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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케임브리지에서 북동쪽으로 45분 거리에 내가 지독히 사랑하게 된 풍경이 있다. 습지대에서 메마른 모래땅으로 뒤바뀌는 곳. 뒤틀린 소나무, 고장 난 차, 엽총 자국이 숭숭 난 도로 표지판 그리고 미 공군 기지가 있는 곳. 그곳에서는 유령도 출몰한다. 소나무 삼림 보호 구역 안쪽의 스러져 가는 집들. 3미터 50센티미터쯤 되는 담장 뒤 잔디 입힌 봉분 안에는 공중 살포용 핵무기를 보관하려고 지은 공간이 있고, 문신 업소, 미 공군 골프 코스도 있다. 봄이면 비행기 오가는 소리, 콩밭에서 가스총 쏘는 소리, 숲 종다리가 지저귀는 소리, 제트 엔진 소리로 시끄럽기 짝이 없는 곳. 사람들은 이곳을 브레클랜드─브로큰 랜드(‘망가진, 끊긴 지대’)─라고 부른다.
7년 전 이른 봄날 아침 내가 찾아갔던 곳이 바로 거기다. 예정 없이 떠났다가 결국 그곳에 이르고 말았다. 그날 새벽 5시, 나는 누워서 천장에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바깥 인도에서 밤새 파티를 하고 돌아가는 연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피곤하고 초조했다. 두개골에서 뇌를 빼낸 자리에 전자레인지용 은박지 같은 걸 넣은 듯 불쾌했다. 검게 그을리고 오그라든, 불꽃이 튄 은박지. ‘음, 나가야 해. 밖으로!’ 나는 이불을 젖혔다. 청바지와 점퍼 차림에 부츠를 신었고, 뜨거운 커피를 삼키다 입이 데었다. 얼어붙은 고물 폭스바겐을 몰고 A14번 도로를 반쯤 달린 뒤에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왜 가는지도. 저 멀리, 뿌연 앞유리와 하얀 선 너머에 숲이 있었다. 끊긴 숲. 바로 그곳에 참매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사실 참매를 보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참매는 까다롭다. 매가 뒷마당에서 새를 잡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쯤은 안다. 증거가 있다. 테라스 판석 위에 나뒹구는 작은 조각들. 힘줄 부위에 발이 단단히 달려 있는, 벌레처럼 생긴 명금鳴禽의 작은 다리. 아니면─그보다 더 무시무시한─탈구된 부리가 놓여 있다. 이것은 집참새의 윗부리거나 아랫부리다. 작은 원뿔처럼 생긴 투명하고 불그스름한 암회색 부리에 위턱의 깃털 몇 개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아마 여러분도 창밖으로 힐끗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잔디밭에서 무섭고 커다란 매가 비둘기나 지빠귀나 까치를 잡는 장면을. 그렇게 크고 인상적인 야생동물은 처음 봤다 싶을 것이다. 누군가 내 집 부엌에 버린 흰 표범이 고양이를 잡아먹는 광경을 본 기분이랄까. 슈퍼마켓이나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내게 달려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한다.
“오늘 아침에 우리 집 뒷마당에서 매가 새를 잡는 것을 봤어요!”
내가 “새매겠지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들은 말한다.
“조류도감에서 찾아봤어요. 참매더라구요.”
아니다. 도감은 소용없다. 잔디밭에서 매가 비둘기와 씨름을 할 때는 실제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또 조류도감에 나온 그림도 기억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여기 새매가 있다. 잿빛에다 앞쪽엔 희고 검은 가로 줄무늬가 선명하게 나 있다. 눈은 노란색이고 꼬리가 길다. 그 옆에는 참매가 있다. 이 역시 잿빛에다 앞쪽엔 희고 검은 가로 줄무늬가 선명하게 나 있다. 눈은 노란색이고 꼬리가 길다. 그러면 사람들은 속으로 ‘흠.’ 하고는 설명을 읽는다. 새매, 길이는 24에서 40센티미터, 참매, 길이는 38에서 48센티미터. 그래, 새가 컸어. 틀림없이 참매였을 거야. 둘이 똑같이 생겼지만 참매가 더 크고, 그게 다야. 그냥 더 크다구.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참매와 새매는 표범과 집고양이만큼이나 닮지 않았다. 더 큰 것은 맞다. 하지만 참매는 더 듬직하고 잔혹하고 위험하고 무섭고 훨씬 더 보기 어렵다. 정원이 아니라 깊은 삼림지대에 사는 새라서 탐조가들도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숲에서 일주일간 진을 치고 있어도 참매 한 마리 보지 못하고 그 흔적만 더듬기 십상이다. 겁에 질린 삼림지대 새들의 울음소리가 난 후 갑자기 조용해지고, 시야를 바로 벗어난 곳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 어쩌면 숲 바닥의 흰 깃털 더미 속에서 반쯤 먹힌 채 널브러진 비둘기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혹 운이 좋다면 새벽안개 속을 지나가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새를 보게 될 것이다. 느슨히 움켜쥔 발에는 커다란 발톱이 박혀 있고, 눈은 멀리 목표물에 쏠려 있다. 순식간에 이미지가 뇌리에 박히고, 더 보고 싶은 허기를 남긴다. 참매를 찾는 것은 은총을 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기는 하지만 자주 오지 않으며, 언제 어떻게 올지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고요하고 맑은 초봄 아침에는 참매를 만날 가능성이 좀 더 높다. 참매들이 너른 하늘에서 서로 구애하려고 나무 밑 세계를 벗어나는 시기가 바로 그때니까. 그게 내가 참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품은 이유였다.
***
녹슨 문을 쾅 닫은 뒤, 쌍안경을 들고 하얗게 서리가 내린 숲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다녀간 이후 곳곳이 소실되었다. 엉망이 된 지역들이 나타났다. 나무가 밑동까지 잘린 곳, 나무뿌리가 부러지고, 말라 가는 침엽들이 모래 위에 널브러진 곳, 넓고 험한 빈터. 그런 장소가 나에게는 필요했다. 몇 달간 쓰지 않았던 뇌의 감각들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오랫동안 도서관과 대학 강의실에 살다시피 하며 인상 쓰면서 스크린을 쳐다보고, 과제물 채점하고, 학술자료를 찾아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종류의 사냥이었다. 이 숲에서 나는 다른 동물이었다. 은신처에서 걸어 나오는 사슴을 본 적이 있는가? 사슴은 발을 내딛고는 가만히 멈춰 서서, 공중으로 코를 들고 냄새를 맡으며 주위를 살핀다. 긴장해서 옆구리가 씰룩대기도 한다. 그러다가 모든 게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수풀에서 나와 풀을 뜯는다. 그날 아침 나는 은신처에서 주위를 살피는 사슴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코를 공중에 대고 킁킁대거나 공포에 젖어 서 있었다는 게 아니다.─의식적인 통제를 초월하는 주의력과 태도를 경험하면서, 사슴처럼 풍경을 누비는 오래되고 감정적인 방식에 사로잡혔다. 내 안의 뭔가가 나도 모르게 어디로 어떻게 발을 옮길지 지시했다. 백만 년간 진화한 결과인지, 아니면 그냥 본능인지는 모르겠지만, 참매 사냥에 나설 때 햇빛이 끊어진 쪽으로 비키거나, 소나무 사이 넓은 빈터에 드리운 좁고 서늘한 그늘로 들어간다. 어치 울음이나 까마귀의 우르릉대는 성난 소리를 듣고 나는 움찔한다. 이 소리는 ‘경계하라, 인간이다!’ 아니면 ‘경계하라, 참매!’라는 뜻일 수 있다. 그래서 그날 아침 나는 인간임을 감추고 참매를 찾으려 했다. 천 년간 힘줄과 정신을 묶어 온 오래된 유령 같은 육감이 제 몫을 해내느라 환한 햇빛 속에 있는 날 불편하게 했다. 왠지 이쪽 산등성이가 아닌 듯하여 마음이 불편했고, 꼭 하얗게 솟은 풀밭 뒤편의 저쪽 산등성이로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알고 보니 그쪽은 연못이었다. 연못 가장자리에서 작은 새들이 구름 떼처럼 일어났다. 푸른머리되새와 되새, 그리고 싱싱한 목화 봉오리처럼 버드나무 가지 속에 앉은 꼬리가 긴 작은 새들의 무리.
그 연못은 원래 전쟁 중 레이큰히스(영국 서포크의 영국 공군 기지가 있는 지역)에 독일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난 구멍이었다. 바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빼곡한 사초死草 덤불에 둘러싸인 모래 언덕에 있는 연못인데도 이례적으로 물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했다. 여긴 진짜 기기묘묘해서 숲을 걷다 보면 예상하지 않은 별별 것들을 다 마주친다. 예를 들면 순록이끼 군락, 잔잔한 별 모양의 꽃들, 작은 통꽃들, 황폐한 땅에서 자라는 옛 식물의 흔적들. 여름에 발아래 바삭하게 무언가 밟히는 느낌은, 세상에 떨어질 때 엉뚱한 곳에 내려앉게 된 북극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사방에 앙상한 어깨 혹은 칼날같이 생긴 단단한 부싯돌이 널려 있다. 습한 아침이면 신석기시대 석공들이 돌의 중심을 때릴 때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집을 수 있다. 차가운 물이 얇게 입혀진 작은 돌조각들이 반들거린다.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에 부싯돌 산업의 중심지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고기와 가죽을 얻으려고 토끼를 키우는 사육지로 유명해졌다. 예전에는 모래가 많은 땅 위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친 대규모 토끼 사육장이 있었기에 이곳의 지명─‘웡포드 워렌(Warren은 토끼 사육장이라는 뜻)’, ‘레이큰히스 워렌’─이 생겨났고, 결국엔 그 토끼들이 재앙을 불러왔다. 울타리가 둘러진 초지에서 양 떼와 더불어 풀을 뜯어 먹는 통에 이 짧은 초지는 뿌리가 말라붙은 모래땅으로 변했다. 풀이 없는 곳에는 모래가 날리고 퇴적물이 쌓여 지형이 바뀌었다. 1688년 강한 남서풍이 불자 무너진 지반이 하늘로 솟구쳤다. 거대한 누런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넓은 땅이 솟아오르고 움직이고 꺼졌다. 브랜던은 모래에 둘러싸였다. 샌턴 다운햄은 휩쓸렸고, 강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폭풍이 멎자 브랜던과 바튼 밀스 사이에는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언덕이 생겼다. 이 지역은 여행하기에 몹시 나쁜 곳으로 유명해졌다. 부드러운 모래 언덕은 여름에 뜨거웠고 밤이면 노상강도 떼로 들끓었다. 영국판 아라비아 사막이랄까. 존 에블린(17세기 영국의 자연주의자. 저술가)은 이 둔덕을 “리비아 사막의 모래밭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일부 신사들의 영지 전체를 매몰시켜 나라에 큰 피해를 주는 움직이는 모래밭”으로 서술했다.
에블린이 말한 바로 그 ‘움직이는 모래밭’에 내가 서 있었다. 대부분의 둔덕은 소나무에 가려져 있고─1920년대에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숲이 조성되었다.─노상강도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반쯤 묻힌, 훼손된 지역이라 위험하게 느껴진다. 내가 이곳을 사랑하는 것은 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야생적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산꼭대기처럼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은 아니지만, 사람들과 땅이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을 빚어 내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야생이다. 여기에 새로운 시골의 역사가 더해져 풍요로움을 자아낸다. 영지의 거창하고 한가로운 꿈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산업과 삼림, 재난과 상업, 그리고 공사로 이루어진 역사다. 참매를 찾기에 이보다 맞춤한 곳은 생각나지 않는다. 이 묘한 브레클랜드 풍경이 참매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참매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와 똑같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이야기다. 참매들은 한때 브리튼 제도(브리튼 섬, 아일랜드, 만 섬을 합한 지역) 전역에서 번식했다. 리처드 블롬(18세기 영국 출판업자)은 이렇게 썼다.
“참매의 종류와 크기는 다양하고, 번식하는 몇몇 국가에 따라 온순함과 힘과 그 억셈이 다르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모스코비와 북아일랜드, 특히 티론 카운티만큼 참매가 살기에 좋은 곳은 없다.”
하지만 인클로저 운동(영국에서 농토에서 양을 치기 위해 공유지에 담장을 둘러 사유지화한 운동)이 출현하면서 참매의 특성은 잊혔고, 보통 사람들이 매를 날리는 일은 제한되었다. 또 명중률 높은 총기가 출현하여 매사냥보다는 사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참매는 사냥의 동반자가 아닌 해충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냥터지기들의 학대는 이미 서식지를 잃은 참매의 개체 수에 최후의 결정타를 날렸다. 19세기 후반 무렵 영국의 참매는 멸종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참매 중 하나가 총을 맞고 박제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흑백 사진 속 박제된 참매는 스코틀랜드에서 잡힌 너저분하고 눈이 멍한 새였다. 영국에 더 이상 참매는 없었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매 조련사들은 비공식적으로 조용히 참매들을 도입할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영국 매 조련사 클럽은 조련을 위해 유럽 대륙에서 참매 한 마리를 수입하면 그때마다 새끼를 번식시켜 방사했다. 한 마리 사들이면 한 마리 풀어 주는 식이었다. 참매처럼 자립심이 강한 포식성 동물을 다루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숲으로 찾아가 상자를 열어 놓으면 되니까. 뜻이 같은 조련사들이 영국 전역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스웨덴, 독일, 핀란드에서 들여온 매들은 대부분 크고 색이 옅은, 숲에 사는 참매들이었다. 일부는 의도적으로 방사되었고, 일부는 사라졌다. 생존한 새들은 서로를 찾아내 은밀하게, 성공적으로 번식했다. 오늘날 그 후손 수가 450쌍에 이른다. 희귀하고 아름답고 친근한 영국 참매들을 보면 나는 행복해진다. 그들의 존재는, 야생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과 손이 닿지 않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거짓임을 보여 준다. 그렇다, 야생은 인간의 작품일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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