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944년 8월 7일
전단
땅거미가 지자 그것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것들은 바람에 날려 성벽을 가로지르고, 옥상에서 옆으로 재주를 넘고, 펄럭거리며 집들 사이로 들어간다. 자갈과 대비되어 희게 번뜩이며 온 거리마다 소용돌이친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주민에게 긴급히 전합니다. 지금 즉시 공터로 가십시오.
파도가 엉금엉금 밀려온다. 작고 노란 달이 볼록하게 차올라 걸린다. 동쪽 해변 호텔 옥상과 호텔 뒤 정원에서 미국 포병단 소속 군인 여섯이 박격포 주둥이에 소이탄을 떨어뜨려 넣는다.
폭격기
자정, 그것들이 해협을 건넌다. 모두 열두 대로, 이름은 노래에서 따왔다. 스타더스트, 스토미 웨더, 인 더 무드, 피스톨 패킨 마마. 아득한 아래, 바다가 V 자로 흰 파도를 무수히 튀기며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어느 정도 오자 조종사들은 수평선을 따라 놓인, 달빛 어린 덩어리들 같은 섬들을 포착할 수 있다.
프랑스.
인터콤이 치직 소리를 낸다. 용의주도하게, 게으르다 싶을 정도로 폭격기들이 고도를 이탈한다. 붉은 빛줄기들이 대공 포좌에서 떠올라 해안을 오르락내리락한다. 거무스름한, 망가진 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도망치거나 파괴되는데, 하나는 이물이 부서져서, 다른 하나는 불에 타면서 불길이 어른거린다. 가장 바깥쪽 섬에선 공포에 휩싸인 양들이 바위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한 대에 한 명씩 탄 폭격수는 조준창을 들여다보며 스물까지 센다. 넷, 다섯, 여섯, 일곱. 폭격수들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화강암 곶 위 성벽 도시는 불경한 이빨, 검고 위험한 것, 자르고 짜내야 할 마지막 종기처럼 보인다.
소녀
그 도시 구석, 보보렐 거리 4번지의 높고도 좁다란 집 맨 위 층인 6층에, 앞을 못 보는 열여섯 살 소녀, 마리로르 르블랑이 모형 하나로 곽 찬 낮은 테이블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녀가 다가가 앉은 모형은 그 도시의 축소판으로, 성벽 안에는 작은 집과 가게, 호텔 수백 채가 들어 있다. 구멍이 숭숭 난 첨탑이 솟은 성당, 육중하고 오래된 생말로1) 성, 해안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굴뚝 달린 저택들. 몰이라는 해변에 가느다란 나무 방파제 하나가 활처럼 비어져 나와 있다. 촘촘한 그물 같은 아트리움이 어시장 위로 둥근 지붕을 드리웠다. 극미한, 사과 씨앗 크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벤치들이 앙증맞은 광장에 점점이 놓였다.
마리로르의 손가락 끝은 성곽 꼭대기의 몇 센티미터짜리 난간을 훑으면서, 모형 가장자리를 따라 울퉁불퉁한 별을 그린다. 그녀는 트인 성벽 꼭대기에 바다를 향해 놓인 의식용 대포 네 개를 발견한다.
“네덜란드 요새.” 그녀는 속삭이듯 말하고, 손가락으로 작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코르디에 거리. 자크카르티에 거리.”
방 한쪽 구석엔 가장자리까지 물이 가득 찬 아연 양동이가 두 개 놓여 있다. 물을 가득 채워 놓으렴, 할 수 있을 때마다. 그녀의 작은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다. 3층 욕조에도 채워 둬. 물이 또 없어질지 누가 아니.
그녀의 손가락은 다시 성당 첨탑으로 올라간다. 남쪽 디낭 성문으로 간다. 그날 저녁 내내 그녀는 행군하듯 손가락으로 모형 여기저기를 쓸었고, 이 집 주인이자 전날 밤 그녀가 자는 동안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을 기다렸다. 이제 다시 밤이 되었고, 시계는 또 한 번 한 바퀴를 돌았으며, 온 거리가 고요한데, 그녀는 잠이 오지 않는다.
폭격기가 5킬로미터 정도 가까이 오자, 그녀 귀에도 소리가 들린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잡음. 조개껍데기에서 웅웅 울려 나오는 소리.
그녀가 침실 창문을 열자 비행기 소리는 더 커진다. 그 소리만 아니면 밤은 몹시도 고요하다. 엔진도, 목소리도, 털커덕거리는 소리도 전혀 나지 않는다. 사이렌 소리도 없다. 자갈길을 내딛는 발소리도 없다. 갈매기조차 울지 않는다. 여섯 층을 내려가 한 구역 떨어진 곳, 도시 성벽 밑에서 높게 찰싹이는 바닷물 소리뿐.
그리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매우 가까운 곳에서 가만히 달가닥거리는 어떤 것. 그녀는 왼쪽 덧문을 느슨하게 열고 오른쪽 널 위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쓸어본다. 종이 한 장이 꽂혀 있다.
그녀는 종이를 코에 갖다 댄다. 갓 마른 잉크 냄새가 난다. 휘발유일지도 모른다. 종이가 빳빳한 것을 보니 밖에 놓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리로르는 스타킹을 신은 채, 창가에서 머뭇거린다. 그녀 뒤로는 침실이, 장식장 맨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조개껍데기들이, 벽 아래 나란히 놓인 조약돌들이 있다. 그녀의 지팡이는 구석에 서 있다. 커다란 점자 소설책은 침대에 얼굴을 묻고 그녀를 기다린다. 우르릉거리는 비행기 소리가 점점 커진다.
소년
그곳으로부터 북쪽 다섯 번째 거리, 열여덟 살의 흰머리 독일군 이등병, 베르너 페닝이 희미하게 스타카토로 끊어지며 웅웅 울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총에 바르는 기름에서 들큼히, 은은히 풍기는 화학 약품 같은 냄새. 생나무로 새로 만든 포탄 상자. 오래된 침대보에서 나는 고약한 좀약 냄새. 그는 호텔에 있다. 당연하다. 아베유 호텔, 꿀벌 호텔2).
아직 밤이다. 아직 이른 시각이다.
바다 쪽에서 호루라기를 불어 대는 소리와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공포가 설치되고 있다.
하사 한 명이 복도를 따라 급히 내려가 층계참을 향한다. “지하실로 가.” 그는 어깨 너머로 소리치고, 베르너는 손전등을 켜고 담요를 말아 더플백에 넣은 후 현관으로 가기 시작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예전에, 꿀벌 호텔은 정면에 선명한 파란색 덧문이 달려 있고, 안쪽 카페에선 얼음에 얹은 굴을 팔며, 바 뒤에선 브르타뉴 출신 웨이터가 보타이를 두르고 유리잔을 닦는 흥겨운 곳을 지칭했다. 바다가 보이는 객실이 스물한 개 있었고, 로비에는 트럭만 한 벽난로가 있었다. 주말을 맞이한 파리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아페리티프를 마셨고, 그들 이전에는 공화국의 특사─장관, 차관, 수도원장, 제독─들이 이따금씩 찾았으며, 그들보다 한 세기 전에는, 바람에 피부가 거칠어진 해적들, 즉 살인자, 약탈자, 침입자, 뱃사람 들이 왔었다.
그전에는, 호텔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무려 5세기 전에는, 사나포선3)을 갖고 있는 어떤 부유한 사람의 집이었다. 그는 다른 배를 공격하는 짓을 그만둔 후, 생말로 외곽 초원의 꿀벌들을 연구하느라 공책에 글을 휘갈겨 쓰면서 벌집에서 딴 꿀을 그 자리에서 먹었다. 문에 달린 상인방 너머 산마루엔 여전히 오크나무에 구멍을 뚫고 사는 호박벌들이 있다. 안뜰,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분수대는 벌집 모양이다. 베르너가 가장 좋아하는 건 웅장하기 그지없는 위층 방들 천장에 그려진 희미한 프레스코화 다섯 점으로, 푸른 바탕에 어린아이만 한 꿀벌과 날개가 투명한 크고 게으른 수벌과 일벌들이 떠다닌다. 육각형 욕조 위 천장에는, 눈이 여러 개에 배에는 황금 털이 난 3미터는 될 법한 여왕벌이 둥글게 걸쳐져 있다.
지난 넉 주 동안 이 호텔은 다른 곳으로 변했다. 이제는 요새다. 오스트리아 대공 부대원들이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판자로 막았고, 침대들도 전부 뒤집어 놓았다. 그들은 입구를 보강했고, 층계참엔 포탄 상자를 가득 쌓아 놓았다. 성벽과 마주한, 정원 쪽으로 발코니가 난 호텔 4층 바닥은 10킬로그램짜리 포탄을 15킬로미터 밖까지 발포할 수 있는 88이라는 고속 대공포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여왕 폐하. 오스트리아 군인들은 대포를 이렇게 불렀다. 지난 한 주 동안 이 사내들은 일벌이 여왕벌을 돌봤음 직한 방식대로 대포를 관리했다. 기름을 먹이고, 포열을 새로 칠했으며, 바퀴에 기름을 쳤다. 그리고 발치에는 공물을 바치듯 모래주머니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여왕의 아흐트 아흐트4),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군주는 그들 모두를 수호할 것이었다.
베르너가 층계참에서 1층까지 반쯤 내려갈 즈음, 88 대공포가 연달아 두 번 발포한다. 그가 그렇게 가까이에서 대포 소리를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어서 호텔 위 반이 뜯겨 날아갔나 싶을 정도로 크다. 그는 발을 헛디디고 두 팔을 내뻗어 귀를 감싼다. 성벽 전체가 쩌렁쩌렁 분수까지 올려 대다가 잠시 후 소리는 물러간다.
두 층 위에서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신속히 움직이며 재장전하는 소리와 포탄 두 개가 바다를 향해, 이미 4~5킬로미터 밖까지 돌진하면서 멀어지는 굉음이 베르너의 귀에 들린다. 군인 중 하나가 노래하고 있음을 그는 알아차린다. 아니 한 명 이상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덟 명의 루프트바페5)는 그들의 여왕에게 바치는 연가를 부르고 있지만 바로 그 시간, 살아남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베르너는 손전등 빛줄기를 좇아 현관 끝까지 간다. 거대한 대공포가 세 번째로 발사되자 근처 어딘가에서 유리가 깨지고, 연기가 굴뚝으로 마구 뿜어져 나와 쿨럭쿨럭 내려가며, 호텔 벽은 종처럼 울린다. 베르너는 그 소리에 자기 이가 부러져 잇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건 아닐까 두려워진다.
그는 지하실 문을 끌어당겨 열고, 그곳에서 유영하고 있는 것에 눈길이 잠시 멈춘다.
“끝인가?” 그가 묻는다. “정말 그들이 오고 있는 건가?”
그러나 거기 있는 어느 누가 대답해 줄 것인가.
─
1)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해안 도시.
2) 호텔 이름 ‘아베유’는 프랑스어로 ‘꿀벌’이라는 뜻이다.
3) 교전국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민간 소유 배.
4) ‘88’이라는 뜻의 독일어.
5) 나치스 시대의 독일 공군.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