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초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나다
어머니가 치매 증상을 보인 것은 4년 전부터였다. 어머니는 텔레비전이나 에어컨 사용법을 까먹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친아들인 나에게 종종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아저씬 누구슈?”한밤중, 고함에 놀라 잠에서 깬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다. 나를 부르는 건 아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자다 깨서 머리가 묵직한 채로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다. 머릿속은 안개가 자욱이 낀 것처럼 흐리고 무겁다. 몸도 머릿속만큼이나 묵직하다. 어머니에게 가보지 않으면 밤새 저렇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별 수 없이 일어나 어머니 방으로 가본다.“왜 그래.”내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쳤을 것이다. 어머니도 그걸 잘 안다. 그래도 내가 살피고 나면 겁을 잔뜩 집어먹었던 어머니 눈이 아주조금이나마 안정될 때가 있다. 어머니가 그대로 다시 잠이 들어주면 나도 아침까지 몇 시간만이라도 다시 잘 수 있다. 그러나 내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못 가 어머니가 다시 고함을 지를 때도 자주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뜬눈으로 밤을 보내기 일쑤다.1년 반 전에 나는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잠이 모자란 탓에 실수가 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 혼자 집에 두고 집을 나서는 것조차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사다 놓은 통조림을 어머니가 따지 않은 채 그대로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데우는 바람에 불이 날 뻔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근처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간다고 집을 나섰다가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경찰차 신세를 지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 곁에 있기로 결심한 뒤에도 나는 아주 잠깐 일을 쉬며 어머니를 돌본 뒤에 최대한 빨리 일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바람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고용보험의 실업급여 지급이 끝날 무렵부터 나는 다급해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재취업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단 한 군데서도 채용 결정 통보를 보내오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어머니의 연금에 의지해 생계를 꾸렸다. 그때부터 나를 보는 이웃들 시선이 점차 싸늘해지는 듯 느껴졌다. 누나의 아이들도 이런 나를 깔보는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서, 내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내가 괜히 착각하는 것일 뿐일까.어려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친구들은 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나만 못 들어가면 어쩌나 끙끙 앓았던 적이 있다. 다행히 입시에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만약 그때 입학에 실패했다면 아마 지금 내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이 사회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나만 뒤처진 느낌이다. 주변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아주 얇지만 절대 찢을 수 없는 막이라도 있는 듯이 직접 만지거나 대화를 나눌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웃으며 서로 어울리는데 나는 그 웃음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 우울한 생활, 우울한 가정, 우울한 세계 속에 나와 어머니가 떨어져 살고 있다.어머니와 둘이서 지낸 지도 20년 가까이 되어간다. 그동안 결혼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과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독신이다. 독신이라는 내 생활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더욱이 지금은 결혼하고 싶다는 갈망도 많이 사그라졌다.어머니는 나보다 먼저 돌아가실 것이다. 아니, 먼저 돌아가셔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큰일이다. 그렇지만 그 죽음이 과연 언제 닥칠지 모른다. 당장 내일 일일지도 모르고 10년 후에나 맞게될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현실이 내 머릿속에 또 안개를 자욱하게 드리운다.가끔 생각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식탁에 음식을 질질 흘리는 어머니에게 “적당히 좀 하란 말이야” 하고 짜증을 내며 어서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다 보면,그건 또 그것대로 암담한 질문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취업은 할 수 있을까, 다시 평범한 직장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오랫동안 쉬었는데 주변 사람들과는 다시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앞으로도 계속 나 혼자서 살아야 할까.지금도 고통이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느 쪽으로 바뀌더라도 지금과는 또 다른 고통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은 가상의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꾸며낸 것은 아니다. ‘독신자가 친족을 돌보다 지쳐서 그만…….’ 이런 이유로 저질러진 사건이 최근 몇 년 새 빈발했다.
2012년 6월, 도쿄 네리마 구에 사는 43세 남성이 치매에 걸린 여든의 어머니 목을 졸라 살인미수로 체포되었다. ‘화장실 시중을 드느라 밤중에 몇 번이고 일어나야 해서 수개월 동안이나 수면 부족에 시달린 끝에 욱하고 말았다.’ 이것이 그가 어머니 목을 조른 이유였다. 피해자인 어머니는 의식불명 상태였다가 사건 발생 다음 달에 결국 사망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이시카와 하쿠이 시에 사는 75세 여성이 여덟살 많은 83세 언니의 목을 졸라 역시 살인미수로 체포되었다. 가해자인 여동생 혼자서 치매에 걸린 언니를 돌보고 있었다. 피해자인언니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2월에는 도쿄 하치오지 시의 개호노인 보건시설(자택에서 자력으로 생활하는 상태까지 회복하지 못한 환자를 입소시켜 심신 재활 훈련과 식사 등 일상생활의 개호 등을 돕는 시설—옮긴이)에 입소한 여든여덟 살 여성이 목이 졸려 사망했다. 범인은 예순세 살 여성, 피해자의 맏딸이었다. 가해자는 오랫동안 누워만 있는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범행 동기를 밝혔다.
역시 12월 도쿄 아다치 구에서는 예순의 무직 남성이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이 돌보던 아흔두 살 어머니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피해자인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그의 살인 동기도 위의 사건과 엇비슷했다. ‘어머니가 밤중에 비명을 지를 때도 있고 도통 잠을 자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서 그랬다.’
이 예시들은 최근까지 벌어진 여러 사건 중 아주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비참悲慘’한 사건이다. 그런데 ‘참혹’하다는 느낌보다는 ‘슬픔’ 쪽에 더 가까운 감정이 느껴지는 사건이다. 어떤 형태든 개호는 그동안 살아오던 일상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다. 돌보는 일을 맡은 사람이 기혼자든 독신자든 마찬가지다. 남편의 부모를 돌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부부 싸움이 끊이지 않는 부부의 이야기는 텔레비전 드라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혼자가 아닌 독신자가 부모를 개호할 때 이 ‘슬픔’의 색채는 더 진해진다.
가족 사이에서 개호로 불거진 갈등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는 아리요시 사와코의 소설 《모록》 이래 다양한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가족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면 적어도 ‘부부 싸움’이라는 형태로나마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그러나 독신자가 누군가를 개호할 때는 자기 자신과 개호 받는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극도로 옅어진다. 혼자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한마디로 끝도 없이 고독하다. 위에서 소개한 사건 보도를 보면 이런 느낌은 더 강해진다.
비록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는 ‘참혹’에 이르기 일보 직전인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올라온다.
자신을 47세 남성이라고 밝힌 사람이 어느 질문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그는 30대 중반부터 부모님을 개호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반신마비고 어머니는 하반신이 약해 거동이 불편한 탓에 그가 혼자서 집안일을 도맡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일과를 소개하며 한탄했다. ‘매일 아침 네 시 반에 기상, 일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면 새벽 무렵에나 취침. 그런 생활을 12년 동안 반복했습니다.’ 한때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던 상대가 있었으나 결혼을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 도저히 결단을 내리지 못해 끝내 헤어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문득 ‘내 인생에는 결혼이라는 단어는 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고도 했다. 이런 사연 끝에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을까’ 하고 사이트 방문자들에게 질문하는 글이었다.
또 매우 드물게도 10대 때부터 부모를 개호하기 시작했다는 어느 40세 여성도 같은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지금까지 남성과 사귄 경험은 여러 번 있었지만, 늘 부모님 상태를 먼저 따지느라 엇갈림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연인과 거리가 생겨 역시 이별로 끝났다. 돌보는 일도 문제지만 경제적으로도 내가 온전히 가계를 책임지고 있어서 지금으로서는 부모님과 동거하는 길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모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각오하고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혹시라도 좋은 파트너를 만난다면 남은 인생은 그와 함께 살고 싶다.’
이런 체험담이 인터넷에 넘쳐나고, 각 사연마다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덧붙는다.
고령화와 1인 가구가 만났을 때
독신자의 개호를 ‘싱글 개호’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최근 들어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독신자의 개호가 실제로 늘어나고 있을까. 이런 항목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조사한 통계는 아직 없지만 국세조사나 인구동태조사 등에서 파악한 숫자로 현상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미혼율부터 보자. 미혼율은 1970년 이래 매년 꾸준히 상승했다. 2010년 기준으로 25세부터 29세에 해당하는 인구 중 미혼인 사람의 비율은 남성이 71.8퍼센트, 여성이 60.3퍼센트였다. 이 수치에서 현재까지 보합세, 즉 고공 행진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 숫자만 따지면 단순히 만혼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초혼 연령 평균은 2011년에 남성이 30.7세, 여성이 29.0세였다. 2010년과 비교해 1년 동안 남녀 모두 0.2세 상승한 수치고, 60년 전인 1950년과 비교하면 5, 6년 늦어졌다.
초혼만 늦어진 것이 아니다. 아예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늘었다. 50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이것을 ‘생애미혼율’이라고 한다)을 살펴보자. 남성의 생애미혼율은 2005년 16.0퍼센트에서 5년 후 20.1퍼센트로 상승했고 같은 기간에 여성은 7.3퍼센트에서 10.6퍼센트로 상승했다. 즉 초혼 연령이 늦어지는 것과 함께 ‘결혼하지 않는’ 사람, ‘하지 못하는’ 사람도 늘었다.
2005년 기준으로 전체 세대 중에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세대는 29.8퍼센트였다. 한편 1인 세대는 29.5퍼센트여서 비율이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5년 후인 2010년에는 생애미혼율이 더 상승해 이 비율이 뒤바뀌었다. 즉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세대보다 1인 세대가 더 많아졌다.
어느 결혼상담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최고급으로 꼽히는 결혼정보회사다. 나는 중장년 회원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항목으로 ‘개호’를 포함하는지 궁금했다. 상담소 직원은 회원들이 아직 개호를 배우자 선택 조건으로 직접 꼽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부모와의 동거’ 여부는 예전부터 선택 항목에 들어 있었지만, 아직 대놓고 개호를 언급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였다. 언젠가 배우자를 고르는 조건 중 하나로 부모 개호 여부가 추가될지 묻자 상담소 직원은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만남 전에 그런 항목을 명확하게 표기하거나 상대에게 전달할지는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야 그렇다. 이미 개호하는 중이라면 몰라도 가까운 미래에 부모를 개호하게 될지 그러지 않을지는 장본인도 막상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알 턱이 없다. 더욱이 가능성만 놓고 따진다면 개호해야 할 부모가 있느냐는 질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가능성 있음’이라고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상담소에서는 최근 ‘유턴’을 전제로 결혼 상대를 찾는 신청자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도쿄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와 살 계획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런 계획에 따라 자신의 고향에 거주하는 회원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향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 중 일부는 본가에서 살 생각일 테고, 그중에 또 일부는 부모와 동거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한편 평균수명은 2012년 후생노동성 조사를 기준으로 남성이 79.94세, 여성이 86.41세였다. 이 수치는 앞으로 크게 늘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급격히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즉 앞으로도 초고령사회는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 생애미혼율이 더욱 증가한다면 독신자가 부모를 개호하는 싱글 개호 또한 증가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것이 악순환이 되어 독신자의 결혼에 방해 요소가 되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된다.
재택 개호를 뒷받침하는 쪽으로 제도가 바뀌고 있다
2000년 4월 1일부터 일본에서 개호보험제도가 시작되었다.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개호가 필요한 사람을 사회 전체가 보살핀다는 이념을 내걸었다. 이런 제도를 시행하게 된 이면에는 사회적 입원이라는 문제가 있다. 사회적 입원에 따라 노인 의료비가 늘어나고, 재원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기에 고령자를 개호 상태에 이르지 않게 예방하고, 가급적 집에서 돌보도록 유도하는 것이 개호보험제도의 중심이다. 개호보험법은 지금까지 세 차례 개정되었고 개정할 때마다 24시간 서비스가 추가되는 등 ‘재택 개호’를 보편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개호만이 아니라 의료도 재택 서비스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재택 의료의 진료보수 재검토가 진행되면서 노인이 자기 집에서 진료를 받는 일이 전보다 나아졌다. 이전까지는 나이 든 부모가 쓰러지거나 치매에 걸려 개호가 필요하게 됐을 때, 시설 입소부터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자리에서 집에서 모시지 않고 시설에 맡기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전까지는 사회적인 통념과 현실에 따라 그런 방식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노부모를 맡기는 시설도 이전에는 노인홈처럼 요양과 개호가 모두 가능한 시설이 아니라 아예 병원에 입원시켜 그곳에서 임종까지 맞는 경우가 많았다. 30년쯤 전에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도 그런 과정을 거친 뒤에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개호가 필요한 고령자를 최대한 집으로 돌려보낸다. 가족이 중심이 되어 고령자를 돌본다. 그리고 지역이 지역포괄 케어시스템(요양보험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관리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기초자치단체에서 관리한다. ‘포괄케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시스템이 노인들의 간병 부담을 완화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장기요양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를 연계했기 때문이다—옮긴이)을 통해 가족을 도와준다. 현대의 개호는 이런 형태다.
후생노동성 국민생활 기초조사 결과를 보면 2010년 현재 개호를 받는 쪽과 개호자의 관계는 25.7퍼센트가 배우자, 20.9퍼센트가 자녀다. 15.2퍼센트는 자식의 배우자가 돌본다. 여기에 부모나 기타 친척이 개호자인 경우를 포함하면 가족인 동거자가 개호하는 경우가 전체의 64.1퍼센트다.
집에서 개호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맨 먼저 가족 중에서 ‘누가 보살필 것인가’를 정한다. 이때 개호자로 가장 먼저 꼽힐 사람은 돌봐야 하는 다른 가족이 없는 독신자다. ‘개호 독신’이란 초고령사회라는 흐름과 만혼화, 비혼화라는 흐름이 만난 지점에서 생긴 멈출 수 없는 소용돌이다. 그렇기에 독신자가 부모를 돌보는 것, 개호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 시점이 왔다.
시작은 제각각이지만 결말은 모두가 똑같다
누워만 있는 부모를 개호할 때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일이 필수로 따라온다. 그럴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적함과 암울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방을 가득 채운 배설물 냄새, 바닥에 너저분하게 흘린 음식물, 시시때때로 이를 치우고 갈아 끼우고 닦아야 하는 자신의 육체적인 괴로움.
그런데 이런 괴로움과 힘겨움은 고령자를 돌볼 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갓난아이를 돌볼 때도 마찬가지 감정이 생긴다. 그렇다면 고령자를 돌보는 일과 갓난아이를 돌보는 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종종 제기되는 것이 개호는 ‘갑자기’ 닥쳐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갓난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임신부터 태어날 때까지 10개월이라는 기간이 있다. 이 시간은 새로 태어날 아기를 돌보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물질적인 것들을 미리 준비하는 기간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아이가 태어난 후 일어날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 미리 시뮬레이션을 하고 또 한다. 반면에 개호는 전혀 짐작도 못한 상태에서 함정에 빠진 것처럼 갑자기 닥치는 일이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허둥거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간다. 허둥대는 동안 개호를 받는 사람이 앓는 병세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적응했다 싶으면 상황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는 일이 다반사라 개호자는 항상 뒤를 쫓는 식으로 개호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개호 현장을 본 나로서는 개호의 괴로움이 반드시 갑자기 닥치는 상황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맞닥뜨려 내몰리듯 시작한 개호라도 사람은 현실에 익숙해지는 법이다.
개호가 갓난아이 양육과 비교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다. 돌보는 대상인 고령자와 갓난아이가 지닌 ‘미래’의 차이다. 고령자를 돌보는 일의 마지막에는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좋든 싫든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 게다가 죽음은 개호자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티고 있기도 하고 뺨을 스치듯 가깝게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져가기도 한다. 죽음이 선명하게 느껴질 때마다 개호자는 공포에 떨고 분노에 휩싸인다. 갓난아이에게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휘황찬란한 미래가 펼쳐져 있다. 기어 다니다가 제 힘으로 일어나 걷기 시작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 생명으로서 성장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되므로 돌보는 사람에게도 의욕이 생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차이가 있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회에 바람직한 행위라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다. 동네 아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육아는 제도적으로도 보장받는 일이다. 그러나 고령자 개호를 떠안은 사람이 축복받는 경우는 없다. 주변에서 인정해주지도 않는 일이다. 따사로운 듯한 시선도 그저 동정과 연민이 담겨 있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지금 이 개호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일까?’ 개호자는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이런 질문을 던지며 묵묵히 노부모를 돌본다. 개호자의 마음속에는 이건 어차피 헛수고다, 너무 지쳐서 힘들다는 생각이 늘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시시때때로 흙탕물처럼 들고일어난다. 개호자가 느끼는 우울의 근원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노부모를 보살피는 일은 이렇듯 죽음을 향한 과정이라는 괴로움과 버거움이 있다. 독신으로 개호하는 사람은 이 암담함을 오로지 혼자 떠안아야 한다.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만났던 독신 개호자들 역시 ‘모든 결단을 혼자 내려야만 한다’라는 점이 고민이자 고통이라고 했다. 독신으로 개호하는 사람 대부분은 부모와 자식 둘이 사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어떤 상태인가, 어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지병이 있으면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약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정작 당사자인 개호를 받는 부모는 치매에 걸린 상태가 아니라 해도 대체로 이런 사안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모든 결단은 개호자 몫으로 맡겨진다.
개호하는 사람, 개호를 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분리된 것 같다고 느끼는 걱정, 불안, 초조 같은 감정은 어느 독신 개호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무인도에 있는 듯한’ 고독감을 동반하고 찾아온다. 물론 공적인 서비스는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양심적이고 헌신적인 사회복지사가 적은 것도 아니어서 상담을 원한다면 기꺼이 응해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만난 독신 개호자들은 고립감 탓에 늘 괴롭다고 호소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뻗어올수록 고립감은 더욱 깊어진다.
육아 노이로제가 중요한 문제로 다뤄진다. 하물며 죽음을 상정한 개호가 돌보는 이에게 노이로제를 유발하지 않을 리 없다. 그중에서 ‘슬픔’이 ‘참혹’으로 발전한 케이스가 바로 ‘개호에 지쳐서 저지른 살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똑같은 상황이라도 ‘슬픔’을 ‘참혹’으로 바꾸지 않고 굳건히 버티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초고령사회가 도래하고 개호 자체가 남의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 되면서 젊은 세대나 중장년만이 아니라, 이미 나이를 먹은 노인 역시 같이 사는 노인을 돌보는 ‘노노 개호’라는 이름에 발목을 잡힐 가능성이 있다. 즉 남녀노소 누구도 이제 개호와 무관하게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중에서도 홀로 부모를 개호하는 이들에게는 특수한 속박이 한 가지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속박에 대한 처방은 현재 시점에서 어떤 기관에서도 내놓지 못했다는 점도 덧붙여야만 하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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