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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무소에 얽힌 정치의 비밀
동은 역사적으로 우물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한국 최초의 동사무소는 1920년 콜레라 발병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촌 양반들이 가산을 보호하기 위해 삼청동 중심으로 모여 사무소를 열고 위생 관련 업무를 보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중앙 정부는 이렇게 자치 조직으로 시작한 동을 평화 시기에는 자율권을 풀어줬다가(비용 차원의 아웃소싱) 필요할 때는 다시 행정조직으로 만들어 동원하는 식으로 활용해왔다.
가령 이승만 정권 이후 1949년 지방자치법이 등장하며 1955년 최초의 동장선거가 시행된다. 해방 이후부터 계속 배급권을 가지고 있던 동장은 지역단위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 말기 선거에 동장들이 동원되면서 횡령 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급기야 1958년 24파동 때 동장을 다시 임명제로 바꾸는 법안이 국가보안법과 함께 통과된다.
4·19혁명 이후 우리나라 지방자치법에서 가장 민주적이라고 생각되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동장 선거가 부활하지만 서울은 미처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5·16 쿠데타를 맞았다. 쿠데타 세력은 동장의 자격 조건으로 45세 이하일 것, 5년 이상의 행정 경험, 정치적으로 당적이 없을 것, 해당 동에 거주할 것, 체력이 건강할 것 등의 조건을 내걸고 1961년 7월 새로 뽑힌 동장들을 모아 신고식을 했다.
이렇게 해서 24시간 근무체제의 동사무소 제도는 파출소 제도와 함께 1970년대 즈음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이 자랑하는 고도의 생활밀착 행정 서비스의 조건이 되었지만 이전보다 더 적은 인력과 자원으로 훨씬 넓은 인구 및 면적을 통치할 수 있게 된 현대사회에서 동사무소의 역할은 애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의 정부’ 이후에는 이를 다시 주민자치센터, 주민교육시설, 복지시설로 바꾸거나 혹은 파출소처럼 아예 없애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베트남전쟁과 정치지리학의 부상
김
먼저 정치지리학이 뭐예요?
임
지리학의 한 분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치학 쪽에서는 지리정치학이라고, 줄여서 지정학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치지리학은 지리학 쪽에서 접근하는데 지정학과는 조금 강조점이 다릅니다. 정치학은 선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반면 정치지리학 같은 사회과학 분야에선 주로 권력 이야기를 하고요.
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들어본 게 국토지리, 인문지리…… 두 가지밖에 없거든요.
임
지리학의 분야는 굉장히 많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세분화하자면 끝이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해당 분야를 상세히 구분해야 할 필요는 없겠죠. 결국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자원이라고 할 때, 이 자원의 발생과 이동, 분배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 지리학입니다. 또 정치든 권력이든 인간이 이 자원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변화시키는지 연구하는 학문을 정치지리학이라고 합니다. 문화지리학이 문화로 자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배분하는가를 탐구한다면, 정치지리학은 정치가 어떤 식으로 자원 배분을 관리하면서 사회를 바꾸어가는가를 보여주는 거죠.
김
아, 이제 좀 감이 오네요
임
권력과 관련해선 막스 베버Max Weber의 영향을 받은 흐름이 있습니다. 로버트 달Robert A. Dahl의 『누가 통치하는가Who governs?』(1961)와 같은 논지를 따르는 흐름인데, 1970년대 이후 권력을 소유가 아닌 관계로 바라보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로 인해 정치지리학 담론이 더 풍부해졌습니다. 미시적인 권력 행위들, 권력관계들이 어떤 식으로 도시 혹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가를 질문하며 1980년대 정치지리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세계사 차원의 움직임들이 있었고, 세계경제가 재구조화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들이 많아집니다. 지리학 역시 이런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에로도트Hérodote》라는 지정학을 여는 잡지가 1966년에 탄생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지리학의 붐이 일었습니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대해 지리학자들이 질문하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문제로 치부했습니다.
김
전쟁은 정치, 군사, 외교 분야의 문제 아닌가요?
임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에서 전쟁이 지리학이라는 학문의 연구 대상이 됩니다.
김
맛보기로 잠깐만 이야기해주세요. 지리학 관점에서 베트남전쟁은 어떻게 얘기할 수 있나요?
임
베트남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미권 지리학,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지리학은 세계경제의 재건에 기여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팽창한 국가가 주도해 양산한 생산 설비들이 어디로 갈지를 결정했습니다.
김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 때 수립한 국토개발 5개년 계획과 비슷하게 전쟁을 계획한다는 거죠?
임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남동임해공업단지처럼 계획하고 시설을 배치하면 효과가 어떨지를 계산하는 지리학이 풍미했습니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전쟁도 하나의 지역을 파괴하기 위해서 혹은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 항공기는 어떻게 보내고 보급은 어떻게 하고 등을 과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산수를 해보고 이길 수 있을 때 전쟁에 개입하고, 돈도 거기에 맞춰 공급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전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계산을 무수히 했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 졌을까? 도대체 미국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고민을 하다 보니까 땅, 그 위에 만들어진 문화, 이 문화 안에서 누가 무엇을 지배하는가, 그 지역에 권력이 어떻게 분포하고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명령을 받는가 등을 모르면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문화가 지리학에서 화두가 됩니다. 이렇게 등장한 문화지리학이 1세대 문화지리학이고 2세대는 신자유주의 이후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아무튼 그때 문화지리학과 함께 정치지리학도 지리학의 주요 분야가 됩니다.
김
그러니까 베트남전쟁은 전형적으로 유격전, 게릴라전 양상을 띤 전쟁이잖아요. 민과 군이 잘 구분이 안 됐던 전쟁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전처럼 정규군과 정규군이 맞붙는 전쟁만 생각을 하면 답이 안 나오는 거죠. 문화적 배경이라든지 지배 관계를 모르면 전쟁과 연관된 산수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문화나 정치가 지리학의 영역이 됐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거군요.
임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 지리학은 크게 변화합니다. 예전 지리학의 연구대상은 기본적으로 식생植生의 문제였습니다. 어디 가면 뭐를 먹고 산다, 일은 누가 어떻게 한다 등등 자연의 식생과 인간 문명의 관계를 다뤘습니다.
김
우리 고등학교 때 지리 시간에 그런 거 배웠죠.
임
또 특정 식물의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등을 공부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촌락 구조라든지 촌락에서의 명령 체계 등을 배웁니다. 이를 인류학적으로 풀면, 푸코의 문제 설정으로 보았을 때 일종의 ‘서식지’ 연구입니다. 서식지 개념으로 풀지 않으면 지리를 무대로 벌어지는 현상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김
사람한테도 서식이란 표현을 씁니까?
임
예, 약간 반인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웃음) 영어로 보면 이 서식지가 하비태트habitat입니다. 어떻게 먹고 누구와 같이 먹느냐 등을 다루는데 동물 연구에서 쓰는 서식지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김
정치지리학은 그렇고, 도시정치학은 또 뭔가요?
임
방금 언급한 ‘서식지’ 중에 ‘도시 서식지’란 말이 있는데, 영어로는 ‘urban milieu’, 도시환경이라고 주로 번역했습니다.
김
정치지리학에서 범위를 좁혀서 도시만 바라보는, 어떻게 보면 정치지리학의 세부 주제라고 봐야겠네요.
임
그렇죠. 그런데 도시지리학에서 이 부분(도시정치학)이 특히 중요해집니다. 지금 국가의 부, 세계의 부 같은 경제적인 부들이 엄청 빠르게 움직이고,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경제성장도 못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 안에서의 결정권, 그러니까 도시 권력이 세계 질서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런 면에서 도시를 더 부각시키며 조명하는 학문이 도시정치학입니다.
가령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갑자기 많이 등장한 시기는 1980년대 후반입니다. 여기에 김영삼 정권이 기름을 부었는데, 세계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 지금껏 그린벨트는 환경 정책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처음 아이디어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보니 그린벨트 지정까지 간 겁니다. 일종의 효과의 연쇄입니다. 이런 게 바로 정치지리학이나 도시정치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학문을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작은 현상을 가지고 설명을 하다 보면 이전에는 전혀 다른 사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염병과 동사무소의 출발
김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죠. 도시민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아닌 이상, 산 속에 들어가서 나물 캐 먹고 살 리도 없으니 누구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고 일상도 행정 편제를 따를 수밖에 없는데, 한국인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조직 단위가 이른바 도시의 경우는 동 아니겠습니까? 동에 얽힌 정치의 원리. 이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두괄식으로 가죠. 동에 얽힌 정치의 비밀, 이게 뭡니까?
임
처음 동은 자치 조직이었는데, 권력이 필요할 때면 행정조직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자치 조직으로 풀고 때 되면 다시 행정조직으로 바꾸었습니다. 전시 동원 체제라든지 배급 체제 같은 어떤 한 방향으로 주민들을 움직여야 할 때에는 동을 강한 행정 기계로 바꿔버립니다. 그러다가 동을 유지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 싶으면 이걸 자치 조직으로 바꿔서 너희 돈으로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거죠.
김
돈이 많이 들겠다 싶으면?
임
네, 왔다 갔다 했던 겁니다.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었죠. 권력이 필요에 따라 자치 조직과 유사한 여러 명칭을 붙여가면서 대중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활용했던 겁니다.
김
역사적으로 훑지 않을 수 없는데, 저는 시골 출신이라고도 말씀드렸으니 단순하게 드는 의문을 말씀드릴게요. 시골에 오래된 전통적 자치 단위, 옛날부터 내려오던 자치 단위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시대에까지 이를 텐데요.
임
고려 말까지 올라갑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에 태조가 송악의 철동에서 태어났다고 나옵니다.
김
지금의 개성이죠 송악이. 철동이 어디에요?
임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동이란 지역 명칭이 여기서부터 나옵니다. 이때부터 동은 존재했다고 봅니다. 학문적인 근거는 없습니다만 동을 쓸 때 물 수水 변에 같을 동同자를 쓰거든요. 그러니까 물을 같이 쓰는 사람들을 지칭했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역사학자는 아니니까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편의상 우물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그러고 보니 저 어릴 때에도 시골 마을은 우물 공동체였어요. 우물에서 온갖 정보가 교환되고 마을끼리 교류하고.
임
18세기에 출간된 『망우동지忘憂洞誌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도시의 향약과 같은 ‘동약’이 있는데, 보통 중인中人이 동을 말단 행정 관리인 서리처럼 관리하며 책임을 지고, 몇 개의 가문들이 하나의 동에 속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마을 협약 등을 다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동약, 동계 등 여러 명칭 속에서 ‘동’이 계속 쓰였던 겁니다.
김
물 대는 일로 집안끼리 싸움 나는 경우 많았어요.
임
유력한 두 가문이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했을 겁니다. 해당 가문의 중인들끼리 모여 번갈아 가면서 사무를 보았습니다. 이런 관행은 갑신정변 때 도시 행정구역이 설치되면서 공식화됩니다.
김
그럼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동사무소의 출현부터 이야기를 풀어가 볼까요. 지금은 동사무소가 안 보이죠?
임
예, 주민자치센터죠.
김
여기선 그냥 동사무소라고 부르기로 하죠. 동사무소가 일제강점기에 생겼는데 이게 콜레라 때문이라고요?
임
전 세계에 동사무소가 있는 나라가 얼마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유일하다시피 한데….
김
진짜요?
임
많은 분들이 ‘외국에도 동사무소 있어요?’라고 물어보시는데, 외국에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말단 행정기구를 둘 필요가 없으니까요.
김
그러면 행정구역 편제가 어떻게 돼 있는 거예요?
임
동보다는 조금 크고 구보다 조금 작은 게 기초단위죠. 역사적인 연원은 아직까지는 설입니다만,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전에는 ‘폴리스police’가 일반 행정 관료에 해당했습니다. 프랑스 역사에서 19세기 때 잠깐 ‘카르티에quartier’라는 구역이 생깁니다. 동네마다 경찰이 일반 행정을 본 시기입니다. 그때가 마침 메이지유신 끝나고 일본 사람들이 전 세계를 돌면서 제도를 수입할 때와 겹칩니다. 그때 프랑스로부터 경찰 제도를 도입합니다.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이후에 카르티에를 ‘정회町會’의 모델로 잠깐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
여기서 정町이라는 게 우리에게는 동이죠.
임
네, 일본 정회는 동회와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튼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동이라는 단위가 도입되었습니다.
김
그럼 일제 총독부가 이른바 동사무소를 이식시킨 겁니까?
임
아닙니다. 일단 당시에는 정이니까 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에는 정총대町總代라고 해서 지금으로 따지면 동장을 뽑았는데, 정총대는 행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업무가 딱히 정해져 있진 않았습니다. 경성부(서울시)에 왔다 갔다 하면서 행정을 보조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무소가 있을 리가 없죠. 그런데 1920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사무소 건물이 만들어집니다.
김
그런데 이게 콜레라하고 무슨 상관이 있었다고요?
임
1920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합니다. 당시에 콜레라가 부산을 통해 올라왔습니다. 일단 전염병을 처리하는 경찰의 방식은 좀 무식합니다. 전염되면 안 되니까 감염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왔다 하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해당 구역에 못 들어가게 하고 오염원들을 다 불태웁니다. 우물에다 약 타고 광은 다 태우는 식이죠. 양반들, 당시 귀족들 입장에선 자신의 재산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겁니다. 머슴 하나 병에 걸렸다고 하면 99칸이든 100칸이든 집안에 있는 광을 다 태워버려야 하니까 문제가 심각한 거죠. 경찰이 아주 단순하고 무식하게 일을 벌이면 큰일이라 부촌을 중심으로 몇몇 가문들이 모여서 ‘우리가 알아서 통제하겠다. 경찰 들어오지 마라.’ 하면서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마을에서 자기네들끼리 병자 관리를 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현대 사옥과 안국동 즈음에서 계속 망을 보면서 경찰이 못 들어오게 막고 안에서는 자체적으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삼청동 쪽에서 처음으로 여러 개의 동이 모여 사무소를 열고 사무소에서 위생 관련 업무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동사무소의 시초라고 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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