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묵시록
베를린의 유년 시절 어린 벤야민은 설핏 잠들었다가
창으로 달빛이 들어와 방 안을 가득히 채우자
그 방이 달빛과 둘이서만 있고 싶은 것처럼 느껴져
슬며시 다른 방으로 자리를 피해준 뒤
베개에 얼굴을 깊이 묻고 혼자 아침까지 울었다.
정신착란 증세로 10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신 없이도 죽을 수 있었던 니체는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토리노의 골목을 산책하다가
늙은 마부의 모질고 잔인한 채찍질에도
비명 없이 꼼짝도 않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
어린 여우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너자마자, 그만 꼬리를 물에 적시고 말았다
(『易經』 64괘 ― ‘未濟’ 편 괘사)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다.
어린 여우가 건너기엔 가라앉지 않을까 우려되는
깊고 물살 센 강이 하나 있다.
그 강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어린 여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나에게 붉은 꼬리를 흔들어 보인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 꼬리가 찬란한 깃발처럼 보인다.
이른 새벽
나는 강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제 먹은 것들을 토해낸다.
부서지지 않은 밥알들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젠 밥알 하나조차 변화시킬 수 없는
내 안의 마지막 배수진마저 무너진 것 같아
강물에 떠내려가는 지푸라기에도 큰절을 한다.
어차피 마음밖에 건널 수 없는 강
그 너머 또다른 무엇이 존재할지 몰라도
결코 지금의 여기보다 더 허무할 수는 없겠지.
제아무리 달음박질쳐도 끝내 닿을 수 없는 곳
닿더라도 지나온 길이 다 무너져야만 시작되는 곳
지금도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
부지런히 강을 건너가는 어린 여우여
네 남루한 깃발이 흘러간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물에 적신들 가라앉기야 하겠느냐.
가라앉은들 빛이 바래기야 하겠느냐.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다.
어린 여우가 건너기엔 가라앉지 않을까 우려되는
깊고 물살 센 강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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