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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술과 문장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두 가지가 아니니, 육경六經은 모두 성인聖人의 문장으로, 사업에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 문장을 짓는 사람은 경술에 근본할 줄 모르고, 경술에 밝은 사람은 문장을 지을 줄 모른다. 이는 습성이 편벽되어서일 뿐만 아니라 이것을 하는 사람들이 노력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의 문사文士는 모두 시를 업으로 삼았는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성리학을 창시했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매헌梅軒 권우權遇 형제가 경학에도 밝고 문장에도 능했는데, 양촌은 사서와 오경의 구결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錄》,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의 책을 지으니 사문(斯文)에 도움이 된 공로가 적지 않다.
그 후 스승의 직무를 맡은 사람은 황현黃鉉·윤상尹祥·김구金鉤·김말金末·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알려진 바가 없고, 윤상은 경술에 가장 뛰어났는데 문장을 조금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문장과 경술 모두에 뛰어났는데, 김말은 고루하고 답답함을 면치 못했다. 두 사람은 평소 서로의 견해를 겨루며 우열을 다투어 그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도 둘로 나뉘었다. 두 사람 모두 세조에게 인정받아 관직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이 되었다가 연로해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서 굶어죽었다.
또 그다음 가는 사람으로 공기·정자영鄭自英·구종직丘從直·유희익兪希益·유진兪鎭이 있다. 공기는 익살스러워 이야기는 잘했지만 글 짓는 일에서는 비록 짧은 편지尺牘처럼 사소한 글 단 한 마디도 쓰지 못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생원 김순명金順命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말해주는 대로 답장을 썼는데, 그 표현이 매우 적절했다. 공기가 감탄하며 “자네의 학문은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자네는 잘 쓰고 나는 잘 쓰지 못하니 청출어람이로세!”라고 했다. 정자영은 오경五經뿐만 아니라 역사서도 두루 섭렵했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특별해 세조에게 발탁되었는데,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유희익은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유진은 매우 고집스러워 사리에 통달하지 못했다.
근래에는 노자형盧自亨·이문흥李文興이 있는데, 오랫동안 성균관에 있었다. 성종께서 연로함을 우대해 마침내 당상관에 올렸으며, 뒤에 모두 낙향해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2 우리나라의 문장가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崔致遠에게서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뒤 문명文名을 크게 떨쳐 지금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이제 그가 지은 작품을 살펴보니 비록 시구에는 능하지만 뜻이 정밀하지 못하고,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나지만 말이 정돈되지 못했다. 김부식金富軾은 풍부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정지상鄭知常은 화려하지만 드날리지 못했다. 이규보李奎報는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수렴하지 못했고, 이인로李仁老는 정련되었으나 펼치지 못했으며, 임춘林椿은 세밀하지만 온화하지 못했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적실하게 들어맞지만 재주가 부족했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은 노련하고 웅건하지만 꾸밈이 부족했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은 온화하지만 장대하지 못했고, 포은 정몽주는 순수하지만 긴요하지 못했으며,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장대하지만 단속團束하지 못했다.
세상에서는 “목은 이색이 모든 것을 집대성하니 시와 산문이 모두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비속하고 엉성한 형태가 많아서 원나라 문인의 격률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당나라와 송나라의 경지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양촌 권근과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은 비록 문형文衡(대제학)을 맡았으나 모두 이색에게 미치지 못했으며, 변계량은 더욱 비루했다.
세종께서 처음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들을 맞아들이니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 영성寧城 최항崔恒, 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謹甫, 류성원柳誠源, 太初, 이개李塏, 伯高, 하위지河緯地, 仲章 같은 자들이 모두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성삼문은 문장은 호방하지만 시를 잘 짓지 못했다.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뛰어났지만 시를 잘 몰랐다. 류성원은 뛰어난 자질을 일찍부터 갖추었지만 견문이 넓지 못했다. 이개는 맑고 빼어나며 시 또한 정밀하고 뛰어났다. 동료들은 모두 박팽년을 ‘집대성’이라 추대하며, ‘그의 경술·문장·필법이 모두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 작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최항은 사륙문에 정교했고 이석형은 과거科擧 문장에 능했으며, 신숙주만이 문장과 도덕으로 당대에 존경받았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달성達城 서거정徐居正, 영산永山 김수온金守溫,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 양성陽城 이승소李承召, 복창福昌 김수녕金壽寧과 우리 백형뿐이다. 서거정은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시를 지을 때 오직 한유韓愈와 육유陸游의 체재만을 본받았다. 손길 따라 나오는 작품마다 아름답기 그지 없었으며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김수온은 책을 읽으면 반드시 외웠으므로 문장의 체제를 얻었는데, 그 문장이 호방하고 웅건해 그와 예봉銳鋒을 겨룰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잘 단속하지 못하는 성품이라 시의 압운이 잘못된 곳이 많아 격률에 맞지 않았다.
강희맹은 시와 산문이 전아典雅하고 천기天機가 완숙해 여러 사람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뛰어났다. 이승소는 시와 산문이 모두 아름다워 마치 솜씨 좋은 장인이 아로새긴 것처럼 자연스러워 손을 댄 흔적이 없는 듯하다. 우리 백형의 시는 만당晩唐 시의 경지를 얻어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다. 김수녕은 좋은 자질이 일찍부터 갖추어졌는데, 반고班固를 모범으로 삼아 문장이 노련하고 웅건했다. 일찍이 《세조실록》을 편찬했는데, 대부분의 서사敍事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 여러 사람이 모두 문학文學으로 명성을 떨치니 당대의 문학이 찬란하게 빛났다.
1-3 우리나라의 서예가
우리나라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많지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적다. 김생金生은 글씨를 잘 썼는데 섬세해 아주 작은 글자도 모두 정밀했다. 행촌杏村 이암은 조맹부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필력은 그와 대적할 만하나 행서와 초서의 종횡무진함은 조맹부에게 양보해야 한다. 류항柳巷 한수韓脩도 유명한데 진晉나라 서법을 깊이 체득해 서체가 강건하다. 그가 쓴 〈현릉비玄陵碑〉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은 서체가 곱고 세밀할 뿐이지만 팔순에 〈건원릉비健元陵碑〉를 썼는데도 그 필력은 쇠약해지지 않았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서체는 오로지 조맹부를 모방했는데, 호탕함은 그와 서로 우열을 겨루며 늠름하게 날아 움직이는 듯하다. 일찍이 시강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는데, 안평대군이 편액에 쓴 두 글자를 보고 “이것은 범상한 솜씨가 아닙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세종께서 안평대군에게 가서 예겸을 만나보라고 명했다. 예겸은 그를 흠모하며 “지금 우리나라에서 학사學士 진겸陳謙이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왕자와 비교하면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더욱 예모를 갖추었고, 마침내 안평대군의 글씨를 받아가지고 갔다. 그 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글씨를 사가지고 왔는데 바로 안평대군의 필적이었다. 안평대군이 매우 기뻐하며 의기양양해했다.
당시 선비 최흥효崔興孝는 유익庾翼의 서법을 본받아 글씨를 잘 쓴다고 자부했다. 항상 붓주머니를 지니고 여러 관아와 대갓집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붓을 휘둘러 글씨를 써주었는데 글자체가 거칠고 비속했다. 안평대군이 그를 초청해 글씨를 써보게 한 뒤 마침내 찢어 벽에 발라버렸다.
우리 백형은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과 더불어 당대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강희안은 본래 글씨 쓰기를 꺼리는 성품이라 그의 필적은 세상에 드물게 전한다. 백형은 병풍과 족자를 많이 썼는데, 그가 쓴 〈원각사비圓覺寺碑〉는 특히 오묘한 경지에 들어 성종께서 그 필적을 보시고 “잘 썼도다. 명성이 허투루 얻어지지 않았도다!”라고 했다. 정난종은 글씨에 공력을 많이 들였고, 글씨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꺼리지 않고 써주어서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많다. 그러나 서체가 유약하고 물러서 볼 만한 것이 못 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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