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산다는 것,
읽는다는 것
01
읽는만큼
성장한 나날들
저의 책 《책이여, 안녕!》의 제목은 러시아의 소설가 나보코프가 발표한 대표작 《선물》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책 속 주인공은 영원히 살지만(작중에서는 죽는다고 해도), 책을 쓴 작가는 죽습니다. 죽기 전 자기가 쓴 책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지요.
저도 그런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노작가입니다. 게다가 저처럼 독서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인간은, 제가 읽어온 책에게도 마음을 다해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제 인생의 책’이라 할 만한 이런저런 책들과 이별하는, 그러면서 가능하면 여러분께 그 책을 건네드리는 그런 의식을 치러보고자 합니다. 당연히 저보다 많은 날을 살아갈 여러분께서 그 책들을 기억해주시겠지요. 이 점에 미리 감사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준쿠도 서점 이케부쿠로 본점에서 열린 ‘오에 겐자부로 서점’ 덕분입니다. 반년 동안 한시적으로 열린 서점인데, 제가 고른 책들이 실제로 그곳에 꽂혀 있는 것을 보니 신선한 기분이 들더군요.
매우 다양한 책이 꽂혀 있었는데, 천천히 책장을 둘러보며 쑥 튀어나오거나 움푹 들어간 책을 정리하는 동안, ‘과연 이 책들이 모두 나라는 인간과 이어져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에 어느 소설에서 비슷한 내용을 쓴 기억이 나서 얼마 전에 찾아봤는데 안 나오더군요.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바레라는 거장(거대한 벽화를 그렸다는 점에서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점에서)의 부인인 프리다 칼로는 독특한 화가였습니다. 그녀의 그림 가운데(아마도 〈헨리포드 병원〉이라는 그림일 겁니다) 자기 신체 밖으로 튀어나온 여러 개의 혈관이 태아와 달팽이, 난초, 고정 기구와 이어져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 서고의 책과 저도 그렇게 혈관으로 이어져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기에 이번에 제 서점의 책장에서 이를 새삼 확인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독자와 책의 만남은 보다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분자 모형처럼 입체적으로 늘어선 한 더미의 책이 있고, 그렇게 이어진 책들 한가운데 제가 서 있는 느낌이면 좋겠습니다. 마침내 큰 화면에 홀로그래피 영상을 쏘는 컴퓨터와 같은 구조가 나올지도 모르지요. 거대한 책의 숲에서, 책의 나무에 둘러싸인 기분을 맛보며 책을 고르는 겁니다.
‘나만이 지닌 책의 네트워크가 있다’, ‘이런 작가들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와 같은 구조도가 살면서 차츰 생성되는 것이죠. 그게 지속적으로 책을 읽는 것일 터인데, 제 나이쯤 되니 제 삶이 다른 무엇보다 이 책들과 함께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정도의 질과 양의 책이었구나’, 나아가 ‘내 생애도 이 정도의 일생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래 분명 이런 인생이었지’ 하는 그리운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고전을 통해 묻고 답하다
─
먼저 젊은 시절 제가 만난 고전, 또 그것과 재회한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한 모임에서 지인을 만났는데,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얼마 전 이 모임 동료인 오다 마코토 씨가 《일리아스》를 꾸준히 번역하고 있다는 엽서를 보내와서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일리아스》라는 고전 영웅서사시는 제 서점에도 꽂혀 있습니다. 지난 수십여 년간의 제 해외 경험에 따르면, 지식인들은 호메로스의 작품 중에서도 《오디세이아》보다 《일리아스》를 더 많이 논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그 《일리아스》를 오다 씨가 번역한다기에 질문을 하나 던지고 답을 구했습니다. 제 서점에 가득 꽂혀 있는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시몬 베유, 그녀와도 관련이 있는 질문입니다. 앞으로 지식인이 될 젊은 여성 분들은 독서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며 그녀의 책을 큰 기둥으로 삼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먼저 베유에 대해서인데, 《평전 시몬 베유》 상하권 번역본이 있습니다. 그녀가 고등사범학교 수험 클래스에서 공부하던 시절 동급생인 시몬 페트르망이 쓴 책인데, 번역이 매우 좋습니다. 또 다른 평전 가운데 도미하라 마유미 씨가 선별해 번역하고 미스즈서방에서 출간한 《베유의 말》을 읽어도 좋겠습니다.
베유도 《일리아스》를 꼼꼼히 읽었는데(그 성과로 쓴 논문 ‘《일리아스》 혹은 힘의 시’가 잘 알려져 있지요), 페트르망에 따르면 몇몇 구절은 그녀가 손수 번역해 읽었다고 합니다. 베유는 그리스 라틴 고전은 물론 인도 고전까지 원어로 읽었던 사람입니다. 특히 그리스어로 읽는 걸 좋아했어요.
베유는 그런 식으로 《일리아스》를 읽었고, 특히 프랑스어로 ‘르제rejet’라는 기법을 중시하며 제대로 번역하려 했다고 페트르망은 말합니다. 제가 그리스 시는 잘 모르지만, ‘르제’란 시를 단순히 두 행에 걸쳐 이어 쓰는 ‘앙장브망enjambment’과 달리, 하나의 행에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다음 행 제일 앞에 던져두는 겁니다. 이에 대해 오다 씨에게 물어봤더니 그 기법이 정말 자주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는 진짜 전문가답게 번역하고 있는 것이죠.
실은 저도 젊은 시절 일 년가량, 오다 씨와 함께 어느 선생님 밑에서 그리스어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일이 훨씬 나중에 유효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어쩌다 보니 《일리아스》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여러분도 중요한 책이라기에 읽기는 읽었는데, 인생에 별반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던 책이 몇 권쯤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것이 빛을 발하게 될 때가 올 테니, 기대하고 계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몇 해 전 〈아사히신문〉에 제가 세계지식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 연재된 적이 있는데, 그걸 엮어낸 책이 《오에 겐자부로 왕복 서간: 폭력에 맞서 쓰다》입니다. 사인을 부탁하시는 분들이 그 책을 내밀면 무척 기뻐요. 제게도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이 왕복 서간에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함께해주었습니다. 센 씨는 일본 버블 시대 경제 전사들의 활약을 《일리아스》에 견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에게 답장을 쓰는데, 대학 교양 수업 때 배운 《일리아스》의 한 소절이 떠올랐고 그걸 편지에 쓰면서 센 씨와의 거리가 좁혀졌습니다. 센 씨는 《일리아스》 전체를 그리스어로 읽으셨겠지만, 어쨌든 그분이 그 책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한 소절은, 제가 강의실에서 짧은 인용을 죽 이어놓은 앤솔러지를 읽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부분과 우연히 일치했습니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율리시스가 《일리아스》에서는 조연급 장군으로 등장하는데, 어려운 교섭을 훌륭히 해내는 국무총리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왕과 사이가 틀어진 아킬레우스, 아킬레스건으로도 유명한 그 용장에게 어떻게든 전선에서 이탈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또 기나긴 트로이전쟁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병사들을 이리저리 설득하지요.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는 장면 앞부분을 인용해볼까요.
몸도 마음도 얼어붙게 만드는 ‘궤주潰走’의 반려伴侶, ‘공황恐慌’에 빠져 용맹하기로 이름난 군사들마저도 견디기 힘든 비탄에 젖어서 의욕을 잃었으니.
교양 수업 때 교수님께서 이 소절을 읽으셨는데 정말로 아름다웠어요. 그걸 센 씨에게 썼더니 공감한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저작은 《빈곤과 기근》, 《불평등의 재검토》가 제 서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미국 주도의 시장경제주의가 위세 등등하던 시기의 세계 경제학 서적입니다. 당시엔 왕복 서간에 참여해준 노암 촘스키 같은 비평파와 다른 부류의 학자들도 몇 명이나 노벨경제학상을 받는 시대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1998년 센 씨의 수상은 경제학을 인간의 학문으로 되돌려 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속출하고 그들을 성공시키는 경제학이 우세하는 가운데,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과 그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원조는 무엇인가. 그 가난한 사람들이 지닌 가능성을 북돋우고, 그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권력을 간섭하며, 사회에 자유를 도입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원조가 이뤄져야만 비로소 후진국 원조가 성공을 거둔다. 이 같은 경제학을 확립한 사람이 아마르티아 센이 아닐까요?
경제학 같은 분야에서도,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라틴 고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이 많다는 건 매우 중요한 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영국이나 프랑스의 교육제도 덕분이겠지요. 대학이 엘리트 집단인 탓도 있지만, 경제학도나 물리학도도 그런 고전을 읽습니다. 일본에도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어요. 20세기 초 구제舊制 고등학교에는 있었을 겁니다. 오늘날 대학도 교양과정에서 어학 교육을 중시했으면 해요. 그에 대해 개개인의 독서를 강화시킨다면 더욱 좋겠지요.
아마르티아 센은 인도인이니 보다 폭넓게 산스크리트의 서사시《마하바라타》를 읽었습니다. 그는 《마하바라타》에서 독립한 형태의 서사시에서, 힌두교의 신격 크리슈나와 유명한 장군 아르주나의 대화를 골라내 왕복 서간을 통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센 씨가 그런 편지를 쓴 건 제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고, T. S. 엘리엇이 작품에서 이를 언급했음을 전제로 했기 때문입니다.
센 씨가 편지에서 제게 알려준 것은, 큰 전투를 앞두고 자국 군대의 정당함이나 승리의 명백함과 관계없이 적군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과 사상자를 생각하여 전투를 중지하려는 아르주나와, 군 지휘관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 싸우고자 하는 크리슈나의 논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센 씨는 엘리엇이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세 번째 시 〈더 드라이 샐비지즈The Dry Salvages〉에서 크리슈나를 지지하고 있음을 덧붙입니다. 엘리엇은 이 시에서 분명 전투를 계속하는 쪽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Fair well(무사하기를)”이라 하지 않고, “Fare forward(나아가라)”라고 하지요. “나아가라, 항해자여!”라고 말입니다. fare는 ‘여행하다, 나아가다’라는 뜻의 옛말입니다.
그러면서 센 씨는 “그러나 겐자부로여, 나는 아르주나의 뜻을 취하겠다”라고 썼습니다. 본디 그는 인도의 핵개발에 대해 도덕성을 중시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피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해왔어요. 저도 센 씨의 그런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아마르티아 센과 저의 왕복 서간은 마침내 동일한 뜻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가 편지에 엘리엇을 인용하면서부터 대화가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이것이 고전문학을 인용하는(엘리엇을 인용하고, 이를 통해 인도 고전을 인용하는) 효과가 주는 재미입니다.
사실 저는 센 씨와의 서신을 계기로 엘리엇의 시에 기반을 두고 《책이여, 안녕!》을 썼는데요.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에서, 저는 시인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엘리엇은 크리슈나가 옳다 하고, 센 씨는 아르주나가 옳다 했지만, 제가 주목한 것은 엘리엇이 노인에게 외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늙은 항해자에게 “나아가라!”고 하지요. 결과가 well일지 어떨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Fare forward”라고 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북돋고 있어요. 아울러 엘리엇은 그 노인 안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제 소설 속 노인들도 이런 독려에 부응하고자 하지요. 소설은 ‘노인이 앞으로 어디로 향하건 온 힘을 다해 남은 생을 살아가려 한다’는 것이 주제니까요. 만약 센 씨가 제 소설을 읽었다면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저는 왕복 서간을 쓰면서 인도 핵병기에 대한 센 씨의 생각, 즉 모럴과 푸르덴셜(말하자면 도덕적이면서도 현실에 입각해 고찰하는 태도)의 양립을 지향하라고 정부에 촉구하는 태도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엘리엇의 시 자체로 돌아가, 엘리엇의 뜻을 거꾸로 소설 속에서 전개해보고자 했던 겁니다. 노인이 된 자신과 타인에게 “Fare forward”라 외치며, 동료들과 막무가내로 노년을 돌파해나가는 신기한 인물을 그려보자 싶었지요.
그리하여 작가인 저와 비슷한 면이 있는 제 소설 속 노인과 그의 동료는 “우리는 노인의 지혜 따위 듣고 싶지 않다. 차라리 노인의 무모함,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엘리엇의 시를 인용하면서, 실제로 기괴한 사건에 휘말려 마침내 탐험가가 됩니다. 앞으로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야말로 노인의 각오라고, 마찬가지로 엘리엇의 시를 인용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책이여, 안녕!》은 제 자신에게도 평론을 써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기괴한 미래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소설입니다.
소설에는 이렇듯 작가 자신도 알 수 없는 파국으로 그를 몰아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중하기 그지없는 엘리엇이 만년에(인생으로 치면 더 오래 살았지만 시인으로서) 지은 《네 개의 사중주》는 시면서도, 이렇듯 소설과 같은 기괴함을 지닌 작품입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