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도망자 무리를 이끄신 뜻은?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지만, 성서와 성경의 차이를 짚어 보자. 일부 ‘신앙 좋은’ 사람들 중에는 성경이 아니라 성서라고 말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기준에서 볼 때는 성경이라고 부르면 신자요, 성서라고 부르면 신자가 아니다. 나아가 성경이라고 해야 권위 있는 경전의 냄새가 나지, 성서라고 하면 일반 책과 똑같이 낮잡아 부르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여긴다.
하느님과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통상 하느님은 천주교가, 하나님은 개신교가 사용하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두 부름말이 각각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포함되어 있던 아래 아(ㆍ)만 살아 있었더라도 다 해결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어차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하여, 설령 하느님과 하나님이 각각 다른 말이라고 해 보자. 하느님은 ‘하늘+님’의 합성어로 천주天主를 가리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합성어로 유일신을 가리킨다고 치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한, 그리고 이때의 하늘이 눈에 보이는 저 창공sky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heaven에 대한 은유인 한, 둘은 다른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 하느님이 대치하는 이 희한한 상황은 당장에 영어권 나라로만 시선을 옮겨 봐도 전혀 의미 없는 일이다. 성서와 성경 논쟁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성서를 가리키는 바이블Bible은 그리스어 비블리아biblia에서 온 것으로, ‘책들’이라는 말이다. 높여서 홀리 바이블Holy Bible이라고도 하는데, 그래 봤자 ‘거룩한 책들’이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어로 그대로 옮긴 게 성서聖書이니 그 자체로 손색이 없다. 문제는 왠지 ‘서’라고 하면 낮아 보이고 ‘경’이라고 하면 높아 보이는 편견이다.
나아가 이른바 전도를 위해서는 성경보다 성서라는 표현이 더 나을 수 있다. 성경이라고 하면 신앙 고백을 전제한 말처럼 들리지만, 성서라고 하면 신앙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한번 읽어 볼 만하다는 마음이 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성경과 성서의 차이는 결국 대화와 소통에 있다고 하겠다. 기독교 밖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열린 마음이 있는 한, 성경이라는 표현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서양의 종교화에서도 관점이 명료하게 갈리는 게 흥미롭다. 바로크 시대를 장식한 유명 화가 카라바조(1573~1610)가 그린 〈마태와 천사 2〉의 경우에는 성서가 아니라 성경이다. 천사가 위에, 마태가 아래에 있는 수직 구도 자체가 권위와 위계를 내세워 보는 이로 하여금 경직되게 만든다. 그림에서 천사는 마태에게 무엇을 어떻게 쓸지 일일이 ‘코치’하는 중이다. 천사의 손가락을 보아하니, 1장 1절은 뭐라고 쓰고 2절은 뭐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듯하다. 천사의 지시 사항을 놓칠까 봐 마태의 표정에도 긴장이 역력하다. 스스로 생각하는 여유 따위는 기대할 수조차 없고 그저 천사의 입만 바라보기에 분주하다. ‘기계적으로 받아쓰기’, 이 그림의 핵심 주제는 바로 그거다. 이는, 성경은 모두 하나님이 불러 주신 것이기에 감히 인간의 생각 따위가 들어가 있을 수 없으며, 오류의 여지는 더더욱 없는 진리 그 자체로, 해석이고 뭐고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변한다.
<마태와 천사 2>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1602
천사가 위에, 마태가 아래에 있는 수직 구도 자체가 권위와 위계를 내세운다.
그림 속 천사는 마태에게 무엇을 어떻게 쓸지 하나하나 지도하고 있다.
성당의 요구에 따라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카라바조가 처음 그린 그림 〈마태와 천사 1〉은 달랐다. 천사와 마태는 ‘위아래’ 구도가 아니라 ‘옆으로 나란히’ 있다. 천사는 마태의 오른손 위에 자기 손을 살며시 올려놓아 애정과 교감을 과시한다. 반면에 마태는 무언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쓰기는 썼는데 뭐가 잘 안 됐는지, 천사가 바로잡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 속의 마태를 보고 있으면 신약 성서의 맨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저자이자 예수의 제자라는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다. 성인의 풍모도 없고, 지식인의 면모도 없다. 카라바조에게 이 그림을 주문한 가톨릭 성당 쪽에서는 무엇보다도 마태의 대머리와 주름살, 그리고 노동자처럼 투박한 손과 발바닥에 박인 굳은살에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퇴짜를 놓고 다시 그려 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온 그림이 〈마태와 천사 2〉로, 비로소 성당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합격점을 받았다.
<마태와 천사 1>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1602
카라바조가 원래 그린 그림에서는 천사와 마태가 위아래 구도가 아니라
옆으로 나란히 있다. 노동자처럼 투박한 마태와 천사가 교감하고 있다.
카라바조와 함께 바로크 미술의 대가인 렘브란트(1606~1669)도 〈마태와 천사〉를 그렸다. 아마 작심하고 그렸을 것이다. 개신교 신자였던 렘브란트는 종교 개혁 이후 탄생한 개신교가 어떤 점에서 천주교와 다른지를 그림 속에 담아내고자 했다. 〈마태와 천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놀랍게도 이 그림의 구도는 카라바조가 처음 그린 그림과 닮아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우선 마태의 턱수염과 그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왼손이다. 뭔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음을 암시한다. 오른손에 펜을 쥔 채로, 눈길은 저 멀리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도 그렇다. 뒤에서는 천사가 마태의 오른쪽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리고 뭔가를 속삭이는 중이지만, 마태는 그마저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요컨대 렘브란트의 마태는 지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근대의 산물이라면, 렘브란트의 마태야말로 근대 개신교 신학을 대변하는 인물인 셈이다. 이를 통해 렘브란트는 마치 성서란 하나님의 말을 기계적으로 받아쓴 것이라기보다는 기록자의 고민이 담긴 흔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태와 천사>
렘브란트 판 레인, 1661
마태는 지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천사가 마태 바로 뒤에서
뭔가를 속삭이지만, 마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렘브란트는
성서란 기록자의 고민이 담긴 흔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쓴 글이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상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을 택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씨름하며,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그것을 풀어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란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해석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기 위해 애쓴 결과물이다.
다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라. 마태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천사의 얼굴과 그의 이마에 드리운 밝은 빛이 그의 오른손을 거쳐 지금 그가 쓰고 있는 글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로써 렘브란트는 그의 글쓰기 작업이 거룩한 행위임을 드러낸다. 렘브란트에게 성서란 인간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중개자인 천사와 기록자인 인간 사이의 ‘유기적 영감’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독자에게도 ‘유기적 해석’을 요청한다. 렘브란트가 한 가지 본문을 여러 가지로 그린 것도 이러한 이해에 바탕한다. 성서를 이루는 66권의 책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온전히 담긴 것은 맞지만, 그 66권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서는 닫힌 책이 아니고 열린 책인 까닭에 여러 세대가 지나도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수천 년 읽혔어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행간의 숨은 뜻이 무궁무진한 책,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새록새록 얼굴을 달리하는 책, 읽는 건 나인데 오히려 나를 읽어 주는 책, 그런 신통한 책이 바로 성서다.
성서는 구약부터 신약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관통한다. 시대 배경도 다양하고, 기록자만 해도 몇십 명에 이르며, 등장인물의 수도 하늘의 별만큼 많다. 그래서 읽기에 결코 수월한 책은 아니다. 읽는다는 행위가 그냥 눈으로 읽거나 입으로 소리 내서 읽는 수준을 넘어 이해와 해석을 전제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일부 기독교인 중에는 ‘성경 ○독’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해마다 연중 계획을 세울 때 성경 1독을 목표로 날마다 정한 분량만큼 읽어 나가는 착실한 신자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읽기가 얼마나 깊이 있는 이해를 동반했는지는 미지수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 암송’이나 ‘큐티’Quiet Time도 그렇다. 성서가 기본적으로 책이라면 특정 구절을 암기하거나 묵상하는 것만으로 책 전체의 내용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테다.
어떤 이는 성서가 어차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냐고 딴죽을 걸 수도 있다. 구약 성서의 배경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이고, 신약 성서도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지중해 세계를 무대로 하니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겠다. 그러나 어떤 책이 남의 나라를 배경으로 한다고 읽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할리우드 영화뿐 아니라 인도 영화나 아랍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다. 사람살이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말이다.
또 어떤 이는 성서가 아주 먼 옛날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신구약 전체를 어림잡으면 대략 기원전 15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를 배경으로 하니, 이 또한 틀린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라며 배우는 법이다. 옛날이야기 속에는 오늘을 사는 지혜와 내일을 여는 희망이 담겨 있다. 하여 성서의 시제는 한마디로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겠다. 성서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은 비록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사건은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성서를 가리켜 인류의 고전이라 부르는 데는 딴죽을 걸 이유가 없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교양 차원에서도 꼭 한 번 읽어 봄 직한 책이라는 말이다.
─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