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시에는 힘이 있을까? 문학에 힘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시의 힘’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우리를 끝없이 비인간화하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시와 문학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근래에 강연한 내용 등을 기반으로 집필한 에세이 가운데, 넓은 의미에서 ‘문학’과 관련된 것들을 뽑아 엮은 것이다. 대부분은 한국의 대학이나 학회 등에서 했던 강연 원고에 가필했다.
다만 『루쉰과 나카노 시게하루』, 「조선의 시인들-‘동아시아’ 근대사 속에서」, 두 편은 일본의 〈시인회의詩人会〉라는 문인 단체에서 했던 강연을 토대로 집필한 것이다. ‘시의 힘’이라는 제목은 직접적으로는 이 두 편에 기대었다.
1930년대 중국 해방 운동에 헌신했던 루쉰魯迅의 말. 루쉰에게서 깊은 위로와 격려를 받은 1950년대 일본의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문장.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 이 나라에서 ‘돌멩이를 움켜쥐듯이’ 쓰인 수많은 시들. 이것들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구제책이 될 수 있을까?
인생은 짧다. 그러나 ‘시’라는 형식을 빌리면 21세기의 일본 사회를 살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 80년 전의 루쉰, 60년 전의 나카노 시게하루, 그리고 조국의 과거 시인들과 교감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50년 전에 쓴 시(비슷한 것)까지 새삼스럽게 되살아나 나를 채찍질한다. 이러한 정신적 영위는 모든 것을 천박하게 만들고 파편화하여 흘려버리려 드는 물결에 대항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저항이다. ‘저항’은 자주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
시에는 힘이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이 질문은 시인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져져 있다. 시에 힘을 부여할지 말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을 맡아 수고하신 서은혜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2015년 5월 1일
일본 신슈信州에서
서경식
1장
의문형의 희망
─사이토 미쓰구 시집 『너는, 티끌이니』에 부쳐
얄따란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그 무게에 절절맨다.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라고 하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건의 무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황야를 헤매는 우리들 나그넷길 /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일까?”(「미나미소마, 오다카 땅에서南相馬, 小高の地にて」), “그것은 신의 분노일까. 혹은 우리의 죄일까?”(「이날, 오다카에서この日, 小高で」)……. 이렇게 많은 시구가 의문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지진이 일어난 지 7개월 반이 지났을 때, 얼마 전 서거하신 미술품 컬렉터 가와노 야스오河野保雄 씨에게서 사이토 미쓰구齊藤貢 씨를 소개받았다. 그는 오다카 상업고등학교의 선생님이자 시인이라고 했다. 말수 적은 시인은, 근무하던 학교의 여학생이 바다로 떠내려갔다가 이튿날 해변으로 밀려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마치 부끄럽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와 같은 사건을 이런 태도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쓰나미에 휩쓸려. 한밤중의 바다를, 열다섯 시간, 떠다녔던 열여섯 살 소녀의. / 암야에. 떠밀려가는 바다의 무명無明을 생각한다. 바다의 공포를 생각한다.” (「이날, 오다카에서」)
이 학생처럼 오랜 시간을 표류한 끝에 다시 육지로 밀려 올라온 예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경계 구역 내에 표착하는 경우에는 구하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아직 구할 수 있던 목숨을 잃어버린 거죠…….”
그렇게 말했을 때 딱딱한 덩어리라도 삼킨 것처럼 시인은 아주 조금 어조가 강해졌다.
시집의 제목이 된 「너는, 티끌이니汝は, 塵なれば」라는 시는 사실 지진 전에 썼다고 한다. 시인의 예감이라 해야 마땅하리라. 시인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사건을, 신화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척도 속에서 감지한다. 창세기 이래 고향에서 추방당하며 울며 헤매는 사람들의 긴 줄이 눈에 떠온다. 시인에게는 눈앞의 사건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세간에 흘러넘치는 언설이나 어조에 대해 시인은 고요한 분노를 토로한다. “꾸며낸 혓바닥으로 /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 / 거짓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사랑을 부르짖지 마라.”(「목숨의 빛줄기가いのちのひかリが」)
지금 희망을 상냥하게 노래할 수 없다. 그것은 묵직한 의문형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땅끝까지 떠돌 수밖에 없는 그대와 나라면 / 이 갈증은 언제나 채워지는 것일까요?”(「너는, 티끌이니」)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꾸며낸 혓바닥”, “거짓된 목소리”를 스스로 금하고, 하다못해 의문을 함께하며 헤매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것이 시인이 우리에게 꺼내놓은 의문형의 ‘희망’인 것이다.
너는 티끌이니
─
사이토 미쓰구
부모처럼
생기를 불어넣었으니
나와 그대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일구게 될 것이다.
설령, 그곳이 저주받은 땅이라 할지라도
일구어가며 나날의 양식을 얻을 것이다.
가시와 엉겅퀴여.
괴로움은 나누는 것입니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대와 나는 땅에 뿌려진 씨앗 한 톨.
땅의 고통이 싹을 틔우는
목숨의 괴로움 바로 그것이니.
기쁨을 멀리하고.
열락을 멀리하고.
들풀을 뜯어가며 질박한 나날에 감사를 드리자.
“너는 티끌이니 티끌로 돌아갈지니라.”
옛적 부모처럼
나와 그대는 낙원을 꿈꾸면서
하나의 화목한 씨앗이 되어 흙에 잠드는 것입니다.
나도. 그대도.
우리는 티끌이니. 티끌에 지나지 않으니.
부모가 그러하였듯이
마침내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낙원은 까마득한 옛날 잃어버렸고
잘못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들에는 눈이 내리고. 마음에도 눈은 내려 쌓인다.
땅끝까지 떠돌 수밖에 없는 그대와 나라면
이 갈증은 언제나 채워지는 것일까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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