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스무 살에, 나는 포탄을 맞았다. 내 몸은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는 우선은 내 몸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내 불구가 현실이 되면서, 나는 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상처받은 나는 이미 내 상처가 되어 있었다. 살덩이로 나는 살아남았다. 살덩이는 내 욕망들의 수치였다.
나라는 존재는 절단으로 이미 축소되었는데, 날 죽여야겠다는 결심은 추억처럼 되살아났다. 불행이 제아무리 많아도 불행을 느낄 감각조차 없으면 고통스럽지 않다. 감각적 쾌락을 좇는 내 영혼 탓에 나는 내 협소한 삶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고 말았다. 감각이 없어지게 되었으나 생각하는 대신 느꼈다. 남자로서의 내 삶은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내 불구를, 나를 구했다. 나는 여자처럼 살았다. 정신을 잉태했고, 정신을 내 감각들로 젖 먹이었다.
나를 망가뜨린 사건을 부조로 모두 새기는 데 수년이 필요했다. 그 순간은 두 문 사이에 끼여 있다. 날 경색시켜 고통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시간, 모든 것이 날 떠났다. 한 인간의 폐허는 그가 잃어버린 것에 따라 가늠되는 게 아니라, 그가 어떠한가에 따라 가늠된다. 내 정신적 폐허는 깊고도 깊다. 내 의식은 내 위대한 불운에 맞먹는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전장에서 빼냈다. 내가 누워 있는 텐트 천의 가장자리를 잡고, 침착하고 재치있게 땅의 기복을 이용하였다. 눈빛을 교환하며 잎이 우거진 곳 밑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화염에서 이송되어온 내가 충격에 정신을 잃지 않도록 그들은 온 정성을 다했다. 나는 내 죽은 장화를 보았다. 내 몸은 나와 함께 있었으나 죽은 개였다. 삶을 다 싣기에 추억은, 감각은 역부족이다. 동료의 목소리는 이제 목소리에 불과했다. 발걸음은 이제 발걸음의 소리에 불과했다. 전혀 다른 밤, 침묵이 만들어졌으므로 접근할 수 있는 밤. 내 침묵을 맞아주고 내 침묵과 하나 되게 하는 그 밤.
시간이 흘렀다. 잠을 자는 시각에도, 그 외면된 시각에도 태양을 보는 것이 두려워 내 심장은 급하게 뛰었다. 새벽빛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지웠다 하는 새벽 4시, 나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고, 밤의 요를 덮었다. 꿈속에서, 깃털이 눈부신 꿩을 보았다. 아침이었다.
내 고통은 우선은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는 내적 평온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 진짜 고통이 왔다. 내 무능함 때문에 생긴 부조리한 기쁨에 두려움의 그림자가 이어진다.
그 황홀을 깨는 게 두려워 나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토록 깊이 잘린 인생이라면 나는 내 자유를 다시 만들고 싶었다.
내 불구가 내 존재를 먹이 삼는 것을 받아들이며, 시간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아서 처분하기로 했다.
나는 내 성격을 바꾸고, 내 기질을 훼손하고 싶었다. 나는 충격으로 인한 치명적 결과들을 피하려 했다. 나의 탄생으로 가능해진 것들을 모두 의심했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나는 나를 문화-존재로 바꾸었다.
내 단점이 눈에 보였고, 나는 그것을 맹목적으로 느꼈다. 내 경험이 나를 죄책감으로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나는 그 죄책감을 더욱 고집스럽게 추구하였다. 죄책감으로 자책이 생기면 나는 그 자책을 열렬히 추구하였다.
자책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자격지심을 피하기 위해 나는 더욱 노력했다.
어느 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친구들의 눈 속에 나는 없었다. 나는 한 버려진 남자의 분노를 느꼈다. 효과적인 구조 활동을 절대 할 수 없는 남자. 위험에 처한 의식을 가서 도와줄 수 없는 유약한 개체. 나는 그런 자였다. 내가 만들어놓은 형국 때문에 경험을 심화할 수 없어 몹시 불행해진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다 포기했으나 포기만큼은 포기하지 못했군.” 자유롭다는 느낌에 나는 절망했다. 건너갈 대안 앞에서도 내 정신은 아주 무심했고, 이런 나는 심각한 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닌가? 나는 나를 생각에 굴복시키며 불타오르다가도 생각이 아닌 현실에서 내가 보이면 기분이 울적해졌다. 불확실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생각에 어떤 내용물을 줄 것인지 나 자신에게 열렬히 물었다. 나를 보며 울지 않고도 날 해방시킬 수 있는 세계는 없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 한다. 이 말은 아는 것을 다시 새롭게 알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는 것을 늘여 자신에게까지 다 펼쳐놓고 싶다는 뜻일까?
사람은 누구나 실존은 그 자체에 특별한 경험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실존 자체는 아는 능력이 없다. 실존하면 되었지 알아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존은 빼앗긴 것을 더 알게는 해준다.
그렇다면 실존하는 것이 아는 것의 궁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너 자신을 알라. 누군가 너에게 요구할 때, 그것은 너라는 인간을 뒤덮고 있는 밤을 파헤쳐보라는 말일 것이다. 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면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의 속까지 파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기 개성 속에 감추어져 있다. 각자 삶에 대한 개념이 있지만 정작 없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시각이다. 실존이 흘러갈 때 무엇인가가 덧붙는다면 상상력이 임의대로 발휘되도록 극단의 노력을 다할 때뿐이다. 그럴 때 ‘나’는 단순히 존재의 산물은 아니다. 이 개념화된 ‘나’에서는 생각이 이 산물적 존재의 경쟁자다.
육신-존재는 의식에서 떨어져 나간 파국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무들 틈에서, 더 이상 어떤 것으로 나뉘지 않는 이 ‘나’라는 시험 대상을 자기 구조 안에 가둬놓고 있는 온갖 보이는 물체들 틈에서 ‘나’는 이 육신-존재 때문에 전율한다. 정확한 인물 형태가 늘 그 앞에, 혹은 그 뒤에 있기를 바라며 영원한 꿈을 꾼다.
선고받은 자로서의 그를 말해야 한다. 가끔은 그에게서 말을 제거해야 한다. 그 인물에게서 자기 희망이었던 것을 잘라내지 않는 이상 그를 잘 모를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