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다윈의 ‘아미’
‘아미Army’는 BTS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다윈에게도 아미가 있다. BTS의 A.R.M.Y.Adorable Representative MC for Youth는 단순히 BTS의 음악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BTS가 음악에 부여한 메시지를 스스로 체화한 다음 제가끔 콘텐츠를 재생산해 적극적으로 전파한다. 한국 가요계에서도 변방에 머물던 BTS가 비틀스The Beatles에 비견되는 세계적인 밴드로 떠오른 배후에는 바로 아미의 팬덤fandom 문화가 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의 교수도 아니고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연구원도 아닌 재야의 생물학자 다윈이 과학사와 사상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게 된 배후에도 그를 둘러싼 팬덤의 역할이 컸다.
팬덤은 당사자가 나서서 애쓴다고 형성되는 게 아니다. 물론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군불은 계속 지펴야 한다. BTS는 유튜브 같은 소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다윈은 편지를 썼다. 건강 때문에 런던 생활을 포기하고 시골로 주거지를 옮겼지만 다윈은 세상과 소통하기를 멈추기 않았다. 그는 평생 거의 2,000명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다윈 서신 프로젝트Darwin Correspondence Project’가 모아 놓은 1만 4500통의 편지만으로 계산하더라도 하루에 한 통 이상씩 쓴 셈이다. 다윈이 만일 지금 우리 곁에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이메일과 유튜브를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하느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네트워킹networking의 귀재였다.
인기의 열풍은 뭐니 뭐니 해도 우선 탄탄하고 매력적인 콘텐츠가 뒷받침돼야 한다. BTS는 케이팝 특유의 ‘칼근무’에 글로벌 트렌드의 음악을 세련되게 버무려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되기 하루 전날 미리 원고를 받아 읽은 토머스 헉슬리의 그 유명한 탄식이 많은 걸 말해 준다. “나는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정말 바보 같으니라고.” 다윈 포럼의 대표 옮긴이로 『종의 기원』을 번역한 가천 대학교 창업 대학 장대익 교수는 다윈의 이론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고 주장한다. 탁월한 이론은 모름지기 단순함simplicity, 응용성robustness, 그리고 직관적 아름다움intuitive beauty을 지녀야 한다. 다윈의 이론은 더할 수 없이 간결한데 설명하지 못할 현상을 찾기 어렵다는 데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다윈의 이론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지만 동시에 많은 학자의 체화와 재생산이 뒤따랐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도그Darwin’s bulldog’를 자처하며 다윈을 대신해 대규모 강연회도 열고 열띤 공개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1860년 6월 30일 영국 과학 진흥 협회 연례 회의에서 옥스퍼드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와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옥스퍼드 박물관에 모인 700명의 청중 앞에서 윌버포스가 먼저 『종의 기원』에 관한 그의 비평문을 발표했고, 헉슬리, 그리고 비글 호의 선장이었던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와 다윈의 친구 식물학자 조셉 후커Joseph Hooker가 뒤를 이었다. 훗날 영국의 철학자 존 랜돌프 루카스John Randolph Lucas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없이 들어차 마치 검투장을 방불케 했던 그곳에서 발표 내용을 제대로 들은 사람이 있었을까 의심스럽지만, 윌버포스와 헉슬리가 주고받았다는 언쟁은 지금도 구전된다. “당신 조상 중에 원숭이가 있다는 것인데 할아버지 쪽이냐, 할머니 쪽이냐?”라며 비아냥거리는 윌버포스에게 헉슬리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전해진다. “한심한 유인원을 할아버지로 둘 것인가, 아니면 고상한 인격과 엄청난 영향력을 지녔으되 그 자질과 능력을 엄숙한 과학 토론의 장에서 조롱이나 일삼는 데 허비하는 사람을 할아버지로 둘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유인원을 택하겠다.” 이런 헉슬리를 다윈은 “복음, 그것도 악마의 복음을 전하는 나의 선하고 친절한 대리인”이라 불렀다.
다윈과 함께 발견한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다윈주의Darwinism』라는 제목의 책까지 쓰며 온전히 다윈에게 바친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Alfred Russel Wallace,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을 사회 수준까지 끌어올려 결과적으로는 불편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나름 매력적인 문구를 만들어 다윈의 이론을 알리는 데 공헌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그리고 다윈의 절친 후커와 스승이자 멘토인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 이들의 도움과, 특히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다윈의 이론은 자칫 동력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다윈의 아미는 동료와 친지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더 가깝게는 가족이 그의 곁에 있었다. 가족이기 때문에 함께 살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묶인 ‘다윈 기업Darwin industry’의 직원들이었다. 나이 서른에 외사촌인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한 에마 웨지우드Emma Wedgwood는 평생 집에서 연구와 집필에 몰두한 다윈을 보필한 최고의 조력자이자 후원자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다윈의 종교적 고뇌에 공감하고 변화transmutation에 관한 그의 생각에 귀 기울여 준 훌륭한 동반자였다. 둘 사이에서 모두 열 명의 자식이 태어났는데 그중 셋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셋째 헨리에타 에마 다윈Henrietta Emma Darwin은 8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책 편집을 도왔다. 넷째 조지 하워드 다윈George Howard Darwin은 수학과 천문학을 전공하고 켈빈 경Lord Kelvin, 즉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에게 사사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구 물리학 교수로 지내며 왕립 협회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왕실로부터 작위도 받았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시콜콜한 계산 문제를 풀어 달라는 아버지의 요청 때문에 학업에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섯 째 프랜시스 다윈Francis Darwin은 의대를 졸업했으나 의사가 되지 않고 아버지의 실험 조교 겸 비서로 일했다. 식물의 기공 연구로 세계적인 학자 반열에 올라 역시 왕립 협회 회원으로 추대되고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가족의 성원 거의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 다윈의 진화 연구와 확산에 참여한 셈이다. 가히 가족 기업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다윈의 군대에 기꺼이 자진 입대한 것은 아니었다. 실황은 정반대였다. 지지자보다 공격하는 이가 훨씬 많았다. 과학의 역사에서, 아니 학문의 역사를 통틀어 다윈만큼 혹독하고 집요한 공격을 받은 학자가 또 있을까 싶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질학과 애덤 세지윅Adam Sedgwick 교수는 다윈을 지질학에 눈뜨게 한 스승이었다. 1831년 여름 3주 동안 세지윅 교수가 이끈 지질 탐구는 다윈을 지질학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다윈은 지질학도로 비글 호에 승선했다가 결국 생물학자가 되어 돌아왔다. 다윈과 세지윅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는 훈훈한 사제지간이었는데, 다윈이 보낸 『종의 기원』을 읽고 세지윅은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단다. “자네 책을 즐거움은커녕 고통을 감내하며 읽었네. 훌륭한 부분도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읽으면서 옆구리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네.” 그래도 두 사람은 이내 젊잖게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다윈을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은 당시 영국 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생물학자 중 하나였던 리처드 오언Richard Owen이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간하며 무엇보다도 런던 자연사 박물관을 설립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당대 최고의 비교 해부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오언의 지지를 기대했다. 개인적인 만남이나 서신에서 오언은 늘 공손했고 비글 호 항해에서 채집한 다윈의 동물 표본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까지 친절하게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1860년 오언이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며 그들의 동료 관계는 끝이 났다. 생물학자 세인트 조지 잭슨 미바트St. George Jackson Mivart는 한동안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며 신학과 접목하려 애썼으나 끝내 포기하고 다윈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로 돌아섰다. 개인적으로 나는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과 다윈의 관계가 가장 아쉽다. 다윈은 『종의 기원』 1판 책머리에 휴얼을 인용했다.
그러나 물질 세계에 관하여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즉 사건들은 각 개별 사례에 가해지는 신적 능력의 독립적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확립된 일반 법칙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윈의 이 같은 헌정에도 불구하고 휴얼은 “나는 아직 자네의 ‘교리’로 개종할 수는 없을 것 같다.”라며 선을 그었다. 나는 ‘다윈 혁명The Darwinian Revolution’에서 자연 선택 이론 확립에 휴얼의 가르침, 즉 귀납의 통섭consilience of inductions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과학 철학자 마이클 루스Michael Rus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통섭적 방법론을 다윈만큼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한 학자는 없다. 다윈이 끝내 휴얼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본문 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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