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밥상의 완성
개다리소반에 차린 밥상
선비가 방바닥에 혼자 앉아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술 떴습니다. 상에는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몇 가지 놓였습니다. 수저는 유기, 즉 놋쇠로 만든 것입니다. 밥상은 소반이라 불리는 작은 상입니다. 부엌에서 음식을 차려 방으로 나르려면 아무래도 소반처럼 작은 상이 편합니다.
두 사람이 겸상을 하거나 여럿이 둘러앉아 먹기도 했지만, 양반들이나 집안 어른들은 각자 자기 방에서 혼자 먹을 밥상을 받았습니다. 이를 외상 차림이라고 합니다. 잔치를 할 때도 손님들에게 각각 상을 차려 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양반집 부엌에는 늘 소반이 여러 개 갖추어져 있었지요. 하지만 집집마다 잔치 때 오는 손님 수만큼 상을 갖추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상 빌려 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밥상의 주인공은 밥과 국
밥상에는 그릇이 여덟 개 놓여 있습니다. 그릇은 값비싼 놋그릇 대신 백성들이 많이 쓰는 사기그릇입니다. 선비의 왼쪽에는 밥그릇, 오른쪽에는 국그릇이 놓였습니다. 상 중앙에 간장과 장아찌, 김치가 있고, 바깥쪽으로 나물과 콩자반, 찌개가 있습니다.
그릇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밥그릇과 국그릇입니다. 사발이라고 부르는 밥그릇은 높이가 9㎝, 입은 지름이 13㎝에 이릅니다. 요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밥그릇과 국그릇입니다. 이와 비슷한 밥그릇이 1942년까지도 생산되었습니다. 용량을 재어 보니 무려 900㏄였지요. 요즘 가정에서 사용하는 밥그릇의 용량은 270㏄예요. 임진왜란 때 오희문이라는 사람이 피란을 다니며 쓴 일기 《쇄미록》에도 한 끼에7홉의 쌀로 밥을 지어 먹었다고 적혀 있어요. 당시 7홉이면 420㏄쯤 됩니다. 밥을 지으면 양이 두 배로 늘어나고요.
뭐니 뭐니 해도 으뜸은 쌀밥
조선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밥을 많이 먹었을까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아서라고 짐작해 볼 수는 있어요. 한창 농사일을 할 때가 아니면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고 점심은 먹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니까요. 그렇다고 간식을 먹는 것도 아니었고요.
밥은 보리밥이나 조밥 같은 잡곡밥도 많이 먹었지만 특히 쌀밥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쌀은 우리 조상들이 가장 좋아하고 귀하게 여긴 곡식입니다. 나라에서도 쌀 생산에 온 정성을 들였어요. 관리들의 급여도 쌀로 주고, 백성들은 세금도 쌀로 냈어요. 쌀이 화폐를 대신했지요. 대표적인 예가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지역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예요. 죽은 이의 혼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지노귀굿을 할 때도 혼령에게 쌀밥을 올렸어요. 집안을 지켜 주는 성주신을 상징하는 물건도 쌀이었고요.
기본 음식에 반찬을 더한다
쌀밥과 국을 중심에 두고, 반찬은 어떻게 차렸을까요? 1890년대에 쓰인 《시의전서》라는 책에는 5첩.7첩.9첩 등의 상차림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첩은 뚜껑이 있는 반찬 그릇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첩 수를 셀 때, 밥과 국, 김치, 간장, 겨자 따위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밥을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니 기본 음식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기본 음식에 반찬 3가지를 더하여 올리면 3첩, 5가지를 올리면 5첩, 7가지를 올리면 7첩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실제로 이렇게 많은 반찬을 두고 먹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임금도 보통 때는 반찬을 세 가지가 넘지 않게 먹었다는 기록도 있고, 풍속화나 기록화에 그려진 밥상에도 그릇의 수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 이 책이 쓰인 것이 19세기 말이니 어쩌면 이 시기에 이르러 생긴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바쁜 세상, 간편한 식사
술값만 내면 밥도 먹고 잠도 자는 주막
예나 지금이나 밥을 사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음식점이 드물었어요. 지위 높은 관리나 양반이 여행할 때는 관청이나 인연이 닿는 양반 집에 가서 밥도 먹고 잠도 잤습니다. 원이라고 하여 나랏일로 오가는 관리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공공 여관도 있었고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주막에서 묵으며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주막은 개인이 운영하는 음식점 겸 숙박 시설이었어요. 주막에서는 술값만 내면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었지요. 음식이래야 보리밥이나 조밥 따위 잡곡밥에 반찬은 짠지나 북어무침 정도였지만요.
장삿배들이 오가는 큰 포구에는 제법 근사한 주막도 있었습니다. 돈 많은 상인과 일꾼들이 몰려드니 돼지고기나 생선구이 같은 맛난 안주도 팔았어요.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마다 술과 밥을 파는 주막이 들어서고 큰길가에는 주막거리도 형성되었지요.
조선의 패스트푸드, 국밥
아무래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서울이었습니다. 18세기에 서울의 인구는 조선 초기의 두 배인 20만 명을 넘어섰어요. 번화가인 종로의 뒷골목과 북촌 일대, 청계천 북쪽에도 주막이 들어섰지요. 도회지 주막은 대개 간편하게 식사를 하는 음식점이었습니다.
주막은 술을 파는 곳이니 속을 풀 따뜻한 국물도 늘 준비되어 있었어요. 이런 국물을 술국이라고 하는데, 보통 소뼈를 푹 고아서 된장을 풀고 배추우거지와 콩나물 따위를 넣어 끓였습니다. 뚝배기에 밥을 담고 뜨거운 술국을 붓기만 하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한 국밥이 금세 완성되었어요.
무를 넣고 끓여 간장으로 간을 맞춘 장국밥도 인기였습니다. 소뼈나 고기, 내장을 푹 고은 설렁탕이나 소의 피를 굳힌 선지를 넣고 끓인 선지 해장국도 팔았습니다. 밥과 국을 한꺼번에 먹는 국밥은 맛도 좋고 금세 먹을 수 있어서 인기였지요. 쉽고 간편하게 먹는 한 그릇 음식, 국밥은 조선의 패스트푸드였습니다.
전국의 유명 국밥집, 서울로 모이다
1876년, 조선은 굳게 닫았던 나라의 문을 열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사람들의 이동이 더욱 늘고 외식도 잦아졌어요. 20세기에 들어서면 도시의 골목마다 국밥집들이 들어섰습니다. 이런 음식점을 흔히 탕반점이라고 불렀어요. 지역마다 특색 있는 음식도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여들듯이 전국의 유명한 탕반점들도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물냉면의 대명사인 평양냉면, 육개장의 원조인 대구의 대구탕반, 네모난 만두인 개성의 편수, 경상도 대표 음식인 진주의 육회 비빔밥, 콩나물 해장국에 모주라는 술지게미 술을 함께 먹는 전주의 탁배기 국, 그리고 서울의 명물인 설렁탕과 추어탕입니다.
국밥은 사람들이 즐기는 간편한 식사이자 대표적인 외식 메뉴였습니다. 뜨끈한 국밥에 막걸리라도 한 잔 곁들이면 온종일 고된 노동으로 쌓인 피로가 풀렸어요. 간편하게 먹기로는 비빔밥도 좋았지요. 진주뿐만 아니라 서울과 해주, 전주 같은 도시에서도 비빔밥은 인기 높은 음식이었어요.
회갑연이나 단체 연회는 조선 요리옥에서
신선로‧구절판‧편육‧생선회‧전유어‧게장 등 갖가지 음식을 차려 내는 음식점도 등장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구경하기도 어렵던 궁중 잔치 음식까지 차려 냈어요. 술도 약주는 물론이고 일본 술, 맥주나 위스키 같은 서양 술까지 팔았고, 음식점이 넓어서 회갑연이나 혼례 잔치를 치를 수도 있었어요.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는 기생도 있었고요. 상차림은 손님마다 한 상씩 차리는 게 아니라, 커다란 상에 음식을 놓아 여럿이 둘러앉아 먹게 했어요. 음식 값은 당연히 비쌌습니다. 국밥집에서 한 끼 먹는 돈의 몇 십 배가 들었지요.
이런 음식점을 조선 요리옥이라고 불렀습니다. 혜천관‧명월관‧식도원이 당시 서울에서 유명하던 조선 요리옥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후, 조선 요리옥은 접시, 대접, 심지어 젓가락까지도 일본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음식도 겉모양만 조선 음식처럼 보일 뿐 맛은 일본식으로 바뀌었어요. 나라를 잃은 국민의 비극이었지요.
밥상 위에서 만나는 세계
식탁 위에서 조선과 서양이 만나다
1883년, 조선은 일본과 새로 통상조약을 맺었어요. 이를 기념하여 열린 연회가 그림으로 그려졌지요. 그림을 보면 조선 관리와 일본 관리, 서양 사람이 섞여 앉았고 식탁 차림 또한 조선식과 서양식이 섞여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는 나이프와 포크, 스푼이 놓였고 사기로 만든 양념 통과 각설탕을 담은 분청사기도 있어요. 접시에 담긴 음식은 고기에 빵가루를 입혀 튀긴 커틀릿입니다. 백자 주전자에는 술이 담겼을 텐데 술잔 모양을 보면 위스키나 코냑 같은 서양 술로 짐작됩니다.
식탁 한복판에는 촛대와 꽃병 한 쌍, 고임 음식 다섯 그릇이 놓였어요. 식탁에 초와 촛대를 올린 것은 서양식입니다. 연회를 축하하는 꽃 장식과 고임 음식은 조선식이고요. 자리 배치는 협상 당사자끼리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식으로 조선 대표가 윗자리에 앉았습니다. 조선의 관습과 생각 위에 서양의 음식과 식기가 차려진 셈이에요. 변화를 받아들이되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려던 조선이 식탁 위에서 서구 문물을 만났습니다.
거리에는 양식당, 청요리점, 일본 과자점이 들어서고
19세기 말에 서울에 온 서양인들은 낯선 음식과 숙소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 1900년을 전후하여 손탁호텔을 비롯한 서양식 호텔들이 하나 둘 들어섰어요. 서양인이 운영하는 이들 호텔에서는 커피도 팔고 서양 요리도 팔았어요. 중국인이 많이 사는 인천과 서울의 남대문 북쪽에는 청요리점이라 부르던 중국 음식점도 생겼습니다. 물만두를 비롯하여 탕수육, 해삼탕 같은 음식을 팔았어요.
짜장면이 등장한 것도 이시기입니다. 짜장면은 산둥 출신 중국인들이 먹던 작장면에서 비롯되었어요. 인천항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상대로 거무스레한 중국 된장을 볶아서 국수에 얹어 팔던 것이 한국인 입맛에 맞게 바뀌어 짜장면이 되었지요.
일본인이 많이 사는 서울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는 왜떡이라 부르던 일본 과자와 우동을 파는 가게가 생겼습니다. 서양 음식을 파는 양식당과 카페, 케이크를 파는 제과점, 커피를 파는 다방도 속속 들어섰고요. 1920~30년대에 이르면 서울 중심가에 세계 각국의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늘어섰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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