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아, 어정쩡함! 그건 오래 걸친 외투처럼 내겐 너무도 친근한 말이 아닌가. (…) 그날 수업시간에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는 말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라는 니체의 말대로, 확실한 삶의 긴장 상태는 글쓰기 좋은 조건이라고.(24쪽) 《다가오는 말들》은 겪은 일, 들은 말, 읽은 말들로 엮은 에세이 모음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나 편견이 많던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고 더 나은 생각을 만들어가는 성장의 기록이자 그러지 못했던 날들의 반성문이다. 나에게서 남으로, 한발 내디뎌 세상과 만난 기록이다.(19쪽)
어정쩡한 게 좋아
글쓰기 강좌를 개강했다. 첫날 자기소개 시간에는 ‘왜 글쓰기를 배우는지’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스물다섯 명이 돌아가면서 이야기한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이다 보니 그 내용도 제각각이다. 올해는 꼭 책을 내고 싶다. 남에게 관심 받는 게 좋아서 쓴다. 몸이 아팠던 경험을 정리해보고 싶다. 글 쓰는 게 제일 돈이 안 들고 재밌다 등등 새학기를 맞는 신입생처럼, 다 큰 어른들은 결의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유독 더듬더듬 입을 뗐다. “제가 돈 욕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글은 뭘 쓰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사는 게 그냥 다 어정쩡해요.”
아, 어정쩡함! 그건 오래 걸친 외투처럼 내겐 너무도 친근한 말이 아닌가. 한번은 아들녀석이 물었다. 엄마를 무슨 작가라고 소개해야 돼? 엄마가 글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이 묻는단다. 소설가냐, 시인이냐, 드라마 작가냐. 난 아이에게 엄마는 인터뷰 하고 칼럼 쓰고 산문도 쓴다고 설명했지만, 말하면서도 뭔가 잡다하고 애매했다. 오랜 질문이다. 나는 무슨 글을 쓰는 사람인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반듯한 명함도 없고 내세울 만한 대표작이 있는 것도 아니나 어쨌든 매일 글을 써서 먹고살았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할 말은 늘 궁했다. 종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지만, 그건 한 편의 글로 완성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한다. 그럼 난 그날 일을 한 건가 논 건가, 헷갈렸다.
그렇게 불확실한 날들을 10년쯤 보내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 어정쩡함이 글쓰기의 동력이었음을. 글 쓰는 일은 질문하는 일이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고 혼란스러워야 사유가 발생한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 아이가 잘 큰다는 것과 좋은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 건지 온통 혼란스러웠고 그럴 때마다 하나씩 붙잡고 검토하며 써나갔다. 쓰는 과정에서 모호함은 섬세함으로, 속상함은 담담함으로 바뀌었다. 물론 글쓰기로 정리한 생각들은 다른 삶의 국면에서 금세 헝클어지고 말았지만, 그렇기에 거듭 써야 했다. 어차피 더러워질 걸 알면서도 또 청소를 하듯이 말이다.
그날 수업시간에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는 말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24쪽라는 니체의 말대로, 확실한 삶의 긴장 상태는 글쓰기 좋은 조건이라고. 우리는 또 대부분 그렇게 산다. 주변을 봐도 고시 합격생보다는 준비생이 많다. 고액 연봉에 승승장구하는 직장인보다는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다수다. 연인 관계도 팽팽한 사랑 감정을 느낄 때보다 지리멸렬하고 느슨해서 친구인지 가족인지 헷갈리는 시기가 길다. 그러니 어정쩡한 상태를 삶의 실패나 무능으로 여기지 말자고 했다.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글을 쓰는 안정된 집필 환경을 꿈꿨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라도 있다면 존재 증명이 수월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책상과 고요가 확보된다고 글이 싹 바뀌지 않았고, 책이 나온다고 삶이 확 달라지진 않았다. 아이가 기저귀만 떼면 엄마 노릇 수월할 줄 알았는데 걸으면 넘어질까 걱정, 취학하면 학교 적응 못할까 봐 걱정, 성장할수록 근심의 층위도 깊어갔다. 어영부영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야 짐작한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 원래 그래’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언제 잊었는지도 모르는 첫사랑처럼 순간 멀어졌던 그것, 무수한 사유의 새순을 피워 올리는 ‘어정쩡함’이라는 단어를 이 봄에 다시 내 것으로 삼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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