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올바른 정치를 구현하는 방안
책문│ 1447년, 세종 29년 문과중시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임금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법이 제정되면 그에 따라 폐단도 함께 생기는데 이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공통된 근심거리이다. 후한에서는 무과시험을 보는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군국郡國 군 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한 대의 지방정부를 아울러 일컬은 말의 도위都尉 군사상의 업무를 전담한 관직를 줄이고 전차와 기병을 맡은 재관材官 한 대에 설치된, 말을 타고서 활을 쏘는 부대를 통솔하는 무관을 혁파하였다. 또 송 태조는 당 말기에 번진藩鎭 당대 지방 관서의 명칭이 강해서 생긴 폐단을 잘 알았기에, 병사 한 사람이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조정에서 직접 관리하게 했다. 그 때문에 결국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서 변방이 약해졌고, 송은 적이 쳐들어와도 막아내지 못할 만큼 전력이 허약해졌다.
한 문제는 가의賈誼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대신에게는 형벌을 가하지 않게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도리어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 없는 폐단이 생겼다. 당 태종은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여, 삼품三品 이상의 관료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불러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서 정황을 얘기할 수 있었지만, 도리어 신하는 군주에게 정황을 알릴 수 없는 예가 많았다. 광무제는 전한 때 여러 차례나 실권을 잃었던 일을 거울로 삼아서 삼공三公에게 아무 실권도 안 주고 자리만 지키게 했기에 정권이 대각臺閣 왕명을 출납하는 상서성의 별칭에 돌아가고 말았다.
예로부터 인재를 헤아려서 등용하거나 내치는 일은 어려웠다. 한·당 이후에는 인사 문제를 재상이 주관하기도 하고 전조銓曹가 주관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득실에 대해서 후대 사람들의 의논이 분분했다. 위에서 말한 내용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관련이 있으니 이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라.
우리 왕조에서는 고려 때 사병私兵이 문제를 일으켰던 일을 거울삼아서 사병을 모두 혁파했다. 그런데 그 뒤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하는 대신들이 있었다. 또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일을 거울로 삼아서 비록 대신에게 죄가 있다 해도 직접 심문하지 않고 여러 증거를 들어서 죄를 정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또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으리라.’ 했다.
또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일을 거울삼아,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이 재결하게 하고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또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 했다. 또 고려에서 정방正房 고려 무신 집권기,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했던 인사행정기관이 외람되이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삼아서 이조와 병조가 인사권을 나누어 갖게 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또 ‘그 권한이 너무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해서 제조提調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 했다.
거론된 네 가지 대책은 과연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들은 역사에 널리 통달했을 테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생각해보고서 저마다 마음을 다해서 대답하라.
대책 │ 성삼문
역사의 사례에서 배워야 합니다
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고, 법은 정치의 도구이다.”
모든 변화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모든 정치는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윗사람이 이 마음을 간직하고 법을 적용한다면, 정치를 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옛날 현명한 임금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다만 이렇게 했을 뿐입니다.
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주상 전하께서는 성군으로서 선왕들을 계승하여 온 정성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십니다. 게다가 정치의 근본이 이미 확립되고 정치의 도구도 갖추어져서, 이 시대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 문제될 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법이 제정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구제하기 어렵다고 염려하시면서 신들을 시험장에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병을 설치하는 일, 대신을 예로 대하는 일, 정권을 나누는 일, 정방을 다시 설치하는 일, 이 네 가지를 질문의 조목으로 삼으셨습니다. 먼저 역대 정치의 득실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 대신이 건의한 정책의 가부를 물으시며, 하나로 귀결되는 의논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이들 문제는 전부터 신이 말씀드리고 싶었던 내용들이니 비록 보잘것없는 생각이라 해도 임금님의 물음에 어찌 만의 하나라도 성의껏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법에 폐단이 생기는 원인
첫째, 법에 폐단이 생기는 원인과 네 가지 역사적 사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듣기에 법이 제정되면 그에 따라 폐단도 함께 생기는 문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 합니다. 요순과 우왕·탕왕·문왕·무왕의 법도 끝내 폐단이 없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후대의 법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들 제왕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기에, 법을 제정하더라도 오래 지나서야 폐단이 생겼고, 폐단이 생기더라도 구제하기 쉬웠습니다. 이른바 “황제·요·순이 일어나 인간사회와 자연의 변화를 잘 파악하여서 백성이 게으르지 않게끔 했고, 신령하게 교화시켜서 백성이 윤리를 잘 따르게끔 했다.” 하는 말이 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후대의 임금들은 마음을 간직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줄 모르고서 늘 법에만 의지하여 정치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일단 법에 페단이 생기고 나면 다시는 구제할 수 없어서, 마침내 혼란해지고 망했던 것입니다.
후한 광무제의 사병 혁파
다음으로 질문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고조는 군국에 재관과 기사騎射 말을 타고서 활을 쏘는 부대를 배치하되, 수도에는 남북군南北軍만 설치했습니다. 유사시에는 격문을 돌려서 군대를 비상소집하고 사태가 끝나면 다시 해산시켰습니다. 무제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국에 명해 남북군의 군사로 번을 들게 했을 뿐, 수도에 일정한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왕망王莽이 나라를 찬탈했을 때에는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났지만, 이를 막아낼 위병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적의翟義 전한 말의 장수. 왕망에게 대항하다 패하여 죽임을 당했다.가 전차와 기병으로 군대를 일으킬 수 있었고, 광무제도 이통李通의 계책무과시험 보는 날을 이용해 거사하자는 계책을 써서 무과시험 보는 날을 이용해 의병을 일으켜서 마침내 한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광무제는 즉위하자마자 군국의 도위都尉를 줄이고, 재관을 혁파했습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신하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렀으나, 외부에 의지할 만한 번진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동탁董卓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궐에 쳐들어오고, 원소袁紹와 조조曹操가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 제 것처럼 여겼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어찌 외부의 병력은 강한 반면, 중앙의 병력이 약해서 일어난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송 태조의 사병 혁파
당은 처음에 부병제府兵制를 실시했으나, 그 뒤로 세 차례나 제도가 바뀐 다음에 번진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번진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반란을 일으키는 장수와 권력을 전횡하는 신하가 천하에 늘어섰습니다. 결국 조정의 정령이 미치는 곳이 한 군데도 없게 되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대五代 말엽에 나온 여러 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모두 당의 번진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성장하여서 그런 사실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라를 세운 초기에 왕심기王審琦·석수신石守信 등이 지니고 있던 병권을 혁파했습니다. 그러고서 그들이 잔치를 벌이는 사이에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번진의 폐단을 없애고, 병사 한 사람이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일이 조정에서 통제했으니,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가 쇠약해지자 도적이 사방에서 침략해오고, 적들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수도에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구원해줄 만한 병사가 한 사람도 없었기에, 마침내 두 황제가 북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했습니다. 후손들이 겨우 장강의 동쪽을 보존했을 뿐 끝내 떨쳐 일어나지 못했으니, 적이 쳐들어와도 전혀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송의 전력이 허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을 예로 대하는 일의 폐단
대신은 임금의 보좌입니다. 대신이 존중을 받은 뒤에야 임금의 권세도 존중을 받기 때문에 옛날에는 대부에게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일반 서민과 같이 다루어서 경黥을 치고 코를 베는 치욕스런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문제는 가의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대부에게는 형벌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또 당 태종은 정선과鄭善果가 죄수 속에 섞여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마침내 삼품 이상의 대신은 일반 죄수와 함께 불러들이지 않게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신을 예로써 대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도 오래 지속되자 폐단이 생겨서 주아부周亞夫·소망지蕭望之·유계兪洎·장량張亮 등이 원망을 품고 죽어 갔습니다. 어떤 때는 대신들에게 아무 하소연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어떤 때는 귀한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도 정황을 설명하지 못하게 했으니 매우 손실이 컸습니다.
정권 분리의 어려움
정권은 군주의 큰 권한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남에게 빌려줄 수 없습니다. 전한 말에 이르자 군주는 약한데 신하는 강한 형국이 되어서 신하가 검을 거꾸로 잡고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왕망이 끝내 작은 그릇과 하찮은 재능을 가지고서 슬그머니 한의 국권漢鼎을 훔쳤습니다.
광무제는 그 폐단을 통렬히 경계하여 삼공의 권한을 없애고 정권을 대각에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신하들이 머리를 움츠리고 방관하게끔 하는 것은 군주가 대신을 신임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정권이 대각에 있으면 천하가 반드시 환관에게 돌아갑니다. 정권이 환관에게 돌아가면 결국 조정이 혼란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광무제가 눈앞의 잘못된 것만 경계하다가 뒷날의 환란을 생각하지 못한 사례입니다.
군자가 등용되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편안해지고 소인이 등용되면 위태로워져서 망합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국가의 큰 권한이니 쓰고 버리는 기틀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재상에게 맡겨야 합니다. 자질과 이력을 따지고 전형銓衡의 차례를 매기는 자질구레한 일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조에 맡겨야 합니다.
역대 군주 가운데는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재상에게 맡겨서 재상이 그 노고를 이기지 못한 예도 있습니다. 또 두 가지 일을 오로지 전조에 맡겨서 권한이 전조에 편중된 예도 있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타당성을 잃었으니 후대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치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실 그들 몇몇 군주는 모두 삼대 이후에 크게 공적을 세운 군주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법에서도 취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요순과 우왕·탕왕·문왕·무왕의 정치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생긴 폐단이었습니다. 맹자가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서 말씀드리지 않는다.” 했으니 어찌 신이 감히 몇몇 군주의 일을 전하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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