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지 높은 촌놈 / 신경호
신경호
1949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0년 임옥상, 민정기 등과 함께 민중미술 운동의 효시인 ‘현실과발언’ 동인으로 참가했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연작처럼 문학성이 짙은 제품의 작품을 통해 독특한 색채 표현이 두드러지는 리얼리즘 회화를 제작했다. 1977년부터 전남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리얼리즘 회화를 제작했다. 1977년부터 전남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리얼리즘 미술의 정착과 확산을 통해 후학을 길러 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 5·18의 목격자
신경호 선생의 자택 겸 작업실은 광주에서 조금 떨어진 담양군에 있다. 지난 2012년 2월 19일, 우리 일행은 그곳을 찾았다. 나와 아내, 번역자, 편집자, 사진가, 모두 다섯이었다.
무척 맑고도 추운 날이었다. 신 선생은 난로에 장작을 지폈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자 나는 질문을 시작했다.
“먼저 제게 숙제처럼 남아 있는 질문부터 드려볼까 합니다. 2007년 광주에서 뵈었을 때,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셨는지 여쭌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일시적인 붐이 지나가면 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 선생은 숨을 한 번 내쉰 후 차분한 말투로 답했다.
“봤습니다. 극장 개봉이 끝나고 한참 뒤 컴퓨터로 보았습니다. 광주항쟁을 다룬 극영화니까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실은 더 리얼한 장면이 너무나 많았는데…….”
서경식 선생님이 직접 목격하신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신경호 밀도가 떨어진다고 할까요? 마카로니 웨스턴처럼 이른바 세트를 만들어놓고 배우들이 제스처와 액션을 이어나가잖아요? 진정성의 민도랄까 그런 점에서 조금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가 어디냐, 그런 생각도 했지요.
나는 그 영화를 2007년 여름, 친구 몇 명과 함께 신촌의 극장에서 보았다.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27년이 지난 후, 그제서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룬 작품이 공개되었다고 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극장은 젊은이들로 만원이었다. 우는 사람도 많았다. 한 편의 극영화로 본다면 잘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계속 신 선생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였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이는 단지 신 선생이 현장을 경험한 목격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미술가이자 표현자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광주에서 그와 만났을 때, “「화려한 휴가」를 보셨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예, 봐야지요.” 신 선생은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지금의 붐이 지나고 조금 조용해지면요.”라고 덧붙였다.
그때로부터 또 4년 반이 지난 지금, 인터뷰는 이 질문으로 시작하리라고 마음속으로 정해놓았던 것이다.
내가 신 선생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가을 무렵이었다. 요절한 재일조선인 미술가 문승근의 개인전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렸기 때문에 다른 일정을 겸해서 전시를 보러 한국으로 나섰다. 당시 도쿄의 모리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던 광주 출신의 김선희 씨가 가끔씩 귀향하던 재독 여성화가 송현숙 작가와 신경호 선생을 소개해주었다. 신 선생은 김선희 씨의 전남대학 시절 은사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이 무렵이 나의 ‘우리/미술 순례’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 신 선생은 화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골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도 같은 인상이었다. 아니, ‘화가란 이런 사람이다.’라는 내 선입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신 선생은 그런 선입관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후로 몇 번을 만났지만 손님을 대접하고 맛있는 음식을 소개해주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 언제나 송구스러울 정도의 최상급 예우를 갖췄다. 특히 식사 시간이 되면 신 선생은 무슨 어려운 문제에라도 부딪힌 양 심각한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겼다. 어떤 가게에서 무엇을 대접하면 가장 좋을까를 혼신을 다해 숙고하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홍어, 굴비, 흑염소, 떡갈비, 추어탕, 청국장, 굴전, 오리구이……. 재일조선인인 나로서는 좀처럼 먹을 기회가 없었던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엄선한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한 요리가 식탁에 펼쳐지면 신 선생은 또 한 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반찬의 양이 줄었다던가, 맛이 예전만 못하다던가 하는 불만 때문이었다. 때로는 주인에게 직접 불만을 이야기한다. 물론 자기 입맛 때문이 아니라 손님인 나를 잘 대접하기 위해서다. 내가 맛있게 먹으면 바로 굳어진 표정이 풀리며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호남 음식이 영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고 칭찬을 하면 그의 표정은 더욱더 밝아진다.
손님을 대접하는 행위에 저만큼 열의를 보이는 일이 저리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가능할 수가…….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뿐만이 아니었다. 2~3년 전 신 선생은 학생 몇 명을 인솔하여 일본에 연수여행을 왔다. 경비를 절약하려고 우에노 근처에 있는 임대형 숙소인 위클리 맨션에 투숙하여 밥을 지어 먹어가며 도쿄 근교의 미술관을 돌아보았다. 가벼운 몸으로 와도 지칠 법한 여행인데 우리 부부에게 줄 김치와 된장을 담은, 10킬로그램은 족히 될 커다란 상자를 끌고 나타나 놀라기도 했다. 60년 인생을 사는 동안 이런 인물은 본 적이 없다. 이것이 ‘한국식’인 걸까? 아니면 ‘호남식’인 걸까? 혹은 신경호라는 사람의 특이한 개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 신 선생이지만 그저 친절하고 순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어느 날, 자신의 승용차에 나를 태워 광주 시내를 달리면서 구 도청 앞을 지날 때, 그는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5·18 이전에는 이 근방에서 부랑자나 구두닦이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시민군에 가담해 싸웠고 희생당했는데……. 그들의 주검은 어디에 버려졌는지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했어요. 지인이나 친인척이 없어 아무도 제대로 찾아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조용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우리/미술 순례’를 쓰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신경호 선생을 등장시킨 것은 나에게 가장 친근한 한국의 미술가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다. 그의 분위기, 말과 행동이 무척 흥미로운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어 어쩌면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가 그에게 체현되어 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5·18의 생생한 증인이기도 했다. ‘5·18을 어떻게 봐야 할까?’, 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는 ‘우리/미술’에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임에 틀림없다.
다시 2월 19일의 인터뷰로 돌아가자. 나는 성급히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5·18을 겪은 광주 사람으로서 이 사건의 진실을 예술적으로 증언하거나 표현한 작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습니다.” 신 선생은 주저 없이 답했다. 나는 연거푸 물었다.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 없다는 말인가요?”
조금은 침울한 표정이 된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 물론 저도 하지 못했고요……. 5월을 그린 화가는 많이 있겠지만, 그 현장의 치열한, 그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투사들의 절규를 화면에 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 그 현장에 없었으니까요.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무서워서 나오지 못하고 주워들은 풍월로……. 물론 극소수는 그 현장에 있었죠. 그렇지만 시민군이 총을 들고 들어갔던 그 순간, 도청 안에는 화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그 공간에 가장 근접해 있었던 친구가 홍성담일 겁니다. 하지만 그 친구도 외곽에서 투사회보를 만든 것이니 현장에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죠. 조금 전에 말한 제가 알고 있다고 말한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겠고요. 그러니 매체를 통해 알려진 5월의 광주는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조망한 것에 불과하겠죠.”
신 선생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얼마나 솔직한 대답인가. 그의 대답을 들었던 나의 감상이다.
2007년 여름, 신 선생이 들려주었던 광주의 기억을 잠깐 소개해본다.
광주가 계엄군에 포위당한 채 완전히 고립돼 있던 시기의 어느 날 밤. 대학에서 시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어둡고 좁은 골목에서 복면을 한 사람이 총을 들고 서성거리는 걸 봤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봤다. 가까이 가보니 수척한 젊은이였다. 계엄군의 침공에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던 시민군이었다. 젊은이는 말수가 적었고 곧 전투가 시작될지 모르는데 흥분한 기색도 없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함평 방면의 농촌에서 왔다고 했다. 농산물이나 비료, 농기구 등을 운반하고 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고 한다. 고달픈 육체노동이지만 그 노동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을 리 없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젊은이가 되물었을 때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만 대답했다. 대학교수라고 대답하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신 교수는 젊은이 얘기를 아내에게 했고 자신도 도청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논했다. 그런 젊은이가 밤을 새우며 거리에 서 있는데 우리는 따뜻한 집에서 잠을 자려 한다. 그래도 괜찮은가 하고. 아내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했다. 무리가 아니다. 장남은 아직 세 살이었다. 그날 밤 긴 이야기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정확하게 듣진 못했다. 어쨌든 신 교수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도청에 갔다. “주검도 봤습니다.” 그 젊은이는 어떻게 됐을지 묻자 신 교수는 “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고 말을 끊었다. (「스러져간 넋들과의 교감」, 『디아스포라의 눈』, 한겨레출판, 2012.)
당시 신 선생은 이미 전남대 교수였다. 계엄군이 포위하고 있었어도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택과 대학을 오가고 있었다. 총을 들고 도청으로 들어가지 못했기에 자신이 본 것도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했다. 도청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자만이,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죽은 자만이 진정한 목격자이자 증언자인 셈이다. 이런 생각이 시간이 30년 이상 흐른 지금까지 신 선생을 사로잡고 있다. 선생의 머릿속에는 함평에서 왔다던 저 청년이 아직도 말없이 골목 어귀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신 선생의 술회는 프리모 레비Primo Levi를 떠올리게끔 했다. 아우슈비츠의 강제 노동을 참아내며 살아남은 그는 생환 후, 문학가가 되어 40년 이상에 걸친 증언활동을 이어오다가 지친 나머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에세이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증언의 불가능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문제를 향한 뼈아픈 고찰을 남겼다.
레비는 자신이 진정한 증언자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자문한다. 살아남은 자신들은 우연한 행운, 특권적인 지식과 기술, 처세술로 인해 더 약하고 더 성실한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남은 것이다. 진정한 증언자들,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증인인 셈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만이 진정한 증인이라면 도대체 누가 증언할 수 있을까? 이 풀 수 없는 의문이 무거운 짐이 되어 생존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한편 제3자들은 증언에 귀 기울이지 않고 무관심이란 벽에 스스로를 가둬둔다. 신 선생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심리에는 프리모 레비와 공통되는 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아우슈비츠나 5·18과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도 살아 있는 증인들, 그것도 표현에 관계하고 있는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공통으로 짊어지고 있는 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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