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k 1 - Track 1
기름 짜는 기계로 음반을 제작하다
현재 젊은이들은 과거의 음악매체였던 LP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휴대도 불편하고, 들으려면 여러 가지 고가의 기계가 필요하며, 다루기도 까다롭기 때문이다. LP는 1980년대부터 아파트 주거생활이 일반화되면서 깔끔한 생활양식에 걸맞은 CD(1986년 생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LP의 몰락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아예 음반을 사지도 않고 인터넷으로 다운받은 음악을 책상 위의 조그만 컴퓨터 스피커로 듣게 된 것이다.
거대한 덩치의 오디오와 LP를 통해 하이파이 사운드를 즐기던 LP 수용자들은 이런 현상을 음악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독’은, 수백 곡의 음악을 MP3플레이어라는 라이터만 한 디지털 재생기로 듣거나 아예 허공으로부터 다운받아서 핸드폰으로 듣는 젊은이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음향은 인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연구도 있어 아날로그 음악의 장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음반제작
일제강점기에 유성기라는 것을 처음 접한 한국인들은 마치 외계인이나 만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커다란 나팔 같은 기계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니 어린애의 목을 잘라넣었다는 둥, 레코드에 소리를 집어넣으면 수명이 짧아진다는 둥의 허무맹랑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던 시절에 한국에서도 음반제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98년의 한 발견은 한국인 최초의 음악녹음 역사를 1896년으로 끌어올렸다. 미국의 음악학자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가 미국의회도서관에서 한국인의 음성이 최초로 녹음된 음원을 발견한 것이다. 유학생 안정식, 양손, 이희철이 미국에서 취입한 에디슨 원통형 음반으로, <아리랑> <매화타령> <자장가> <달아 달아> <애국가> 등 열한 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국 음악인의 녹음이 담겨 있는 최초의 음반상품은 1907년 미국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발매된 쪽판(한 면에만 녹음된 음반)이다. 모두 국악으로서 경기 명창 한인오와 관기 최홍매의 민요, 가사, 시조 등이 담겨 있다. 이때 만들어진 레코드를 SP판이라 부르는데, 분당 78회전을 하는 직경 10인치짜리의 음반으로 셜랙shellac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져 무겁고 깨지기도 쉬웠다. 한 면당 3분 정도의 곡이 수록될 수 있어서 한 음반에 두 곡을 겨우 담을 수 있었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영미에서 레코드 제작판권을 얻어낸 일본의 기업들은 서울에 지사를 두고 본격적인 레코드 제작과 판로를 개척했다. 콜롬비아, 빅터, 포리돌, 일본 제축帝蓄, O.K. 태평, 기타 군소업체들이 서울에 한국지사를 설치, 본격적인 기업으로 성장해나갔다. 기록에 의하면 1935년경 한국의 축음기 보급은 35만 대를 넘어섰고 한국에서 판매된 레코드(SP레코드) 매수는 100만 장 정도였다 한다. 그중에 한국인을 상대로 한 레코드는 한 달 평균 30만 장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렇게 레코드 산업이 호황을 누렸지만 서울에 녹음실을 설치한 곳은 1937년 O.K.레코드사뿐이었고, 1940년대에 포리돌, 콜롬비아 등이 간이녹음실을 설치했었으나 이때는 태평양전쟁에 휘말려 모든 물자부족 현상으로 인해 유명무실한 녹음실이 되고 말았다.-《한국대중연예사》, 황문평, 부루칸모로, 1989, 339쪽
해방 이후의 척박함을 헤쳐나가다
위의 기록을 적용하면 1935년 당시 도시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사람이 축음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들은 한 달에 한 장 정도의 음반을 구입한 셈이 된다. 음반산업이 그 나름대로 꽤 호황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생적인 수용과 발전이 아니었기에, 해방이 되자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음반 제작시설도 기술자도 없는 상태에서 음반을 만들어야 했다.
참으로 다행히도 한 곳에 아직 조립을 하진 못했지만 레코드 취입에 필요한 기계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레코드 회사들은 그들이 제 나라에서 우리 가수들의 노래를 취입・제작해왔지만 ‘만주다’ ‘중국이다’ 하고 그 레코드 판매지역이 넓어져감에 서로 다투어 우리나라나 만주에 레코드 제작소를 설치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중 하나인 오사카에 있던 기꾸(국화)레코드사란 회사에서도 우리나라에 그 지점을 두기 위해 영등포에 취입기계를 설비하던 중에 해방이 된 것이다. 이 기계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레코드 취입기계였다. 그것을 지금 ‘음악사’를 경영하고 있는 최성두 씨가 인수받아 동대문 밖 마장동에 공장을 지어놓고 고려레코드사를 창설하였다. 이것이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생겨난 레코드 회사이다.(…) 기계시설은 그런 대로 되었다 하겠지만 첫째 그 기계를 만질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레코드 취입은 전부 일본의 공장에서 일본 기술자들이 해온 터라 녹음이나 제작을 완전히 마스터한 기술자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레코드의 간부들은 그간 주워듣고 또한 등 너머로 보아온 지식과 또 무슨 발명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취입과 제작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때는 녹음테이프가 채 나오지 않았던 때라 직접 원반에다 취입을 했다. 우선 필요한 것이 그 원반 30~40장이었다. 원반은 두께가 5cm쯤 되는 왁스판을 썼는데 이 왁스판이 아주 평평하고 조금이라도 높고 낮고 하면 안 되었기에 녹음기사는 면도칼로 왁스판을 한 장 다듬는 데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노력을 해야 했다. 이렇게 만든 왁스판을 기계에 놓고 마이크에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 기계동작에 의해 녹음이 되는데 만약 가수가 실수하거나 밴드맨이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다시 할 경우 그 왁스판은 버리고 다시 새 원반으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아리랑》, 1965. 5. 214~216쪽
위의 기록으로 보면 해방 이후 최초로 음반을 제작한 곳은 고려레코드로 보인다. 기계조립을 끝내고 회사 창설 1호 음반을 대중가요로 하기에는 명분이 서지 않아, 해방을 맞이한 삼천만 동포가 널리 부를 수 있는 애국가와 대한의 노래를 출시했다. 이어서 1948년경에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을 시대에 맞게 출시했다.
이즈음 전국 각지에서 레코드사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1947년경 야인초가 부산 대평동에서 코로나레코드를 설립하여, 1948년경 김인숙이 노래한 《부산 블루스》를 출시했다. 그리고 1948년경 서울 명동에 본격적인 녹음실을 마련한 럭키레코드는 일본 노래가 들어 있는 헌 레코드를 회수해서는, 프레스기계가 없으니까 기름 짜는 기계를 가지고 손으로 눌러서 음반을 제작했다. 그렇게 만들었던 현인의 《신라의 달밤》은 대히트를 기록했다.
전쟁도 막지 못한 음반제작의 열정
어렵게 꾸려나가던 음반업계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기회가 된다. 1951년 1・4후퇴로 부산에 내려간 가수이자 작곡가 한복남은 축음기 바늘 장사로 연명하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기계를 만나게 된다. 바로 리베라, 암펙스 같은 미제 녹음기였다.
이때까지 음반 취입은 왁스를 바른 원판에 가수의 노래가 바로 녹음되는 직접커팅 방식이었다. 문제는 원판의 비용은 비싼데 한 번만 녹음할 수 있는 방식이다 보니 여러 번 녹음해서 좋은 원판을 만든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신인이라면 한 번의 실수는 곧 죄인임을 자처하는 것이어서 사장의 눈치를 보느라 진땀을 흘렸다. 남인수와 같은 정상급 가수는 완벽을 추구하기로 유명했는데 사장이 그쯤이면 됐다고 할까봐 마음에 들지 않는 녹음은 일부러 실수해서 원판을 소모시키곤 했다. 사장은 이 장면을 보면서 톱스타라 말리지는 못하고 열이 받쳐 줄담배만 피울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복남은 녹음기를 사들여 왁스판 방식이 아닌 자기테이프 방식으로 음반 취입을 시도할 생각을 했다. 1952년 부산 남부민동에서 도미도레코드를 설립한 그는 원활한 대인관계와 말솜씨를 동원해 동회사무실을 야간에만 빌렸다. 그러고는 쌀가마니와 미국 담요를 둘러쳐 대충 방음을 하고 밤새워 녹음을 했다. 문제는 전시라서 음반의 재료와 생산시설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고물음반 1,000장과 압축기를 사들였고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서 원판시설을 구해 금사향의 《홍콩아가씨》와 박재홍의 《물레방아 도는 내력》을 1954년경에 출시했다. 이렇게 1954년 한복남이 한국에서 최초로 마스터 녹음테이프에 의한 음반 취입의 장을 열었다.
수도가 부산에 있던 전시에는 자연히 부산과 대구가 음반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구에는 1948년경 작곡가 이병주가 만든 오리엔트레코드, 그리고 김연중과 가수 백년설이 만든 서라벌레코드가 존재했다. 오리엔트레코드는 1952년 신세영의 《전선야곡》을 출시해 전선에서 가장 많이 불린 ‘진중陣中가요’의 대표작을 만들어냈다. 부산에는 1952년 한복남이 설립한 도미도레코드와, 제물포 악기점을 경영하던 김흥산이 출자하고 손영준이 기획・제작한 스타레코드가 있었다. 스타레코드는 부산HLKB(부산방송국) 녹음실을 이용, 야간작업을 해서 1954년경 박단마의 《슈샤인보이》를 출시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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