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선 고양이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삼는 것은 이제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지만, 녀석들이 어떻게 야생고양이에서 집고양이로 자신을 변화시켰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우리 주변에 있는 동물 대부분은 실용적인 필요 때문에 길들여졌다. 소, 양, 염소는 우리에게 고기와 젖과 가죽을 준다. 돼지는 고기를, 닭은 고기와 달걀을 제공한다. 우리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동물인 개는 훌륭한 동반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냥을 돕고, 양 떼를 몰고, 집을 지키고, 무언가를 추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고양이는 위에서 언급한 어떤 동물보다도 유용하지 않다. 심지어 쥐를 잡는 동물이라는 전통적인 명성도 다소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고양이가 인간과 함께하면서 보여준 가장 실용적인 모습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므로 쓸모가 많은 개와는 대조적인 고양이가 어떻게 그토록 효과적으로 인간 문화의 환심을 사게 되었는지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연구는 고양이가 우리의 현관 앞에 처음으로 도착한 시점인 약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해야 할 것이다.
고양이 가축화의 기원: 쥐사냥꾼
대략 3500년 전 이집트에서 처음 고양이가 인간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적,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한 고양이 가축화에 대한 전통적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최근 분자생물학이 찾은 새로운 증거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집고양이와 야생고양이의 유전자를 검사해 그 차이를 살펴보면, 가축화가 1만5000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기원전 1만3000년에서 기원전 8000년 사이)에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 가축화의 시발점을 기원전 1만3000년 이전으로 보는 것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생각해볼 때 이치에 맞지 않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석기시대 인간이 고양이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양이 가축화는 최소 1만 년 전 무렵에 중동 몇몇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혹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있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8000년경에 고양이 가축화가 시작됐다고 가정한다면 이집트에서 발견된 집고양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볼 때 6500년이라는 공백이 생긴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인간과 고양이가 처음으로 함께하기 시작한 시점을 연구한 과학자는 분야를 막론하고 거의 없다.
고양이 가축화가 시작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중에 집고양이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이라크에서 시작해 시리아, 요르단, 지중해, 이집트 동쪽 해안까지 포함하는 ‘문명의 요람’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팔레스타인 예리코에서 발굴된 고양이 이빨과 뼈는,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6000년 사이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집고양이가 아니라 야생고양이의 것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에서는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고양이와 아주 유사한 동물이 묘사된 암벽화와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초기 집고양이 모습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림의 배경이 인간 거주지가 아니기에 덩치 큰 야생고양이의 모습일 가능성도 크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에 사람이 죽으면 개를 함께 묻는 순장이 일상적으로 행해질 만큼 인간과 개의 관계가 발전해 있었다. 반면 고양이를 함께 묻는 이집트의 순장 관습은 기원전 1000년경에 이르러서야 일반화된다. 그 시기에 이미 고양이가 반려동물이었다고 확정하려면 보다 명확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
인간과 고양이의 동반적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려주는 최고의 실마리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아니라 키프로스에서 찾을 수 있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에 있는 섬 가운데 하나로 해수면이 가장 낮았던 시기에도 본토와 연결된 적이 없었기에, 날거나 헤엄치지 못하는 동물들은 본토와 키프로스를 왔다 갔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약 1만2000년 전에 인간이 원시적인 형태의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갈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 시기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는 개를 제외하고는 가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키프로스 초기 정착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넌 동물들은 개인적으로 길들인 야생동물이거나 우연하게 배를 타게 된 ‘히치하이커’였음에 틀림없다. 본토의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양이 유골이 야생고양이 것인지 집고양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키프로스에서 발견된 고양이 유골은 모두 인간에 의해 어느 정도 가축화된 고양이의 유골일 것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고양이도 수영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기에, 키프로스에서 발견된 고양이 유골은 키프로스 초기 정착자들이 중동 본토에서 데려간 고양이의 것이거나 그 후손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키프로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양이 유골이 기원전 7500년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점도 이런 가능성을 높인다. 그 시대에 키프로스를 오가던 배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우연히 배에 올라탄 고양이가 키프로스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 눈에 들키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의 배는 분명 아주 작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키프로스에 사람이 정착한 이후 3000년 동안 고양이가 인간 거주지를 벗어나서 살았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키프로스 초기 정착자들이 이미 길들여진 고양이를 본토로부터 들여왔다고 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된다. 또한 그 사람들만이 야생고양이를 잡아서 길들이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크레타, 사르디니아, 마요르카 같은 지중해의 다른 큰 섬에서도 길들인 고양이를 들여온 증거가 발견되었다.
키프로스 초기 정착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어느 정도 길든 야생고양이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본토와 마찬가지로 키프로스에도 생쥐가 들끓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쥐라는 불청객은 식량이나 종자용 곡물을 담은 주머니에 기어들었다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게 되고, 그 생쥐들이 본격적으로 키프로스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10년 후나 100년 후부터, 정착자들은 길들었거나 반쯤 길든 야생고양이를 수입했을 것이다. 사실 고고학적 기록은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어쨌든 이런 추측이 사실이라면 본토에서는 약 1만 년 전부터 쥐를 통제하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는 관행이 생겼을 듯하다. 하지만 본토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양이 유골은 인간 거주지에서 발견된 것이라 해도 그곳에서 사냥하다 죽은 야생고양이의 것인지, 인간과 함께 살았던 고양이의 것인지는 구별할 수가 없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을 통제하기 위해 야생고양이를 길들이는 관행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집고양이를 기르는 경우가 드문 아프리카에서도 야생고양이를 길들이는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1869년에 백나일 강을 여행하던 독일의 식물학자이자 탐험가 게오르크 슈바인푸르트는, 어느 날 식물 표본을 담아둔 상자가 밤사이 설치류의 공격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 부근에 가장 흔한 동물 가운데 하나는 광활한 초원에 사는 야생고양이다. 원주민들은 녀석들을 가축으로 기르지는 않지만 아주 어린 고양이 여러 마리를 잡아서 자신들의 오두막과 울타리 주변에서 살게 한다. 고양이들은 그곳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쥐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나는 원주민한테서 그런 고양이 몇 마리를 얻었다. 며칠 동안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두자 녀석들의 야생성이 상당히 누그러진 것 같았고 실내에서 지내는 것에도 익숙해진 듯했다. 나는 밤이면 그 고양이들을 짐 꾸러미 주변에 두었다. 안 그러면 식물 표본을 담아둔 상자들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고양이 덕분에 더는 쥐의 약탈을 걱정하지 않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야생고양이를 키프로스로 들여온 초기 정착자들도 슈바인푸르트처럼 녀석들을 묶어놓아야 함을 알았을 것이다. 만약 풀어두었다면 녀석들은 재빨리 도망쳐서 키프로스에서 가장 위협적인 포식자가 되어 토착 동물 생태계를 사정없이 파괴했을 것이다. 수 세기 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즉 키프로스 정착자들이 키우던 일부 고양이들이 인간의 영역을 탈출해서 키프로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토착 동물들을 잡아먹었다. 공식 창고를 지키도록 묶어둔 고양이만 계속 인간 사회에 머물면서 정착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인간 거주지를 떠나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살아가던 녀석들의 후손 중 일부는 다시 인간에게 포획되어 살다가 때때로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양이의 부서진 뼛조각들이 키프로스의 신석기 유적지 몇몇 곳에서 여우나 집에서 키우던 개의 뼈와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야생고양이를 길들이는 관행은 곡물 창고의 곡물을 먹어치우는 생쥐가 출현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두 동물의 역사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생쥐는 전 세계적으로 30종이 넘는 쥐 가운데 하나지만 인간과 함께 사는 환경에 적응해 우리 식량을 축내는 유일한 녀석이다.
생쥐는 인류가 진화한 시점보다 훨씬 전인 100만 년 전부터 인도 북부 어딘가에서 살다가 먹이가 되는 야생 곡식이 분포된 지역을 따라 동쪽과 서쪽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일부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도달해 수확한 곡식이 엄청나게 쌓여 있는 곡물 창고를 만나게 되었다. 그 증거로 한 이스라엘 유적지의 저장 곡물 사이에서 발견된 1만1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생쥐 이빨, 시리아에서 발견된 95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생쥐 머리가 조각된 돌 목걸이를 들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건물은 이렇듯 뜻하지 않게 생쥐에게 풍부한 식량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최적의 보금자리 역할도 해주었다. 야생고양이 같은 포식자를 피할 수 있고 습하지 않고 따뜻해서 새끼를 키우기에도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인간과의 은밀한 동거’에 적응할 수 있었던 생쥐는 번성한 반면, 적응하지 못했던 녀석들은 멸종되었다. 이러한 자연선택의 결과, 오늘날 생쥐는 인간의 거주지 밖에서는 거의 번식하지 못한다. 숲쥐와 같은 거친 경쟁자들이 있는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간은 또한 생쥐가 새로운 지역을 서식지로 개척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현재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남 지역에 서식하는 쥐들의 선조들은, 아마도 그 일대의 공동체 사이에서 거래되던 곡물 속에 숨어 있다가 뜻하지 않게 그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곡물 교역은 근동 지역 전역, 지중해 동쪽 연안 지역과 키프로스 같은 인근 섬들 사이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생쥐로 인해 최초로 괴로움을 겪게 된 문명은 나투프Natuf 문명〔팔레스타인의 중석기시대 문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나투프인들이 고양이가 우리 곁으로 오기까지의 긴 여행을 시작한 듯하다. 나투프인들은 기원전 1만1000년경부터 기원전 8000년경까지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서남부, 레바논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살았다. ‘농사의 발명가’라고 널리 알려진 그들도 처음에는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활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주변에 풍부하게 자라고 있는 야생 곡물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 지역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옥한 땅이었다. 수확량이 점점 늘어나자 나투프인들은 낫을 발명해냈다. 나투프인 거주지에서 발견된 낫은 날 표면이 닳아서 반들반들한데 밀, 보리, 호밀 같은 야생 곡식의 거친 줄기를 베느라 그렇게 된 것 같다.
초기의 나투프인들은 작은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바닥과 벽이 돌로 되어 있고 지붕에는 잔가지가 덮여 있는 것이 그들의 집이었다. 나투프인들은 기원전 1만800년경까지는 곡물을 심지 않다가, 급격한 기후변화가 있었던 영거 드라이아스기The Younger Dryas가 약 1300년 동안 지속되자 밭을 갈아 곡물 재배를 시작했다. 수확한 곡식의 양이 증가하자 저장고가 필요해졌고, 그래서 그들은 진흙 벽돌로 자신들의 집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모양의 곡식저장고를 만들었다. ‘생쥐의 역사’에서 인간이 곡식 저장고를 발명한 것보다 획기적인 사건이 있을까? 먹이가 풍부하고 다른 포식자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이 신세계에 첫발을 디딘 생쥐는, 결국 인간과 함께 살면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최초의 포유류가 되었다.
개체 수가 증가하면서 생쥐는 자연적으로 포식자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당시 생쥐를 노리던 포식자로는 여우, 자칼, 독수리나 올빼미 같은 맹금류, 나투프인이 키우던 개 그리고 야생고양이가 있었다. 야생고양이는 다른 포식자들과 구별되는 두 가지 장점이 있는데 하나는 아주 민첩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야행성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야행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야생고양이는 어둑어둑해지면 활동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생쥐를 사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야생고양이가 오늘날의 야생고양이처럼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새롭고 풍성한 먹이의 원천인 저장고를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했을 것이다. 즉 당시의 야생고양이는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덜했다.
나투프인이 의도적으로 고양이를 길들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고양이가 인간 거주지에 나타난 이유는 생쥐와 마찬가지로 농사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새로운 먹이 자원을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재배하는 농작물 종류와 키우는 가축 종류도 늘어나 더욱 정교하게 발전한 나투프인의 농경문화는 다른 지역과 문명에까지 퍼져 나갔고, 고양이 번식지도 그 경로를 따라 확장되었다. 고양이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 거주지 환경에 더욱 잘 적응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오늘날의 반려고양이와 같아진 것은 아니었다. 인간 거주지로 내려와 들끓는 쥐를 마음껏 잡아먹었던 녀석들은 본질적으로 야생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늘날의 도시 여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양이의 가축화는 그때로부터 한참 이후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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