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편지
1
희우의 편지가 온 날 나는 암실에서 인화작업을 하고 있었다. 1994년 2월, 강원도 양양 설악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진전사 터陳田寺地에서 찍은 몇점의 흑백사진이었다.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필름이었지만 슬라이드 보관용 파일에 담아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두었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그 필름을 꺼낸 것은 그날 아침 김준일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전사 터로 나를 이끈 이는 김준일이었다. 그날 눈이 몹시 내렸다. 우리가 진전사 터 아랫마을에 도착했을 때 천지가 눈이었다. 진전사 터로 올라가는 산길에는 허벅지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다. 그날밤 우리는 폐사지 벌판에서 야영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임을 당시 나는 까맣게 몰랐다. 그때 찍은 사진 가운데 김준일이 담긴 사진이 딱 한장 있었다. 눈을 이고 있는 삼층석탑 앞에서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셔터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리운 소리였다. 내가 그런 회상에 잠겨 있었을 때 집배원이 희우의 편지를 들고 왔을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집배원이 편지를 우편함에 넣는 대신 초인종을 누른 것은 등기우편이기 때문이었다. 안에서 기척이 없자 집배원은 다음 날 오후 2시경에 다시 오겠으며, 그때에도 부재중이면 우체국을 방문하여 찾으라는 내용의 스티커를 우편함에 붙이고 희우의 편지를 도로 가져간 것이다.
암실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아마 꽤 오래 있었을 것이다. 암실에서의 시간 감각은 바깥과 다르다. 얼마 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나와보면 깜짝 놀란다. 더욱이 그날 나는 깊은 회상에 빠져 있었다. 김준일은 1994년 가을 마흔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정녕 몰랐다. 언제부턴가 나는 김준일을 자주 잊었다. 세월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하지만, 부끄럽고 쓸쓸했다.
오후 5시 반경 장례식장에 가려고 우이동 집을 나섰다. 대문을 잠그는 동안 집배원이 붙인 스티커를 보지 못한 것은 김준일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정부에 위치한 장례식장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국화꽃 한송이를 영정 아래에 놓았다. 영정 속에서 김준일의 어머니는 초점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아들을 땅에 묻고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망연히 보던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스물다섯에 청상이 되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만 바라보며 살던 그녀에게 김준일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김준일이 러시아로 들어간 것은 1994년 7월이었고, 끄렘린 성벽이 보이는 모스끄바 강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은 그해 9월이었다. 시체를 감식한 경찰은 자살이나 타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며 사고사로 처리했고, 가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김준일의 주검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 서울로 이송되어 의정부 외곽의 공원묘지에 묻혔다.
내가 김준일의 죽음에 대해 러시아 경찰과 다르게 생각한 것은 그가 러시아에서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편지에는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어 나의 생각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김준일의 죽음을 자살로 받아들였다.
김준일이 지켜야 할 상주 자리에 어느덧 청년이 된 그의 아들 현수가 있었다. 현수는 나를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 없이 자란 그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각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던 현수는 아버지에 대해 자주 물었다. 아버지를 한번도 보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김준일이 온몸으로 부딪쳤던 70년대와 80년대의 역사를 설명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현수의 머릿속에 김준일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그려주고 싶었던 모습은 ‘순결한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도 순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그날 저녁, 상가 접객실 한 귀퉁이에서 옛 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환경운동가 장선익,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권기호,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는 시인 김규환이었다. 처음에는 안부를 묻고 근황을 이야기하면서 간간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끊기고 침묵이 그늘을 드리운 것은 옆자리에서 대통령 선거 이야기가 들려오면서부터였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문상객들이었는데, 선거 결과가 그들이 바란 대로 된 모양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밝았고, 웃음소리가 자주 터져나왔다.
김규환은 고래를 약간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장선익은 등을 벽에 기대고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내 옆에 앉은 권기호는 빈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돌아갈 수 없을까……”
김규환은 눈을 감은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어디로?”
권기호의 물음에 김규환은 부스스 눈을 떴다.
“선거 이전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데?”
“그땐 희망이 있었잖아.”
“지금은?”
“캄캄해.”
“87년에도 견뎠잖아.”
“그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 87년과 비슷한 풍경이 나타나니까 스르르 주저앉게 되더군. 나이 탓이겠지. 자넨 어떻게 견뎌?”
“난 누워 있어. 누워서 별을 찾아.”
“별이 보여?”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자네가 진짜 시인이구먼.”
김규환은 쓰게 웃었다. 장례식장으로 오면서 보았던 저녁 하늘이 떠올랐다. 어두운 하늘에 빛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빛이라기보다 빛의 흔적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얇은 서리 조각 같은 빛을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문제는 석과야.”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장선익이 두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석과?”
김규환이 궁금한 표정으로 장선익을 보았다.
“씨과실 말이야, 먹어서는 안되는.”
장선익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아, 석과불식.”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말이다. 나뭇가지에 마지막 남은 씨과실이 석과다. 석과는 먹어서는 안되는 과실이다. 마지막 씨앗을 먹어버리면 나무를 다시 심을 수 없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난 우리 사회가 석과마저 먹어치우려 드는 게 아닌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어. 석과는 물질이 아니야. 물질을 이루는 근원이야.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근원마저 물질로 생각하는 것 같아. 이명박 정권이 고집스럽게 수행한 사대강 사업을 생각해봐. 땅을 적시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의 흐름 속에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와 함께, 자연의 섭리에 기대어 살아온 누대 사람들의 삶이 깃들어 있어. 그러니까 강은 단순한 물의 집합처가 아니라 자연의 근원이며, 그 근원에 기대어 살아온 누대 사람들의 삶의 근원이야.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석과이지.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강을 물의 집합처로만 본 거야. 철저한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이지. 거기에는 자연의 섭리와 누대 사람들의 삶의 결에 대한 외경과 겸손이 전혀 없어. 불행히도 석과를 먹어치우려고 한 결과가 강 곳곳에 나타나고 있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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