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맛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새벽, 골목길에 접어든 둥산은 늙은 중의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얼마 동안 그는 운명이 암시한 불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둥산은 길 양쪽에 줄지어 있는 물통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양쪽 처마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작은 폭발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었다. 빗물은 이미 옷을 뚫고 그의 피부에 침입하고 있었지만 사방에서 뚝뚝 듣는 빗소리 때문에 마치 시계점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골목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스스로에게 무신경한 탓에 둥산은 그날 새벽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자신에 대해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다.
둥산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듯 벌어진 입처럼 열린 창으로 크고 헐렁헐렁한 팬티를 보았다. 가느다란 대나무 장대에 걸린 팬티가 비바람 속에서 경망스럽게 나부꼈다. 둥산의 눈에는 그 속옷이 웅장하고 기이한 선과 선명한 붉은색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둥산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의기소침함을 툭툭 털어냈고, 전에 없이 격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렇게 둥산은 운명이 자신을 위해 정해둔 재앙의 길에 올랐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쯔는 그날 오전 둥산이 자기 방문을 열었을 때의 광경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이불 속에 누워 있던 사쯔는 그때 둥산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었다. 둥산의 붉게 달아오른 안색에서 재앙의 기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둥산이 망가지고 난 후의 처참한 모습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러나 당시 그 사실을 둥산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말한다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둥산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비대한 여인의 모습이 사쯔의 눈에 어른거렸다. 사쯔는 그 여자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댈 수 있었다.
“루주*야.”
* ‘이슬’이라는 뜻.
사쯔는 다시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덩치와는 달리 작고 깜찍하지.”
그런 다음 둥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음탕한 느낌은 없었다. 둥산은 그 미소 속에 감춰진 조롱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둥산이 나간 후, 사쯔는 둥산이 그 크고 헐렁한 팬티를 보고 난 후 어떻게 했을지 정확하게 상상해냈다.
피가 끓는 듯 창가로 내달린 둥산의 눈에 더없이 추하고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기까지 한 여인이 들어왔다.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던 둥산은 숲에서 큰불이라도 난 것처럼 여인을 향해 열정적으로 외쳤다.
“당신을 사랑해요!”
사쯔는 그 말을 들은 루주의 모습도 상상했다. 그는 그 비대한 여인이 놀라서 벼룩처럼 튀어오르며 어쩔 줄 몰라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2
늙은 중의사의 눈에 그 작은 골목은 회색 허리띠 같았다. 길 양쪽의 집들은 각각 윗도리와 아랫도리로 죽은 듯이 길에 붙박여 있었다. 바로 그런 곳에 둥산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루주는 우체통 같은 자태로 창가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친인 얼굴에 검버섯이 잔뜩 핀 늙은 중의사는 늘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아 있었다. 천장을 사이에 두고. 늙은 중의사는 그때 창문 커튼 한쪽을 들추고 골목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그것은 이십 년 전에 알아낸 기술이었다. 이십 년간의 훈련을 통해 그의 훔쳐보기 기술은 최고봉에 올라 있었다. 커튼 한쪽 끝만 살짝 들추어도 맞은편 창문과, 대각선 방향의 창문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창문들 커튼의 무늬나 색깔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창문들에 언뜻언뜻 나타나는 얼굴들의 표정만 보고도 그는 모든 사연을 알아냈다. 그 작은 골목을 오가는 모든 사람의 행동과 음성을 그는 그들을 대신하여 기억했다. 전부 어느 집에 망신살이 뻗쳤느니 하는 쑥덕거림이었다. 물론 그의 관찰 대상들이 서로 다정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보기에 그런 다정함은 가식에 불과했다. 이십 년간 그는 줄곧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타인을 관찰할 수 있다는 더할 나위 없는 희열에 빠져 지냈다. 그 희열 때문에 그는 잠도 길게 자지 못했다.
늙은 중의사의 시야에 처음 포착되었을 때 둥산은 그저 재미없는 직사각형에 불과했다. 그는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 왔다. 둥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을 때 늙은 중의사는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예감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자신이 좀더 빨리 예감하지 못한 것에 스스로의 둔함을 매섭게 질책했다. 그때 둥산이 살짝 얼굴을 들었었는데, 중의사는 둥산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솟구쳐오르는 열정을 보았고, 자신의 예감이 적중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둥산의 모습이 사라졌다. 중의사는 둥산이 벌써 루주의 방 창가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그는 새벽닭이 우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둥산이 나타나자 놀라고 당황한 루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둥산의 그런 출현은 분명 그녀에게도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더욱 당황했던 것은 둥산의 외모가 지나치게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온몸을 떨었던 것이다. 온몸을 떨자 눈빛도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둥산의 얼굴도 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터처럼 떨리는 둥산의 입술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비록 그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듣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의미만큼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참새 몇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끝없이 이어지던 둥산의 말이 철저하게 분쇄되었다. 그녀는 그것이 아버지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쿨럭거리며 웃고 있었다. 폐병 환자의 기침 소리 같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미 창가를 떠났다는 걸 알았다. 그때 늙은 중의사는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루주를 훔쳐보고 있었다.
둥산은 한 마리 참새처럼 루주의 방 창가에 다가와서 끊임없이 지껄여댔다. 그가 주변은 아랑곳 않고 지껄이는 내내 루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둥산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둥산의 잘생긴 얼굴을 보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둥산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둥산이 자신을 희롱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둥산이 구애하는 동안 그녀는 창밖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장맛비 사이로 자신과 둥산의 결혼식 장면을 보았다. 아울러 자신이 버림을 받은 후의 장면도 보았는데 그녀의 시선은 그 장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버지의 쿨럭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 웃음소리는 아버지가 이미 루주의 마음속 불안을 알아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튿날 밤, 늙은 중의사는 루주의 등뒤로 슬며시 다가와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건네주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나머지 무심코 그 병을 받아든 루주는 그럼에도 질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게 뭐죠?”
“네 혼수다.”
늙은 중의사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쿨럭거리며 웃었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웃음소리 속에서 루주는 계시를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분명한 답을 원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이게 뭔데요?”
“초산이지.”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그 작은 병에 담긴 심각한 의미를 깨달았다. 손 안에 든 작은 병을 한참 노려보았지만 아무리 기울여도 액체의 색을 볼 수는 없었다. 망가진 둥산의 모습이 액체 위로 뭉게뭉게 떠올랐다. 너무 처참해 차마 볼 수 없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루주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불안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었다. 루주는 손에 든 작은 병이 바로 자신의 행복을 보장할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병 속에서 둥산의 불행만 보았을 뿐, 자신에게 닥칠 재앙은 미처 보지 못했다.
루주는 둥산에 대한 애정을 억눌러보았지만 이틀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 루주는 처음 둥산을 보았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러니 억누른다는 것은 그저 시늉일 뿐이었다.
이튿날 새벽, 또다시 루주의 방 창가에 온 둥산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루주를 보고 깜짝 놀랐다. 훗날 그는 사쯔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창문에서 튀어나올 기세였어.”
놀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둥산은 자신들의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지금 그는 루주의 열광적인 구애에 압도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혼이 코앞에 닥쳤음을 깨달았다. 이틀 전 시작된 장맛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빗속에서 만나 비가 멎기 전에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둥산은 자신들의 사랑이 다소 축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독기를 품은 안개가 그물처럼 가로막고 있어서 둥산의 눈은 그들의 사랑이 부침으로 가득하리라는 걸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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