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욕망하는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철학자들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검토하면서 가르침을 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매년, 철학을 가르치는 모든 기관들에서 철학 수업을 담당하는 이들은 꼭 이렇게 자문합니다.
철학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체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어딘가에 놓아둔 물건을 찾지 못하는 것”도 실착 행위acte manqué 1)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이 철학을 강의할 때마다 반복하는 이런 유의 첫번째 강의는 일종의 실착 행위와 비슷합니다. 철학은 자기를 놓친 채 혼선을 빚습니다. 우리는 원점zéro에서부터 철학을 찾아 나서지만 자꾸만 철학을 잊어버리고 철학의 위치를 망각합니다. 철학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합니다. 철학은 스스로를 은폐합니다. 실착행위는 이렇게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의식에 대하여 은폐되는 것, 일상적 삶의 조직 안에서의 중단, 일종의 불연속성입니다.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왜 철학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철학이 자기에게 갖는 불연속성, 철학의 부재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에게도 철학이 학업과 삶이라는 주요 관심사에 들어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철학자조차도 철학을 늘 새삼스럽게 기억하고 복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철학이 침잠하기 때문이요, 철학자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철학을 하는 걸까요? 의문부사 왜pourquoi는 적어도 ~을 위하여, ~에 대하여pour.라는 단어로써, 보어complément 혹은 속사attribut 2)의 뉘앙스를 상당 부분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 뉘앙스는 금세 동일한 구멍, 즉 부사의 의문사로서의 효력이 파놓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버립니다. 그 효력은 질문의 대상에게 놀라운 위치를 부여합니다. 그 대상은 본연의 존재가 아닐 수도 있고,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왜’라는 단어는 그것이 질문하는 바를 망각하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 물음 속에는 의문시되는 대상의 실재적 현존(우리는 철학을 하나의 사태, 실재로 간주하니까요)과 가능적 부재가 함께 들어와 있습니다. 철학의 삶과 죽음은 동시에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철학은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합니다.
어쩌면 철학의 존재의 비밀은 이 모순적이고 대조적인 상황에 있는 듯합니다. 철학하는 행위와 현존-부재 구조의 우연적 관계를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다소 앞서가는 감이 있지만 욕망désir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철학philosophie에는 사랑한다는 것philein, 즉 ‘좋아하다, 욕망하다’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욕망에 대해 두 개의 주제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사람도 그렇지만, 철학은 어떤 문제 제기 방식들을 받아들인다는 한에서 욕망에 대한 문제를 주체와 대상, 욕망하는 것과 욕망 당하는 것의 이원성이라는 관점에서 고려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욕망에 대한 물음은 욕망할 만하기에 욕망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할 만한 것이 되는가의 물음으로 금세 넘어가버립니다. 어떤 여자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사랑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느냐 없느냐와 마찬가지죠. 이렇게 질문하는 방식이 인과성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우리가 욕망할 만한 것이 욕망의 원인인가, 아니면 그 역逆인가),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이원론적 시각에 해당한다는 것을(한쪽에는 주체가 있고 다른 쪽에는 대상이 있는데 이 둘은 서로 상대에게 없는 속성을 지닌다), 바로 그래서 문제에 진지하게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은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를 맺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듯 타자에게로 향하는 움직임입니다. 이 말은 타자autre가 ─ 원한다면 ‘대상’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타자가 진정으로 욕망된 대상일까요? ─ 욕망하는 것에 현존하되, 부재라는 형식으로 현존한다는 뜻입니다. 욕망하는 것에는 어떤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만약 그게 있다면, 즉 결여된 게 없다면 아예 욕망하지도 않겠지요. 욕망의 주체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역시 욕망하지 않을 테니까요. 주체와 대상의 개념을 가져와 생각한다면, 욕망의 움직임은 이른바 대상을 이미 욕망 속에 있는 것인 양 드러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대상이 정말로 거기에 ‘직접’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주체는 자신을 뭔가 정의되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서 규정하고 완성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합니다. 주체가 타자에 의하여, 부재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요컨대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순적이지만 대칭적인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주체’에게는 자기 현존의 중심에 욕망되는 것의 부재, 자신의 결핍이 있습니다. 욕망하는 존재 속의 비-존재non-être가 있어요. 그리고 ‘대상’에는 현존이 있습니다. 욕망하는 자에게는 부재를 바탕으로 하는 현존(추억, 희망)인 것입니다. 대상은 여기서 욕망된 것으로써, 따라서 소유되고 속함으로써 존재합니다.
2. 여기서 우리의 두번째 주제가 파생됩니다. 욕망의 본질은 현존과 부재를 조합하는 구조에 있습니다. 이 조합은 결코 우발적인 게 아닙니다. 현존하는 것이 자기에 대해서 부재하든가 부재가 존재하는 한에서 욕망이 존재합니다. 욕망은 진정 현존의 부재에서, 혹은 부재의 현존에서 일어나고 수립됩니다. 여기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욕망은 현존과 부재를 한데 뒤섞지 않으면서 함께 지탱하는 바로 그 힘일 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향연』3)에서 만티네아의 무녀 디오티마Diotime가 자신에게 에로스, 즉 사랑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길지만 그래도 말씀드리지요. 아프로디테의 생일에 신들이 축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메티스의 아들 포로스도 있었답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페니아가 구걸을 하러 왔어요. 그렇게 풍성한 잔치에는 페니아가 으레 찾아와 구걸을 하곤 했지요. 당시에는 포도주가 없었기에 포로스는 넥타를 마시고 취하여 제우스의 정원에 들어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궁핍에 시달리던 페니아는 포로스의 아들을 낳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페니아는 포로스 옆에 가서 동침하고 에로스를 잉태하게 되었지요. 바로 그 때문에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동반자이자 그의 시동이 된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생일을 기리는 잔치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 『향연』 203 b-c
디오티마의 말대로라면 에로스의 조건과 운명은 분명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에로스는 포로스와 페니아의 자식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조건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에로스는 언제나 가난해요. 사람들이 대부분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거나 섬세하지도 않아요. 그는 되레 거칠고 뻣뻣하며 맨발로 걸어다니고 보금자리도 없습니다. 그는 방바닥을 요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길가나 문간에 누워 잡니다. 이것은 그가 제 어미를 닮아 언제나 궁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부친을 닮은 데도 있어서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 곧잘 계책을 꾸밉니다. 그는 용감하고 결단력 있으며 열정적이고, 으뜸가는 사냥꾼이며, 쉴새없이 모략을 짜냅니다. 그는 지혜를 갈구하고 지혜에 이르는 길을 찾을 줄도 알지요. 그는 언제나 지혜를 사랑하며 또한 놀라운 마법사이자 주술사이자 소피스트이기도 합니다. 에로스가 그 본성상 필멸의 존재도 아니고 불멸의 존재도 아니라는 점을 덧붙일게요. 그는 단 하루 동안에도 꽃처럼 활짝 피어나 살아 있다가 금세 죽어버리기도 하지요. 그후에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자질이 샘솟는 덕분에 또다시 살아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질은 끊임없이 그를 통과해 빠져나가요. 그래서 에로스는 절대로 완전히 빈곤하지도 않고 완전히 풍요롭지도 않은 상태에 있는 겁니다.
- 『향연』 203 c-e
디오티마의 이야기, 즉 에로스의 탄생 신화는 분명히 풍부한 단초들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지요.
◇ 일단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일에 수태되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의 여신이고 아름다움은 사랑의 대상이지요. 욕망과 욕망할 만한 것에 대한 일종의 앎이 여기에 있습니다.
◇ 그 다음으로 에로스의 본성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에로스는 신이 아니지만 인간도 아닙니다. 신들의 잔칫상에 함께했던 아버지 쪽으로 보자면 신이고, 넥타르라는 신성한 음료의 취기 때문에 생긴 자식이지만 구걸을 하며 궁핍하게 살았던 어머니 쪽으로 보자면 인간, 즉 필멸자必滅者이지요. 따라서 그는 삶이자 죽음입니다. 플라톤은 에로스의 생애에 갈마드는 삶과 죽음을 특히 강조하는데요. 에로스는 마치 불사조와 같습니다. “[내 사랑이] 저녁에 죽어도 아침이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아폴리네르,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알콜』 18.) 우리는 조금 더 멀리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욕망은 빈곤하기 때문에 능수능란해야 하지만 그의 발상들은 항상 실패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에로스는 죽음과 빈곤의 법칙 아래 있기에, 자기 안에 죽음을 품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끊임없이 거기서 빠져나가 삶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욕망은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고, 삶인 동시에 죽음입니다. 플라톤의 텍스트 안에서 삶-죽음이라는 대조적인 한 쌍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남성-여성이라는 쌍과 동일시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에로스의 아버지는 욕망을 통하여 대상의 사랑을 끌어당기는 것, 즉 둘의 결합을 상징하는 반면, 어머니 페니아는 둘이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을 구현합니다. 이 텍스트에서 인력引力이 남성적이라면 척력斥力은 여성적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주제를 깊이 다룰 순 없지만, 에로스가 으레 수컷으로 통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남성이자 여성이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
1) 여기서 실착 행위란 독일어Fehlleistung의 역어로서 ‘실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감수자)
2) 속사는 어떤 단어(주어와 직접목적보어)의 성질/속성을 나타내는 말로 영어의 보어와 비슷하다. (편집자)
3) 주연酒宴이 마련된 장소를 배경으로, 술을 섞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플라톤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 ‘심포지온Symposion’이라는 제목 그대로 ‘함께 모여 술 마시는’ 만찬장에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에로스’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가톤이라는 배우의 수상 축하를 위해 그의 집에 모여 술자리를 펼치며 한 명씩 에로스를 찬양하는 발표회를 열자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가톤은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이자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려면 스스로 결핍되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무녀의 입을 빌려 이데아 설을 주장하는데, 아름다움에는 어떤 ‘본질’이 있는데, 이것을 직관하면 불사의 존재가 된다는 주장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편집자)
4) 두 물체가 서로 밀어내는 힘. 반발력이라고도 한다. 인력(서로 당기는 힘)의 반대 개념이다. (편집자)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