어간 합성어는 단어장單語張, 단어집單語集, 전단어全單語, 단어체계單語體系, 단어합성單語合成, 단어구조單語構造, 단어길이單語--, 단어문자單語文字, 단어용량單語用量, 단어공간單語空間, 부호단어符號單語, 단어결합單語結合, 단어글자單語-字, 단어명료도單語明瞭度, 단어형성론單語形成論처럼 많은 낱말들이 표제어로 올라 있다. 굳이 올리지 않아도 될 법한 것들이 올라 있는 반면에 낱말을 이용한 합성어는 ‘겹낱말’ 하나만 달랑 표제어로 되어 있다. ‘단어체계’나 ‘단어구조’는 되고 ‘낱말체계’나 ‘낱말구조’는 왜 안 되는 걸까? 더 심각한 문제는 복합어를 가리키는 ‘겹낱말’은 올라 있는데, 단일어를 가리키는 ‘홑낱말’은 올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이런 식의 한자어 우대가 『표준국어대사전』 곳곳에 보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말로 된 낱말을 찾으면 뜻풀이 대신 같은 뜻을 지닌 한자어를 찾아가라고 표시해 놓은 경우가 많은데, 두 낱말의 뜻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돌무덤: 『고적』 =석총石塚.
석총石塚: 『고적』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높은 무덤. 만주 지안 시集安市 일대의 토총, 고구려 고분 등이 대표적이다. 돌무지무덤, 고인돌, 돌널무덤 따위가 있다. ≒돌무덤.
‘돌무덤’과 ‘석총石塚’이 과연 같은 말일까? 같은 말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 제공하는 다음한국어사전은 ‘돌무덤’을 용례까지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자세히 풀어놓았다.
(1) 돌로 된 무덤.
그리스 신화 속의 그 인물은 신전의 돌무덤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다.
(2) 크고 작은 돌이 한데 모여 쌓인 무더기.
강화댁은 서낭당 옆에 있는 돌무덤에 돌을 하나씩 쌓으며 매일 치성을 드렸다. 유의어: 돌무더기
(3) [고고] 돌을 쌓아올려 만든 무덤. 유의어: 석총石塚
더 한심한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석총’ 뜻풀이에 나오는 ‘토총’이라는 낱말이다. ‘토총’의 풀이는 ‘흙으로 쌓아 올린 무덤’이라고 되어 있다. 내가 한심하다고 느끼면 과한 걸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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