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9월 19일~1972년 11월 21일
이오덕이 교사로 일하던 시절로, 경북 청송, 상주, 안동, 봉화, 영주에 있는 산골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일하는 아이들’과 그들의 삶을 만났다. 아이들이 병들지 않고 제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 시절 학교와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1962년 9월 19일 수요일*
첫째 시간 출석도 부르기 전에 돈을 내놓는 아이가 있다. 대구 종합운동장 확장 기금이다. 아직 10여 명이 안 가져와서 이걸 그냥 두면 다음 또 다른 돈을 모을 때도 안 가져오겠다 싶어 어제 독촉했던 것인데, 오늘 한 사람 가져온 것이다. 못 낸 아이들을 불러냈다. 야단을 쳤다. 돈 2원이 없어서 못 가져온 아이 손들어라 하니까 대여섯 명이 든다. 거짓말이라고 또 야단쳤다. 훌찌럭훌찌럭 우는 아이가 있다. 이성자는 “순조 자는 돈이 없어서 만날 이웃집에 가서 얻어 와요” 한다. 그래 순조만 들어가게 하고 남은 아이들을 또 야단치고 내일 가져오라 해서 들어가 앉게 했다.
돈 독촉을 하고 나니 공부를 가르칠 기분이 안 났다. “너희들 나중에 크면 뭘 하겠나?” 하고 물어봤다. 대답이 없다.
“남경삼이, 너 뭐 하겠나?”
“나, 국수 빼요!”
절로 웃음이 난다. 이 아이 집은 국수 빼는 집이다.
“위원복이, 넌 뭘 할래?”
대답이 없다. 순경 아들이다.
다른 아이 몇이 “농사해요” 하고 대답했다.
“선생님 되고 싶은 사람 없어요?” 하고 물으니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선생질하고 싶은 아이는 없는 모양이다.
“너희들 생각이 좋다. 농사짓는 것도 좋고, 국수 빼는 일도 좋다. 부디 모두 착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되어라. 다른 것 다 좋은데, 너희들 제발 선생질은 하지 마라. 참 선생질 못 할 짓이다. 이렇게 돈 없는 아이들 졸라서 울리고, 날마다 성내고 고함치고 해야 하니 말이다. 난 이제라도 이런 선생 노릇 치우고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래서 그 돈으로 너희들같이 돈 없는 아이들에게 공책도 사 주고, 연필도 사 주고, 크레용도 사 주고, 과자도 사 주고 싶다.”
이래서 좀 기분이 나서 산수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 1944년 4월 7일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간 곳이 경북 청송군 부동공립국민학교였다.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다 1961년 10월 10일부터 1964년 9월 30일까지 경북 상주군 청리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62년 9월 21일 금요일
정하우가 청소도 안 하고 장난치면서 유리창에 물을 뿌렸다 한다. 그래 하우만 남으라고 했다.
“넌 오늘 산수 시간에도 공부를 안 하고, 그림도 안 그리고, 청소도 안 했으니 이대로 갈 수 없다.”
다른 아이들이 다 돌아간 교실 구석에 풀이 죽어 서 있는 하우를 자리에 앉으라 했다. 이런 아이는 앞으로 ‘벌 공부’를 시키자는 묘안이 떠올랐다.
국어책을 펴고 오늘 배운 곳을 공책에다 베껴 쓰라고 했다. 울상이 되어 연필을 빨아 가며 한 자 한 자 쓰고 있다. 한 시간쯤 지나니 하품을 자꾸 한다. 몹시 싫증이 나는 모양인데, 그래도 선생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모습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옆에 가 보니 ㄹ 자를 쓰는 차례가 틀린다.
“그만 쓰고 리을 자만 두 줄 써 봐라. 네가 쓰는 차례가 틀린다” 하고 써 보였다. 그래도 한 줄 쓰는 데 두세 번을 틀리고는 지우개로 지워 고쳐 쓰곤 한다.
“하우야, 너 무슨 시간이 제일 좋으냐?”
아무 대답이 없다.
“보건(체육) 시간이냐?”
“예.”
힘없이 무표정하게 대답한다.
“제일 싫은 공부는 뭐냐?”
아무 말이 없다.
“산수가 싫으냐? 국어가 싫으냐?”
“산수요.”
“음악하고 미술하고 어느 게 좋으냐?”
“미술요.”
다음은 가정 형편을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어제 소 띧기로(뜯기러. 풀을 뜯어 먹이러) 갔는데, 오늘은 모른다 한다. 형이 있는데 몇 살인지 모르고,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말았다고 한다. 동생은 둘이란다. “집에 가서 리을 자 한 줄 더 써 보고, 내일 올 때는 이웃에 있는 종수를 꼭 데리고 오너라” 하고 보냈다. 교실을 나서는 하우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 같았다.
공부를 못해서 시간마다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하루하루가 무거운 짐이 되어 그들의 어깨를 누르고, 마음을 누르고, 그래서 천진한 품성마저 비뚤어지기가 보통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보건만은 좋아하고,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해방의 시간으로서 그들에게 필요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아이들은 대체로 미술을 좋아한다. 크레용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제 마음대로 이야기를 하면서 그릴 수 있다. 남의 흉내만 안 내고 제 마음대로 그리면 무엇을 어떻게 그려도 칭찬을 받으니까 그렇겠지. 글짓기같이 글자의 저항이 없는 것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음악도 싫어하는 아이가 없는 것 같은데, 좀 더 재미있는 음악시간이 되도록 하려면 역시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공부 시간에 꾸중만 듣는 아이가 청소 시간에 크게 활동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지금은 4시 5분 전, 아무도 없는 교실에는 때 묻고 찌그러진 조그만 책상들이 60여 개 나란히, 꼭 아이들이 귀엽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뒤편에는 오늘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거기에는 운동장에 뛰노는 아이들의 온갖 모습들이 재미있는 선과 아름다운 색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전시판 밑에는 조그만 손으로 주물러 짜서 걸어 놓은 걸레가 널려 있다.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온갖 희망과 걱정과 슬픔을 안고 67명의 어린 생명들은 이 교실을 찾아올 것이다. 교사라는 내 위치가 새삼 두려워진다. 이렇게 괴로운 시대에 내가 참 어처구니없는 기계가 되어 어린 생명들을 짓밟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된다.
두고두고 생각해 보자. 어떻게 이 아이들을 키워 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세계에 파고들어 가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1963년 2월 6일 수요일
겨울방학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말았다. 방학을 이렇게 보내고 나니 한 해를 허송한 것 같다. 감기로 방학 전후 50여 일을 앓아누웠던 것이다.
1월 19일 의성서 기침을 하면서 돌아온 것은, 서울서 책 출판에 대한 소식이 올까 싶어서다. 그리고 전근 내신을 20일 전에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 분교장에 가려고 하다가 영동이나 신동 같은, 강가의 조그만 학교로 내신을 해 달라고 교감 선생한테 부탁하고는, 다시 이튿날 아무래도 건강에 자신이 없어서 취소했다.
2월 1, 2일은 결근하고, 4일부터 겨우 출근했다.
출근하는 첫날 지참했다. 출근부에 지참이란 도장이 찍혔다. 출근부는 카드로 되어 있고, 전근하면 어디든지 가져가게 되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교장은 2월 1일부터 아이들 앞에서도 고래고함을 질러 지각 안 하도록 강조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9시 반에 시작하는데 기어코 9시까지 나오도록 하여 30분 동안 난로도 못 피운 교실에서 떨게 하고, 10리 길을 1학년 아이들이 새벽밥 먹듯 하여 막 뛰어오게 했다. 4일 날 종례 때 몇몇 직원들이 아이들 생각하는 발언을 했다. 가장 인정이 없어 보이던 여교사 ㄱ 선생까지도 이런 말을 했다.
“지각할까 겁이 나 아침밥도 안 먹고 오는 아이가 방학 전에 17명이나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아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감 선생은, 지금 교장 선생님이 안 계시니 학교 경영 책임자의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면서 직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말았다. 교사들이 말하는 지극히 당연한 교육적인 견해가 여지없이 짓밟혀 버리는 곳에 아이들의 인권을 키워 가는 참교육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환하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내가 보리밥을 끓여 먹고 부랴부랴 나와도 지각을 하는데, 아이들이 안 그렇겠는가? 어제는 영하 10도(바깥은 더 온도가 내렸으리라)의 추위였는데 지각한 학생이 교문에서 30분도 넘게 추위에 떨고 벌을 서 있었다(요새 따뜻해졌다는 날씨가 이렇다). 교장 선생의 말이면 덮어놓고 그걸 그대로 받들어 외우듯 하여 아이들을 들볶는 무지한 젊은 교원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장에 쌀이 안 나온다. 쌀을 받으려면 상주나 옥산에 가야 한다. 땔나무를 사려니 나무도 안 나온다. 이런 곳에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 출근 날 학교 분위기가 그만 숨통이 막힐 지경인데, 먹고 자는 생활까지 이렇게 어려운 무인고도 같은 곳이니 말이다. 어젯밤 나는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며 이불 속에서 잠을 자지 못했다.
서울서는 소식이 없어, 이원수 선생께 편지로 아파서 서울 못간 사정을 말하고 소식을 물었더니 봄쯤 들어서야 일이 될 듯하다고 한다. “내 힘이 부족한 때문에 아까운 원고를 장 속에 썩혀 두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뜻의 글이다. 어쨌든 되도록 힘써 보겠다는 말씀이 고맙기 말할 수 없다.
주원이한테서 편지가 왔다.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쓴 것과, 베트남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서 쓴 것 두 통이다. 모두 그림엽서와 그곳 풍물을 적은 재미있는 글로 된 소식이다.
*1954년에 처음 이원수와 만났으며, 1955년에 이원수가 펴내던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아동문학가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원수는 이오덕에게 “이 선생은 교육도 좋고 동화도 동시도 다 좋아. 그러나 평론을 써야겠어. 아무도 쓸 사람이 없으니 말이야” (1974년 4월 6일 이오덕 일기에서) 하고 격려했다.
1963년 5월 13일 월요일
이것은 여러 날 전의 이야기다.
일기 지도를 연구 제목으로 정했다고 일기 쓰기에 대해서 몇 차례 의논이 있었다. 그래 우선 감상 교재가 필요하겠다 싶어 내가 가지고 있는 군북중학생들의 문집과 《생활 작문 교실》에 있는 ‘못자리 일기’ 등을 교감 선생에게 보였더니, 일주일 뒤에 교감 선생이 감상 교재를 등사해서 선생님들의 책상 위에 나눠 놓았다. 그런데 그 등사물을 보니, 내가 보여 준 작품은 윤석중 씨가 모은 문집에도 나오는 ‘쐐기 일기’뿐이고, 그 밖의 것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니 하는 당치도 않은 일기와, 숙제를 못 해서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따위의, 교과서에서나 나올 것 같은, 어른이 억지로 꾸며 만든 일기뿐이었다. 이런 사람이 글짓기회 회장이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때, 일기 지도를 위해 직원들이 잠시 모여 이야기를 했다. 그때 읽은 상급생 서너 아이의 일기는 난잡한 글씨가 겨우 논의거리가 될 정도였지만, 담임선생이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해서 내가 집에 가져가 밤늦도록 읽은 두 아이의 일기는 참 좋았다.
거기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새로운 발견이란, 시를 모르고 있는 아이들에게 일기 쓰기를 통해 시를 알게 하는 방법이다. 내가 읽은 일기를 쓴 두 아이는 모두 시를 쓴 일이 없다. 한 아이는 우스운 동요를 가끔 일기에다 적어 놓았지만, 두 아이가 다 산문이라고 쓴 것이, 절실한 정감을 호소하여 글줄도 감정의 파동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끊어 썼기에 훌륭한 생활 시, 또는 생활 서사시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귀한 발견을 한 것이 기뻤고, 앞으로 이런 아이들을 더 찾아내어 특별 지도를 해 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 1951년부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이들 글 모음 〈흙의 어린이〉, 〈봄이 오면〉, 〈푸른 나무〉와 학교 신문 〈산마을〉, 〈대성〉 들을 펴냈다.
1963년 6월 8일 토요일
그림을 그리거나 무엇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깨닫게 되는 점이 많다. 흙놀이를 할 때, 나는 흙을 뭉쳐 토끼를 만들어 놓았는데, 옆에 있는 아이의 것을 보니 소를 만들어 놓고, 소 옆에 쇠죽통을 만들어 놓았고, 쇠죽통 안에 여물까지 담아 놓았다.
처음에 만들 때 내가 간섭을 해서 소가 서 있는 것을 만들기는 어려우니 누워 있는 것을 만들어 보라고 해서 다리를 배에다 붙여 앉히게 하였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그 아이가 생각하고 있는 소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와 달랐다. 그 아이가 알고 있는 소는 머리로 생각해 낸 소가 아니라 오늘 아침에도 여물을 먹고 있었던 살아 있는 자기 집 소였던 것이다. 교사의 간섭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람을 만드는 경우도 그렇다. 어른 같으면 사람의 상반신만을,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만들지만,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인물을 만든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같은 것을 말이다.
어른들은 그림을 그리든지 글을 쓰든지 관념적으로 개념적인 것을 그리고 쓰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구체적인 것, 현재 살아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시의 문제도 이와 같다. 동시란 것은 어른들의 관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이들의 시는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생활의 표현이어야 하고, 소박하고 현실적인 감동으로 쓰여야 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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