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시대에 시인으로 사는 일
1923년 9월 1일부터 1945년 2월 16일까지
가모가와 냇가에서
올해(2015) 1월 중순 일본의 나라奈良와 교토京都 지역을 다녀왔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완간을 기념하는 답사여행에 따라간 것이었다. 나는 지금껏 두어번, 그것도 잠깐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보았을 뿐이어서 일본 어딜 가든 흥미롭게 구경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교토는 일본 역사와 전통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들었으므로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갔다. 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빡빡한 일정 끝에 마지막 날 오후가 돼서야 우리 팀은 좀 여유를 갖고 교토 시내를 거닐 수 있었다. 유 교수의 발길이 안내한 곳은 시내 중심가를 흐르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냇가였다. 이름하여 가모가와鴨川. 서울의 청계천보다는 훨씬 폭도 넓고 시야도 멀리까지 틔어 있어서 제법 그럴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江이라기보다는 천川이었다. 그래도 청계천과는 그림이 다르고 분위기도 달랐다. 오늘의 청계천은 정취 없는 인공수로에 불과하므로 비교의 대상조차 안 되지만, 55년 전 내가 처음 상경해서 보았던 청계천도 이미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1936)에 묘사된 것과 같은 풍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가모가와는 시인 정지용이 교토 유학생으로 지냈던 90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공의 침탈이 별로 없어 보였고, 냇물의 흐름에 자연스러움이 살아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인공의 개입이 교묘하게 은폐된 상태를 내가 자연스러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는 했다. 그 가모가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유홍준 교수가 ‘鴨川’을 우리식 발음대로 ‘압천’이라 부르며 정지용의 시 「압천」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쌍 떠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
감상과 애수에 넘친 낭송을 들으며 나는 좀 엉뚱하게 정지용 자신은 ‘鴨川’을 어떻게 읽었을까 상상해보았다. 마오쩌둥을 모택동이라 칭하고 교토를 경도라 부르는 관행에 따라 틀림없이 “압천 십릿벌에…”라고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쓴 것이 1923년 7월 도시샤同志社대학 유학시절이고, 발표한 것은 교토 유학생 잡지 『학조學潮』 2호(1927.6)이다. 그 무렵 정지용은 우리말 잡지에도 열심히 우리말 시를 발표했지만, 유명한 일본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가 주재하는 시잡지 『근대풍경』(1926.12)에 일본어시 「카페 프란스」가 소개된 뒤부터는 일본어로 더 활발하게 시를 발표하고 있었다. 어쩌면 「압천」도 일본어로 먼저 써본 다음 일본어로는 시상詩想이 충분히 살아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우리말로 옮겼을 수 있다. 물론 우리말로 먼저 쓴 다음에 일본말로 옮겨보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카페 프란스」나 「슬픈 인상화」 같은 작품들은 『학조』 창간호(1926.6)에 먼저 우리말로 발표한 다음 이를 일본어로 개작해서 『근대풍경』에 투고하여 발표했던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일본 땅에 있는 동안에는 “가모가와…”라고 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소한 문제를 따져보는 것은 단순한 현학취미가 아니다. 한 작품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쓰였는지 아는 것은 그 작가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의 문학사적 위상을 가늠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기초작업의 일부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관점을 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때에 일본유학을 거친 네 사람의 시인을 묶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인들, 이상화李相和(1901~43), 김동환金東煥(1901~?), 김소월金素月(1902~34), 정지용鄭芝溶(1902~50)이 그들이다.
1923년 9월의 경험
내가 알기에 우리 문학사의 관습에서는 이 네 시인을 함께 다루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그 나름으로 중요한 시인들이지만, 문학사에서는 각기 다른 맥락 속에 위치한다고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들 아는 바와 같이 이상화는 신문학 초기 동인지 『백조』의 일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1925~35)의 창립회원이었고 명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일찌감치 문단 일선에서 물러나 창작활동을 거의 접다시피 했다. 김동환은 장시 『국경의 밤』(1925)으로 명성을 얻고 잠시 카프에도 관여하는 등 문단과 언론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차츰 시인으로서보다 잡지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식민지체제 안으로 동화되는 자기배반의 길을 걸었다. 김소월은 만 스무살도 되기 전에 천재시인의 면모를 보이며 혜성처럼 등장하여 4,5년간 눈부신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시집 『진달래꽃』(1925)은 지금도 한국 근대문학이 산출한 서정시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김소월 역시 20대 중반을 넘기면서 불꽃이 사위듯 창조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이들에 비해 정지용은 그들과 동연배임에도 마치 10년쯤 후배인 듯한 인상을 줄 만큼 천천히 문단에 두각을 드러내어 6·25전쟁으로 행방이 묘연해지기까지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한국시의 새로운 표준을 창조한 예술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이렇게 개성도 다르고 문학적 성향도 판이하지만, 이들은 우리 문학사가 그동안 주목하지 못한 젊은 날의 경험 한가지를 공유하고 있다. 이상화는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프랑스 유학의 기회를 얻기 위해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즈’에서 2년간 수학했다. 그러던 중 악명 높은 관동대지진(1923.9.1)을 만나 조선인 학살의 참상을 목격했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이 충격으로 그는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김동환은 1921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요(東洋)대학에 입학했으나 역시 관동대지진의 현장을 경험한 다음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의 장편서사시 『승천昇天하는 청춘』(1925)은 남녀 주인공의 비극적인 사랑을 중심 줄거리로 하되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벌어진 조선인 동포들의 박해와 고난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승천하는 청춘』은 식민지시대의 비극을 증언한 중요한 작품의 하나이다.(『국경의 밤』과 『승천하는 청춘』에 대해서는 일찍이 『서사시의 가능성과 문제점』에서 비교적 상세히 다룬 바 있다. 평론집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창작과비평사 1995, 367~79면 참조) 김소월은 1923년 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그해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 예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 역시 대지진의 참사에 심한 충격을 받아 유학생활을 넉달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하고 만다. 그가 일찍부터 뛰어난 서정시를 쓴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도쿄에서의 경험 이후 그는 사회현실에 눈을 돌려 『진달래꽃』의 감성적 세계와는 다른 현실적 문제를 시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방향전환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달픈 식민지현실을 감내하기에는 김소월의 감수성은 너무도 여리고 섬세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후기로 갈수록 그는 시에서도 삶에서도 정채精彩를 잃어갔다.
정지용은 위의 세 사람과 행로를 달리한다. 그는 김소월과 꼭 같은 1923년 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역시 그해 5월 교토의 도시샤대학(예과)에 입학한다. 졸업 후 모교 교사가 된다는 조건으로 휘문고보에서 학비보조를 받았다고 한다. 얼마 후 정지용도 당연히 엄청난 뉴스를 신문에서 보았을 테고 조선인 피해소식을 들었겠지만, 교토는 관동지역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그의 정신에 미친 여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시 『압천』에 그려져 있듯이 외로울 때면 가모가와 냇가에 앉아 찬 모래알을 주무르며 “쥐여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하고 안으로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적 수난에 대한 저항의식 때문이 아니라 청년기에 으레 닥치는 개인적 고뇌 때문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고뇌와 고독 속에서도 그는 전공인 영문학 공부를 통해 문학적 시야를 넓혀가면서 기타하라 하쿠슈가 주재하는 시잡지 『근대풍경』과 조선인 유학생 잡지에 드문드문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 그런 수련과정을 착실히 밟은 끝에 정지용은 1929년 6월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그리하여 그는 1930년대 식민지조선 문단을 위한 ‘준비된 시인’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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