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1. 이상한 나라
일본은 참 기묘한 나라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바다 위에 가늘고 긴 활 모양을 그리는 섬들이 떠 있다.
연중 거의 대부분이 묽고 아득한 안개의 베일에 덮여 있고 남북으로 2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네 섬은 유럽으로 치면 런던에서 이탈리아반도의 장화 끝부분에 이르는 거리에 해당한다. 또 구소련과 폴란드 국경에서 보면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까지의 길이에 해당한다.
열도 중앙에는 척추 산맥이 가로놓여 급격하게 변화하는 두 가지 유형의 기후로 나누고 있으며, 산지와 바다 사이에 있는 협소한 분지 평야에는 논 위로 장난감 같은 경운기가 달리고 있다.
성냥갑 같은 작은 집과 거리, 한가로운 전원 풍경은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에서 가장자리를 그리면서 하늘을 검게 뒤덮는 난잡한 공장 지대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일본의 이상한 점은 천연자원도 없고 인구가 과밀한 이 작은 섬에서 세계 2, 3위를 겨루는 공업 국가가 출현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은 섬의 신비로운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그 역사에 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고 최대의 문화국가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불과 400해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유사 이래 2천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세계 제국의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고 국가의 독립성과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해 왔다.
마야 문명과 잉카의 웅장한 문화를 만든 민족은 멸망했다. 나일 문명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의 영광도 지금은 관광객에게 호기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크레타 섬에도 에게 해의 섬들에도, 실론, 인도차이나, 중앙아시아에도 현대인의 눈길을 끄는 문화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그 지역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처럼 한 계통의 연면한 역사와 문화가 현대의 국민 생활에 연결되어 공업과 과학이나 예술 같은 분야에 수용되고 활용되는 경우와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오랜 것과 새로운 것의 불가사의한 기적에 가득 찬 나라로 보인다. 이런 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일본이 단 한 번도 대륙의 강대국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우연이나 대담한 무사도 정신 덕분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몬순 아시아 풍토의 평화로운 국제 환경 덕분이다. 특히 중국 민족과 조선 민족이 장대한 방벽의 역할을 해서 천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은 호전적인 기마민족의 침략에서 일본을 지켜 준 덕분인 것이다.
일본인은 이처럼 세계에서도 드물게 평화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적극적으로 침략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원구元寇는 몽골의 동아시아 정복전쟁이었지 이웃 나라가 벌인 침략 전쟁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인은 그 오랜 이웃의 우의를 원수로 갚은 역사가 있다. 그것은 동양의 윤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일본인의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석가의 사랑과 공자의 인仁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특히 메이지 이후 100년은 그런 이웃에 대한 일본 민족의 일방적인 침략과 약탈의 역사이며 지금도 이 나라 위정자들은 그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약하다.
일본이 2천 년에 걸쳐 타민족의 침략에서 보호받으며 생존해 왔다는 사실을 유럽 대륙 등에서 볼 수 있는 피비린내 나는 민족 항쟁의 역사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특수한 환경인가. 그것이 곧 일본인 특유의 문화 감각과 사회의식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본 문화가 이렇게 보호받은 섬나라라는 조건 속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문제는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풍토’ 이론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최근 인류학자들의 비교문명사적인 고찰과 민족학, 역사학, 민속학 등의 성과를 도입한 종합적인 풍토 이론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일본이 국내의 항쟁을 거치면서도 오랫동안 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그 사상과 문화에 중요한 고유성을 가져다주었다. 즉 인종, 언어, 종교, 의식주 양식의 균질성에서 발상 양식, 미의식, 자연관, 정신 구조에 이르기까지 단일성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단일적이고 균질적인지는 독일이나 중국, 동남아시아 다민족 국가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 말고도 민족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에서 일본처럼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세일계万世一系라는 것은 그 역사적 특성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민족 문화의 고유성은 서구 문화사의 유형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하물며 서구 모더니즘의 방법으로 일본 문화의 여러 요소를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근대적인 것과 전근대적인 것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충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일본 지식인의 다수를 납득시키기는 했어도 수천만 민족의 심리와 동떨어진 것으로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었다.
나는 근대 일본의 사상(문화) 형성 과정에서 민중과 지식인들 사이에는 제각기 성질이 다른 독자적인 법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늘날 급속하게 융합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고유성이 강한 일본 문화에, 더구나 대다수 민중이 아직도 토속적인 깊은 침묵의 세계에 있는 단계에서 전혀 이질적인 강력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일본이 직면한 세계사적인 위치의 특수성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처럼 거시적으로 보면 일본 문화사에서 나타난 대혼란이 메이지 시대보다 심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원시시대 이래 일본 문화는 인도, 중국, 남만南蛮 문화 등 거대한 파도를 경험했지만 1, 2세기를 거치면서 항상 침체와 동시에 고유한 일본화가 진행되어 왔다. 그 절정은 7~8세기의 나라奈良 시대가 되겠지만, 그 조차도 19세기 후반에 발생한 메이지 시대의 대혼란에 견주면 영향의 범위는 좁고 충격도 약하다. 메이지 시대의 변화는 권력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중간층에 격정을 불러일으켰으며, 나아가 밑바닥에 있는 민중의 심부에까지 그 파문을 확산시켰다.
다른 문화에 대한 민족의 호기심은 고조되었다. 선진 문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서는 바다 한 가운데 고립된 섬나라 민족이 가지는 하나의 우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로운 선진 문화가 산업혁명의 위력과 자본주의 근대국가의 강력한 힘을 배경으로 온 것이었던 만큼 일본인의 대항심, 호기심을 이상할 정도로 고조시켰다. 메이지유신에서 보이는 지사들의 저 격렬한 행동, 항쟁하는 각파의 개국론과 양이론은 그 하나의 표현이다. 고행승과 같은 유학생들의 맹렬한 학습이나 잇따른 인민의 요나오시世直し 봉기도 이 흥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신정권 수립을 둘러싼 내란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역사상 메이지는 가장 극적인 시대이며 메이지 일본은 세계 문화사 연구에서 중요한 실험장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외국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이렇게 바라봤을 것이다. 이 작은 아시아의 후진 농업국이 중국에 앞서 근대화의 시련을 견딜 수 있을까. 엄혹한 국제 환경 속에서 이 실험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지금부터 110년 정도 전에 미국의 페리 제독 일행이 미개국 사무라이들에게 모형 기차를 선물로 가져와서 직접 시운전해 보인 광경을 우리는 알고 있다. 처음에는 겁에 질려 저만치 떨어져 보고 있던 일본인은 기관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괴성을 지르고 마른침을 삼키면서 뚫어지게 관찰하고 손을 대거나 올라타거나 하면서 하루 종일 싫증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 불과 100년 만에 일본인은 시속 200킬로미터로 안전하게 달리는 신칸센을 만들고 독자적인 힘으로 초특급 ‘히카리’호를 개발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최신 기술을 페리 제독의 조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지난날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선에 깜작 놀란 일본인은 그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살려 지금은 세계 제일의 조선 기술국이 되었다. 그 맹아는 이미 에도 시대 말기에 용광로와 반사로, 혹은 정밀한 측량 기술(이노 다다다카伊能忠敬의 일본 전도) 등을 제작하고 총포 제조와 목판, 인쇄 기술까지 개조한 일본인의 과학적 노력 속에서 암묵적으로 예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처사이며 근대 일본 문화의 전체 모습을 공평하게 묘사하는 데 방해가 된다. 국민총생산GNP과 수십 종의 공업 부문 가운데 몇 가지 첨단 공업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거나, 그 전제로서 일본 봉건 문화의 성숙을 찬미하는 따위는 현대 일본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일본인에게 유익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일본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평가를 통한 현상의 정당화나 합리화가 아니라 변혁을 위한 현상의 병리를 규명하는 일이며 전반적․본질적․구조적인 연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문제의식도 “기묘한 나라의 기묘함을 탐구한다”는 외국인 연구자의 호기심과는 다를 것이다. 현대 일본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자기 변혁을 위해 실천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이데올로기론자와 같이 문화를 단순한 계급 지배의 도구로 단정하는 입장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인류는 지배계급이든 지배를 받아 온 인민이든 제각기 생활을 영위하고 즐기는 형식을 개발하면서 살아왔으며 축제, 신앙, 기술, 의식주, 생활 행사에 이르기까지 그 삶의 보람으로서 정신적․물질적인 가치를 누려 온 것이다.
그러한 사회의 생활양식으로서 무의식중에 기능하고 있는 문화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은연중에 규정해 온 강력한 힘이었다. 그리고 항상 인간 행위의 잠재적인 지침을 이루어 온 것이었다. 예컨대 T. S. 엘리엇이 말했듯이 문화의 에스프리는 개별 창조자의 작품 속에 있다기보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계획의 무의식의 배경을 이루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물론 창작자 개개인의 작품을 경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미나가타 구마쿠스南方熊楠가 우지가미氏神나 신사神社가 민중에게 주는 정신적인 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언어, 문자, 논의로 표현하고 전승할 수 있는 것을 재래의 의식에 따라 말하거나 글로 남기지 않고 홀연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화하여 잊지 않는 것,”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고마움에 눈물이 흐른다”는 것과 같은 영험일 것이다.
문화나 사상은 민중의 근원적인 부분까지 침투하지 않는 한 본래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근대 일본에서는 ‘정신 구조로서의 천황제’가 그 저변의 심부까지 하강하는 데 성공하여 참혹한 독을 흘렸다. 아니 지금까지도 흐르고 있다. ‘메이지 문화’에 외국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종의 수수께끼가 있다면 그 대부분은 이 독특한 풍토 이데올로기의 정황에서 파생한 것으로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황제 문제는 이 책에서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주제가 되는 것이다.
2. 정신 구조로서의 천황제
‘정신 구조로서의 천황제’는 메이지 전기에 형성되어 후기에 완성을 보고 대다수 일본인들을 정신적으로 구속하였다. 파리에서 돌아온 우수한 조각가이자 반사회적인 자유 시인으로 알려진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1883~1956) 같은 지식인조차도 이 정신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롭기는커녕 그는 이 정신적 구속 때문에 반골과 고고한 자유를 관철한 그의 삶을 태평양전쟁의 시작과 함께 그르쳤다. 패전한 1945년 겨울에 자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생애를 성찰한 다카무라의 《암우소전》暗愚小傳은 그 반세기에 걸친 정신의 역사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파리에서 어른이 되었다.
처음으로 이성에 눈을 뜬 것도 파리.
처음으로 혼의 해방을 얻은 것도 파리.
파리는 별반 신기하지도 않는 얼굴을 하고
인류의 모든 종족을 받아들인다.
(……)
사람은 파리에서 숨을 돌린다.
근대는 파리에서 일어나고
미美는 파리에서 숙성하고 싹트며
두뇌의 새로운 세포는 파리에서 태어난다.
프랑스가 프랑스를 넘어서 존재한다.
이 끝을 알 수 없는 세계의 수도 한 구석에 있으면서
나는 가끔 국적을 잊었다.
고향은 멀리 떨어져 작고 초라하며
시끌벅적한 시골 같았다.
나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조각을 배우고
시의 진실에 눈을 뜨고
그곳의 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문화의 내력을 발견했다.
서글픈 생각에 옳고 그름도 없이
비할 데 없는 낙차를 느꼈다.
일본의 모든 사물과 국가의 품격을 송두리째
그리워하면서 부정했다.
1908년의 일이다. 귀국한 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인간이기를 허락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그 결심은 반역”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격렬한 퇴폐주의에 빠져 도쿄 한 가운데에서 칩거 생활을 하면서 같은 고독으로 결합한 “지에코智恵子와 단 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생활과 고투하고” 이상한 “내적인 세계의 꿈”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차단된 상태에서 내부 생명만을 뒤쫓는 생활은 지에코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내는 죽고 말았다. 텅 빈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존재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뒷받침 없는 문종이처럼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이때 그는 되물었다.
선전포고보다 먼저 들은 것은
하와이 부근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일이다.
이윽고 태평양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다.
조칙을 듣고 몸을 떨었다.
이 쉽지 않은 순간에
내 두뇌는 란비키(에도시대 술을 증류하는데 쓰던 도구옮긴이)에 걸려
어제는 멋 옛날이 되고/먼 옛날이 오늘이 되었다.
천황 위태롭다
그저 이 한 마디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기에 있었다.
어릴 적 집의 운무雲霧가
방안에 가득 찼다.
내 귀는 조상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폐하가, 폐하가 라고
헐떡이며 의식은 희미해졌다.
지금은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다.
폐하를 지키자.
시를 버리고 시를 쓰자.
다카무라는 일본문학보국회 같은 종류의 모임에 동분서주하면서 지쳤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하고 그의 화실도 공습으로 불에 탔다. 그는 도호쿠東北 지방 산간에 있는 한촌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그 산림에서 자신의 ‘백조의 노래’를 들은 것이다.
화실이 완전히 타 버리고
나는 오슈奥州 하나마키花巻로 왔다.
거기서 저 라디오(천황의 항복 방송)를 들었다.
나는 단정하게 자리하고 앉아 몸을 떨었다.
일본은 이윽고 벌거숭이가 되고
인심은 떨어져 바닥을 쳤다.
점령군에게 기아에서 구원받고
간신히 멸망을 모면하고 있다.
그때 천황은 스스로 나아가
나는 현인신現人神이 아니라고 했다.
날을 거듭하면서
내 눈에서는 대들보가 떨어져 나와
어느새 60년의 중하가 사라졌다. 다시금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 멀리 열반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탈각 이후에
오직 인간으로서의 사랑이 있다.
(……)
이 글에는 근대 일본의 지식인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정신 편력의 흔적이 있다. 그것이 너무도 순수하고 소박하기에 극단적인 전향이라고 말들 하지만 실은 바로 여기에서 ‘천황제와 지식인’ 사이에 있는 상징적인 관계의 축소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사상사에는 예를 들면 193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진보적인 지식인의 ‘대규모 전향’이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천황제라는 권력이 그들의 사상을 굴복시켰다는 사실을 넘어 지식인 내부에 침투하고 있던 사상의 병이 그것을 기회로 입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혼의 병이 그들의 내면세계로 스며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언제쯤 형성되고 어떻게 해서 대립하던 여러 사상을 압도하여 일본의 지식인과 민중의 피부 감각 내부까지 침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카무라 고타로의 고백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적인 감화력을 획득하여 패전 이전까지 일본인의 모든 정신을 뒤덮듯이 구속하고 ‘60년의 중하’가 되었다. 그 원인의 비밀을 ‘메이지 문화론’은 당연히 밝혀야 할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가 일찍이 “천황제는 모든 정신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는 – 저자) 방법을 다른 곳에서 빌려와서는 안 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화하고 초월적인 것을 현세적인 것으로 바꿈으로서 천황제를 병립하는 가치의 하나로 만드는 것, 이것이 인식의 내용이며 벗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이지만, 이를 위한 방법은 자생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로 교훈에 가득 찬 지적이라고 생각한다.1)
천황제가 복합적인 가치 체계로서, 체계라기보다도 ‘제반 가치를 상쇄하는 일종의 장치’로서, 아니 민중의 의식 세계를 기체처럼 감싸는 괴물 같은 존재로서 확충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말기 이후, 다이쇼, 쇼와 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천황제 사상이 민중의 발상 양식을 규제할 정도로 위력을 떨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역시 그 나름대로 상극의 역사와 지그재그의 자기 형성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민중 의식의 연구를 통해서 근대 천황제 사상을 낳은 정신 구조를 찾아가다 보면 뜻밖에도 폭넓은 가능성을 품은 막말 변혁기의 민중사상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천황제를 낳은 원초적인 구조이자 동시에 천황제와는 무관한 갖가지 해방 환상(예를 들면 미륵 신앙, 요나오시 사상 등)이나, 천황제와 길항하는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 (덴리교 교조─옮긴이)와 같은 이들의 변혁적인 종교 사상을 낳은 원천적인 구조이기도 했던 것이다.
막말 유신기에는 그러한 변혁적인 민중의식을 낳은 원초적 구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원초적 구조에서 A, B, C, D, E……와 같은 몇 가지의 다른 발전 방향성을 띤 의식과 사상이 싹트고 형성되어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뒷날 위력을 떨치는 천황제 사상도 그 과도기에는A, B, C, D, E……가운데 하나뿐이었으며 타자에 의해 충분하게 대상화되고 극복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세계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에서 에도 막부에 대신하여 미력한 조정 세력이 신국가의 요체로서 재생되는 비상사태가 출현했을 때, 이제까지는 이 원초적 구조가 낳은 몇 가지 구성 요소의 하나에 지나지 않던 천황제 사상의 인자가 유신의 지고한 정치적 요청과 결합하여 비로소 다른 요소를 제압할 수 있는 우성 인자로서 등장하고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성립하고 군림할 수 있었던 천황제 사상(A)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초적 구조로 되돌아가서 먼저 A를 B, C……로 상대화하고 내부로부터 부정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일단 천황제를 부정한 다음에 비로소 원초적 구조들을 극복하고 지양하는 정신 혁명의 과정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하게 서구 시민사회가 낳은 개인주의 근대 사상으로 일본 민중의 의식 변혁을 꾀하는 것은 공허한 모더니즘에 빠져 거의 절망이나 독선으로 끝나 버리는 것을 우리는 수차례나 쓰라리게 경험해 왔다.
민중사상의 연구가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파묻힌 민중의 변혁 계기를 발굴하여 B에 의해 A를 상대화하고 C에 의해 B를 부정하는 창조적 계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의거한 연구를 통해서 근대 일본에서 민중사상의 형성(변혁) 과정은 지식인이 경험하는 사상 형성의 과정과는 법칙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것이며, 그것을 상호 간에 이해할 수 없었던 점에 커다란 불행이 있었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대단히 과감한 가설일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별도의 저서에서 상세하게 논증하려고 준비하고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여기서도 사례를 들어 언급하고자 한다.
3. 문제의 범위와 전망
원래 ‘메이지 문화’를 전체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도저히 개인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먼저 문제의 윤곽과 그 전망을 제시하고 다루어야 할 주제를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메이지라는 것은 세계 문명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천수백 년에 걸쳐서 대륙의 세계 국가에 편입되지 않고 ‘섬나라 독립국의 문화’를 유지해 온 일본에 19세기 중반 서구가 내던진 심각한 충격은 어떤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것은 메이지 일본이 세계 문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서구의 충격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사례는 후진국 일반의 모델로서는 너무도 특수하다.
예를 들면 같은 근대 서구 문명과 접촉한 방식에서 보더라도 일본이나 러시아처럼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한 국가와 식민지나 종속국이 되어 접촉을 강요당한 국가 사이에는 그 수용과 반항의 유형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그 수용이 비교적 용이하고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발전 등에 이용할 수 있었던 반면, 외래문화와의 대결이 불충분하여 경박한 모방과 혼란의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후자에 속하는 중국과 인도, 아랍 세계 등에서는 외래문화와 토착문화의 철저한 대결이 계속되면서 내적인 사색을 통해서 격렬한 저항 정신과 자기 정립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 중국의 쑨원이나 루쉰 같은 인물은 그러한 민족의 심성을 집약하고 있으며 서구 ‘문명’의 허위의식에서 각성한 눈으로 자국의 문화와 민중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독립국이었느냐 식민지였느냐 하는 것만으로 여러 민족이 보이는 대응의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 국가와 민족이 세계사의 어떤 단계에서 서구 열강에 개국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면 1840년대 초에 개국을 강요당한 중국, 1850~1860년대에 개국한 일본, 1870년대 후반에 개국한 조선 사이에는 그 자립의 가능성이 전혀 달라진다. 이 국가들 가운데 일본만이 서구 열강의 상호 견제나 인도와 중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중 반란의 에너지를 자국의 독립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국가들이 개국하는 시점에서 각각 민족의 자각과 문화의 축적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예속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하나의 주체적인 조건이 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난숙기에 도달해 있던 근세 문화와 란가쿠蘭學의 유산이 있으며, 그것이 널리 보급되고 있던 교육이나 민중 자신의 새로운 정신적인 자기규율과 재야에까지 미친 지사적인 기개와 결합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대망의 정열과 뒤섞여 대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전제조건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홍수와도 같은 신문화의 유입을 맞이하여 어떻게 변모했는지, 그리고 거기서 ‘메이지 문화’로서의 어떤 새로운 질을 낳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도 시대에는 맹아의 수준에 그치고 있던 것이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일본인이 손에 잡을 수 있었던 새로운 질의 것, 그것을 ‘메이지 문화’ 속의 근대적인 ‘요소’라고 부른다면 과연 어떤 것을 들 수가 있을까. 첫째로 기본적 인권에 대한 명확한 감응일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적 자각은 특히 1880년대의 자유민권운동 속에서 국민들 사이에 하나의 물결이 되어 나타났다.
둘째는 자아의식 등과 같은 개인주의적인 각성일 것이다. 이것은 다카무라 고타로의 시에서도 보았듯이, 무엇보다도 서구와의 접촉과 기독교적인 관념을 통해서 특히 사족층과 지식인들 사이에 각성되었다.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도 다카무라처럼 예리한 통찰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무라’村와 ‘이에’家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완만한 자기의식으로서 자아의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자본주의적인 요소일 것이다. 물질적인 가치관, 공리주의, 기술주의 등이 점차 낡은 정신주의닥인 가치관을 대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현저한 형태는 유교 윤리와 무사도 정신의 퇴조로 나타난다.
넷째는 민족적․국민적 자각이 사회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강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면에서는 서구의 그것과의 대비를 통해서 일본미를 재발견하고 일본인의 도덕관념과 전통, 인생관을 재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카쿠라 덴신 등의 새로운 일본미술 운동, 고다 로한幸田露伴 등의 국풍 문학,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의 민속학,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와 구가 가쓰난陸葛南 의 국수주의 등이 그러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서구와의 대결이 자국의 제국주의 코스를 용인함으로서 인도나 중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철저한 엄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로 인하여 안이한 화양절충和洋折衷, 동서 문화의 융합에 빠져 다원적인 잡거 상황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네 가지 요소(자아, 민주주의, 자본주의, 내셔널리즘)는 근대 일본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적용되는 근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어떤 내적인 관련을 통해서 나타나는지 그 관련성과 모순 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이 일반 이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첫째와 둘째 요소는 자유민권운동의 좌절과 함께 그 발전이 저지되고 셋째와 넷째의 성격을 왜곡된 것으로 규정하게 되는데, 메이지의 경우에는 그 모순 구조의 초점이자 결절점으로서 ‘천황제’ 문제가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종종 메이지 문화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기본적인 지표로 불리는 a. 절충성, b. ‘이에’ 의식, c. 토착성, 지연성, d. 내셔널리즘, e. 공공성․시민적 성격의 결여 등의 특성은 궁극적으로는 ‘정신 구조로서의 천황제’와 관련지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황제’의 형성 과정과 그것이 국민들 사이에 침투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가 중요한 것이며, 나아가 이를 초월적․숙명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내측에서 상대화하여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민중의식의 지하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민속학과 종교사, 사회학, 풍토론, 인류학 같은 인접 과학의 성과가 필요하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배워야 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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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竹内好,〈権力と芸術〉1958.4(《竹内好評論集》第2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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