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언제나 그리운 빨간 자전거
오늘도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시골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다가, “여러분이 기다리던 만물상이 왔습니다. 라면, 식용유 있어요. 고등어, 꽁치도 있습니다.” 하며 물건 팔러 다니는 차를 만났다.
“수고 많으십니다. 오늘 많이 파셨어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마을에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네요.”
“그러면 회관으로 가보세요! 지금은 농한기라서 모두 거기 모여계실 겁니다.”
“아~아! 그렇구나! ‘이상하게 사람이 안 보인다!’ 했는데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1975년 7월 어느 날, 집배원을 시작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새내기 집배원이었던 나는 깔끔하게 다려 입은 회색빛 정복에 동그란 모자를 쓰고 빨간 자전거 핸들에 우편물이 든 큰가방을 걸고 우체국 문을 나섰다. ‘읍내에 나가면 사다 달라!’고 마을 사람들이 부탁한 물건을 구입하러 가까운 가게에 들러 2ℓ들이 소주 한 병과 라면 다섯 봉, 그리고 약국에 들러 뇌선이라는 약을 사서 자전거 뒤에 고무줄로 잘 묶은 다음,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렬하고 뜨거운 태양볕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을과 마을을 길게 이어주는 좁디좁은 시골길을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달려갔다. 얼마쯤 달렸을까? 갑자기 등 뒤에서 “어이! 우리 집 편지 읍는가?” 소리에 뒤돌아보다 그만 길 아래 고랑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 순간 자전거가 넘어지면서 고무줄이 풀리더니 소주병은 깨지고, 라면은 고랑으로 떨어져 흙에 처박히고, 뇌선이라는 약도 봉지에 흙이 묻어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깨끗하게 다려 입은 회색빛 정복은 물론 흙 범벅이 되었는데, 정작 나를 불렀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런 심부름은 아주 오래된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이제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의 몫이 되었다.
“아자씨! 혹시 태래비 고칠지 알아?”
“왜요? TV가 고장났나요?”
“이상하게 언저녁부터 태래비가 안 나오네!”
그래서 안테나선과 전원을 살펴봐도 어디가 고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할머니! 제가 TV를 고칠 수 없어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더니 기사가 내일 오후에 온다고 하네요. 그러니 심심하시더라도 그때까지만 참고 계세요!”
“알았어! 고맙소! 잉!” 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고마움과 아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우체구 아재! 우리 집이 전깃불이 안 들어온당께! 그것 잔 봐주고 가문 좋것는디!” 하셔서 방문 앞에 있는 전구를 빼내고 새것으로 갈아 끼웠더니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아이고! 아재 고맙소! 잉! 요새는 촌에가 젊은이는 읍고 맨 노인들만 살고 있응께 머시 고장나도 얼렁 와서 고쳐줄 사람이 읍당께! 바쁜 사람 붙잡어서 미안하요! 잉” 하시는 할머니의 푸념이 오늘날 시골마을의 형편을 잘 말해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온다.
내가 처음 집배원을 시작할 때만 해도 시골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 시절에는 희미한 초롱불 밑에서 연필이나 볼펜으로 기쁘고, 슬프고, 아름답고 예쁜 사연을 밤새도록 종이에 손으로 꾹꾹 눌러 쓴 다음 봉투에 넣고 밥풀로 우둘우둘하게 붙여 보낸 편지들이 많았다. 그 편지들을 큰가방에 가득 담아 시골마을로 달려가 대문 앞에서 빨간 자전거로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면 “우메! 우리 아들한테 편지왔제~잉!” 하시며 맨발로 달려 나와 반기던 시절이 있는데…….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휴대폰과 인터넷의 발달로 편지는 사라지고 세금고지서, 청첩장, 부고장을 배달하고 있으니 옛날에 비하면 인기가 많이 떨어진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시골의 인심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집배원들을 언제나 가까운 형제며 한가족이라고 여기신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은 내가 40여 년 동안 집배원 생활을 하면서 겪은, 기쁜 일은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은 함께 슬퍼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화해하고, 때로는 서로 도우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시골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진솔하게 적은 것이다.
여름
미숫가루 한 그릇
회천면 금광마을 가운데 집 대문 앞에 잠시 빨간 오토바이를 세우고 적재함에서 조그만 택배 하나를 꺼내 마당으로 들어서며 “계세요?”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이상하다! 왜 대답이 없지?’ 하며 다시 한번 “할머니~이! 어디 계세요?” 하고 큰소리로 부르자 “나 여깃서~어!” 하며 마을 앞 정자 쪽에서 부리나케 달려오신다.
“날씨가 무더우니 천천히 오세요!” 하였으나 어느새 대문 앞으로 달려오더니 숨이 턱까지 차오르시는지 ‘헉!~헉!’ 가쁜 숨을 내쉬고 계신다.
“천천히 오시라니까 뭐가 바빠 그렇게 달려오세요?”
“우리 집 찾아온 손님을 대문 앞에 세와노코 있으문 쓰것서? 그랑께 얼령 와야제!”
“오늘은 보청기가 왔나 보네요!” 하며 조그만 박스를 건네드리자 “보청기가 아니고 약이여! 약!” 하신다.
“약이라고요? 약은 엊그제 배달해드렸는데 무슨 약이 또 왔어요?”
“그 약은 내가 묵는 약이고 이 약은 내 보청기 약이여!”
“할머니 약은 종류가 많네요.”
“그랑께 말이여! 나는 무담시 약만 달고 산갑서!” 하더니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세요? 부끄럽게요!”
“날씨가 이라고 더운디 나 땀새 고상했는디 카만히 생각해본께 멋 줄 것이 한나도 읍네! 미안해서 으짜까?”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하세요?”
“그래도 이라고 더운 날 심바람을 했응께 입맛이라도 다시게 음료수라도 사다놔야 하꺼인디, 내가 멍충이라 그른 것을 알았어야 말이제!”
“괜찮아요.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저 그만 가볼게요.” 하고 마을의 가운데 골목에 우편물을 배달하고 나오는데 “아재! 여그 잔 왔다 가~아!” 하고 할머니께서 부르신다.
‘어? 무슨 일로 부르시지?’ 하고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자 “날 더운디 고생한 아재를 그냥 보내기가 써운해서 내가 우리 집이 있는 미싯가리 잔 탓응께 한 그럭 자시고 가!” 하신다.
“그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미안하게 그걸 또 타놓으셨어요?” 하고 할머니 댁으로 향하였는데, 밥그릇의 두 배쯤 되는 큰 그릇에 미숫가루를 타서 건네주시며 “늘근이가 탓응께 맛은 읍어도 그냥 자셔 잉!” 하신다.
“혹시 냉장고에 얼음 좀 없을까요?”
“어름? 어름은 멋할라고?”
“미숫가루가 별로 시원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래 잉! 그란디 나는 너머 찬 것은 안 조아한께 어름이 읍는디 으차까?”
“그러면 미숫가루는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물로 타셨어요?”
“그라문 냉장고 물로 타제 다른 물로 타문 쓰간디. 그란디 그것이 안 씨연하문 으차까? 그래도 미싯가리는 씨연한 맛에 묵는 것인디!” 하더니 갑자기 뒤꼍으로 가신다.
“날씨가 이렇게 무더운데 왜 자꾸 돌아다니세요?”
“아니~이 그것이 아니고 미싯가리가 안 씨연항께 미안해서 물외(오이)라도 한 개 따다 줄라고!”
“예~에! 또 오이를 따러 가신다고요?”
“날이 덥고 목이 모르고 그라문 물외를 갖고 댕김서 묵으문 좋드만 그래. 그랑께 아재도 이것 갖고 댕김서 목모르고 그라문 잡사봐!”
무더운 날씨 때문에 가끔은 짜증날 때도 있지만, 미숫가루 탄 물이 시원하지 않다며 오이를 따주시는 할머니 같은 분이 계시기에 금년 여름도 시원하게 넘길 것 같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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