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무로부터
작은 섬에는 작은 열매를 좋아하는 작은 새가 많았다. 새는 섬 곳곳을 날아다니며 열매를 먹었다. 새의 몸을 통과하고도 파괴되지 않은 씨앗은 흙 위에 떨어졌다. 씨앗은 파묻혔고 수많은 동물이 그 흙을 밟았다. 다람쥐처럼 작은 동물은 씨앗을 모아 곳곳에 숨겼다. 숨겨둔 씨앗을 까맣게 잊고 거듭 숨겼다. 그중 어떤 씨앗은 움텄다. 새싹이 올라왔다. 새싹 근처에는 새싹이 많았다. 동물은 새싹을 밟았다. 새싹은 죽지 않았다. 새싹은 흙과 비와 태양으로부터 스스로 양분을 구하며 수십 년 동안 뿌리와 줄기를 만들었다. 새싹은 어린 나무가 되었다. 그 맞은편에는 비슷하게 어린 나무가 있었다.
넌 어디에서 왔니.
어린 나무가 물었다.
넌 어디에서 왔니.
맞은편 나무가 되물었다.
너도 모르는구나.
그걸 아는 존재가 있어?
나는 지렁이를 좋아해.
나는 달팽이를 좋아해.
여긴 달팽이가 참 많지.
많은 게 뭐지?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야.
부족하다는 건 뭐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것.
넌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
어린 나무는 주변의 키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저기 높은 곳의 새들에게 들었어.
나도 새소리를 들었어. 주로 이런 말을 하던데. 조심해. 위험해. 가까이 오지 마.
그게 바로 부족하다는 뜻이야.
부족하면 가까이 있을 수 없어?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가까웠다면…….
어린 나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맞은편의 나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았을까?
맞은편 나무가 나뭇잎을 마주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물었다.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야.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맞은편 나무는 키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들어봐. 지금 새가 외치고 있잖아. 여기야. 이리 와.
나무는 새의 소리를 해석하듯 잠시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이곳은 안전해.
두 나무는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같은 속도로 자랐다. 그들은 작고 야위어 100년이 넘도록 키 큰 나무의 그늘에 있었다. 바람이 키 큰 나무의 무성한 나뭇잎을 흔들면 그들이 죽지 않을 만큼만, 포기할 수 없을 만큼만 두 나무의 이파리에도 빛이 들었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번개와 태풍, 가뭄과 혹한, 폭우와 폭설이 바다를 건너 차례차례 작은 섬을 드나들었다. 어느 날 어린 나무의 푸른 이파리 틈에서 하얀 꽃이 피었다. 나무는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맞은편 나무를 바라봤다. 그곳에도 꽃이 있었다.
나쁜 징조일까?
자연스러운 거야.
나쁜 징조라고?
이제 우린 더 가까워질 수 있어.
그럼 좋은 징조잖아.
그렇게 나눠서 말할 순 없을 거야.
300년이 지나고 다시 300년이 지났다. 긴 세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두 나무는 더는 작은 나무가 아니었다. 키 작은 나무들은 그들의 그늘 속에서 그들을 우러러봤다. 그들의 무성한 이파리를 통과해 잠시라도 자신에게 닿을 빛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들의 그늘에서 무수한 새싹이 죽고 어린 나무가 성장을 단념하는 동안, 그들의 줄기에서 수많은 곤충이 알을 낳고 영양을 얻고 추위를 피하는 동안, 그들의 수관에서 수많은 새가 사냥하고 새끼를 키우고 전투를 치르는 동안 두 나무는 매일매일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들은 이제 새의 말을 거의 알아들었다. 새들이 전해주는 먼 세계의 소식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을 때도 묵묵히 들었다. 새들이 전해주는 바다 생명체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놀라웠다. 새들은 말했다. 키가 더 자라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거야. 새들이 전해주는 사람이라는 종족 이야기는 기괴했다. 사람은 일부러 불을 일으켜 숲을 태우고 그곳에 새로운 풀을 심는다고 했다. 두 나무는 불을 알았다. 불은 저절로 발생했고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불은 나무의 수액을 빨아 먹는 곤충과 죽은 나뭇가지를 없앴다. 나무껍질의 상처를 소독하고 나무를 병들게 하는 세균을 죽였다. 어떤 불은 폭우보다 시원했다. 불은 숲을 청소할 뿐 통째로 삼킬 수 없었다. 숲의 수많은 존재가 그것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두 나무는 새들의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을 놀리거나 겁주려고 사람과 불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믿었다. 새들은 말했다. 키가 더 자라면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들은 이제 위가 아닌 옆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두 나무의 끄트머리 이파리는 이미 맞닿아 있었다. 그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너의 꽃과 나의 꽃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지고 싶어서.
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가던 어느 가을, 새들이 낮게 날며 비명을 질렀다. 조심해. 위험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해. 머지않아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태풍이 바다를 밀어내며 섬으로 들어왔다. 거센 비바람은 숲을 통째로 뽑아버릴 것처럼 쥐고 흔들었다. 두 나무는 땅속 깊은 곳에서 서로의 뿌리를 마주 움켜잡았다. 바람이 몰고 오는 돌과 나뭇가지와 갖가지 위험을 피하지 못한 채 버티고 버티고, 간신히 버텼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천둥소리. 연이어 땅이 갈라지고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수많은 나무가 우러러보던 고목, 숲의 시간이자 지혜인 나무가 쓰러졌다. 수관만큼 광대한 뿌리가 땅 위로 솟아올랐다. 고목이 뿌리째 뽑히는 순간 숲의 존재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죽어 있었음을. 죽은 채로도 오랫동안 숲을 지켜왔음을. 근처 나무들은 고목에 깔리고, 부러지고, 동강 나고, 파묻혔다. 돌덩이가 구르고 땅이 꽝꽝 울었다. 나뭇가지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두 나무를 후려쳤다. 가지가 잘리고 이파리는 휩쓸리고 수피는 찢어졌다. 두 나무는 서로의 뿌리를 더욱 움켜잡았다. 가지와 잎과 줄기가 사방으로 흔들렸다. 어떤 가지는 비바람에 순응하고 어떤 가지는 저항했다. 이파리와 가지와 뿌리의 뜻이 저마다 달라서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질 것만 같았다. 커다란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키 큰 나무들이 순서 없이 뽑히거나 부러졌다. 태양 빛을 선점하여 더 빨리 더 높게 자라던 나무들은 그들이 누렸던 것만큼 비바람에 취약했다. 키 큰 나무의 그늘 속에서 천천히 자라던 나무들은 평소에 누리지 못한 만큼 보호받았다. 태풍이 몰고 온 온갖 위협 속에서 두 나무는 서로 뿌리를 움켜잡고 가지를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봄이 오더라도 새잎을 만들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짐했다. 봄이 오면 마지막인 것처럼 더 많은 꽃을 피우겠다고. 이어 다짐했다. 열매 따위 맺지 않고 뿌리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더 많은 열매만이 다른 세계에 닿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다짐을 번복하고 반복해도 비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태풍은 숲을 손아귀에 구겨 쥐어 바다 한가운데로 내팽개치려고 했다. 뿌리가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숲의 존재들이 한 번쯤은 은밀하게 꿈꾸던 그 바다로.
다음 해 봄. 두 나무는 정지했다. 죽음을 흉내 내는 방법으로 죽음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짙푸르고 무성한 잎을, 생명을 뽐내는 꽃을, 삶을 퍼트리는 열매를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나무처럼, 태풍이 구겨버릴 삶은 거기 없는 것처럼, 그들은 죽은 듯이 살기로 했다. 더는 자라지 않고 그대로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빛은 달콤했다. 물과 양분을 머금은 흙은 풍요로웠다. 바람에 묻어오는 향기는 감미로웠다. 숲의 모든 존재가 삶을 내뿜었다. 죽은 존재조차 삶에 조력했다. 300년에 300년을 더한 삶이었다. 두 나무는 살아가는 방법만을 알았다. 그들은 삶을 거부하는 서로를 지켜볼 수 없었다. 하나의 나무가 토하듯 푸른 일을 밀어내자 맞은편 나무도 그렇게 했다. 하나의 나무가 폭발하듯 흰 꽃을 피우자 맞은편 나무도 그렇게 했다. 그들의 뿌리는 엉켜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몰두할 수 없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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