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전투에 대하여
실존은 투쟁에서 나온다는 것, 그걸 나는 너무나 잘 안다.
길모퉁이에서, 버스가 나타난다. 밤이 온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꼭 안는다. 이미 문은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매번 저 문이 영원히 날 내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면 익숙한 의자 냄새, 마른 융단의 알싸한 냄새, 좁은 복도, 역겨운 재떨이 냄새에 조금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마지막 몇 분간이라도 부모님 모습을 마음속에 꽉 채우기 위해서 난 얼른 창가 의자에 자리 잡고 앉는다. 아빠와 엄마, 이 두 얼굴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이 떠날 때는 무슨 수를 써도 소용없다는 걸 나는 안다. 게다가 버스는 절대 늦게 떠나는 법이 없다. 빨리, 항상 너무 빨리 떠난다! 어린 소년은 계속 아빠 엄마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 유리창이 부서질 수만 있다면, 저 버스가 멈출 수만 있다면, 세상의 뭐든 다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미 부모님 모습은 저만치 멀리 사라져 점이 되었다.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한다. 장애인인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어째서 아이에게서 부모를 빼앗는가? 그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매주 일요일마다 무슨 의식처럼 되풀이되는 사건들을 간절히 되짚어본다. 우선 아빠와 엄마의 순박한 얘기를 들으며 둘 사이에 누워 늦잠을 잔다. 부모님이 상상으로 지어내는 이 동화들은 그의 마음을 이 저주받은 일요일로부터 멀리,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데려간다. 조금 지나 아침나절엔 엄마의 우아한 동작들을 관찰한다. 엄마는 부엌에서 날렵하게 움직인다. 우리는 함께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맛보며 나는 잠시나마 소박한 마법을, 단순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 행복에 겨울 지경이다. 이 모든 건 다음 주말이 오기 전까진 누리지 못할 테니까!
아무리 엄마가 만든 음식이라도 고기 스튜는 힘들여 많이 씹어야 한다. 씹으면서,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예고하는 표지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엄마와 함께하는 순간순간마다 부재不在의 도장이 어김없이 찍히고 있는 것이다. 끝도 없이, 이별의 순간은 시시각각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무신경하면서도 서글픈 예고자 같은 벽시계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의 공허한 말과 행동을 견디며 오후를 보낸다. 따분하고 무익한 프로그램이 줄줄이 이어지고 절망적 기대로 버무려진 몇 분이 지나간다. 그러다 시계가 오후 6시를 땡땡 치면, 우리 차는 사랑하는 집을 떠나 도시와 그 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아빠는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농담을 하지만, 소용없다. 커다란 건물 앞에서, 여러 가족들─그들 역시 장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시설까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린다. 순간순간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흘러가지만, 내 기억 속에선 그런 시간들이 항상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옆에서 한 친구가 쾌활하게 뭐라고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에, 나는 몽상에서 퍼뜩 깨어난다. 잘 지냈냐고 서로 안부를 묻는다. 목이 꽉 멘 채, 나는 차디찬 유리창에서 눈길을 뗄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다. 환한 얼굴들이 나를 맞아준다. 모두들 애써 고통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요란스럽게 행동한다. 난쟁이인 아이는 이를 다 드러내며 헤벌쭉 웃고, 벙어리인 아이는 야단법석을 떤다. 몸이 마비된 나만, 멀어져 점이 되어버린 부모를 여전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아니, 이 운명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꽉 메었던 목이 풀리고, 동류의식이 다시 생겨난다. 다른 삶, 진짜 삶이 자기 권리를 억지로 되찾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고독과 고립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것이라도 소용이 있어야지 어쩌겠는가. 전투다! 나는 삶에서 이득을 얻어내고, 기쁨을 찾아내야만 한다. 안 그러면 망한다.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
일찍부터, 내게 실존은 그러니까 하나의 전투처럼 예고되었다. 삶에서 최초의 몇 해 전부를 나는 짐승을 길들이는 일에, 뻣뻣한 몸으로 일상에 적응하는 일에 바쳤다. 계속되는 내 몸의 기능 장애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고, 심신을 다 바쳐야 했으며, 언뜻 보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제대로 움직이는 게 아닌 동작을 나아지게 해야 했고, 경련을 다스리고, 추락을 피하고, 안전하기보다는 그저 무탈한 내일을 어떡하든 맞아야만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덮쳐오기 일쑤였고, 종종 그런 일은 그때까지 노력해왔던 것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버리는 듯했다. 매일 아침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고, 전략은 정교해져갔다. 익히 알고 있는 두려운 장애물인 적대적 체념, 그건 금지되어 있었다. 무슨 꾀를 안 써보고, 무슨 노력을 안 해보았겠는가. 앞으로 치러야 할 투쟁은 나를 슬프게 하기는커녕, 주변 친구들에게서 변함없이 되찾은 진정한 기쁨을 끊임없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베풀어준다. 큰 기쁨이 찾아와 일체의 발전과 성공─심지어 가장 미미한 것까지도─을 큰 승리로 바꾸어주고 영예롭게 만들어주며 이 희한한 부대의 사기를 북돋운다.
인성학人性學이 가르치는 바를 장애인은 꿋꿋하게, 경험으로 안다. 생체 기관을 가진 존재들이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상태와 끊임없이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장애인, 난쟁이, 절름발이, 임상 치료사, 마비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함께 있는 환경에서 나는 투쟁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없이 허술한 상황 중에 오히려 투쟁에 적합한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이 흥미로운 역설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수동적 대처는 금물이고, 도전을 해야 한다. 손가락 하나 베였다고, 입속에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갔다고, 귀가 없다고, 심지어 평발이라고 포기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호막이 내려진 채 자신을 잉여로 살아가게끔 단죄받는 사람들,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삶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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