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던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하나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록
비의 방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 오는 날이 많아지니 빨래도 잘 마르지 않고 마음마저 눅눅해진다. 마음은 물렁물렁한 반죽처럼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바꾸며 전염력이나 점착성이 강해진다. 어제는 우산을 챙기지 못해 거리에서 소나기를 맞았다. 오랜만에 비를 맞으니 잠들어 있던 감각과 기억이 깨어나는 것 같다.
비와 관련해 떠오르는 두 장면이 있다. 언젠가 중국 옌지 들판에서 한 할아버지가 아기를 업고 빗속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벌거벗은 노인과 아기의 몸은 잘 먹지 못해 마른 수숫대처럼 여위었다. 노인은 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겼다. 더 이상 젖을 옷이 없기에 비를 피해 뛰어갈 필요도 없었다. 어린 자연을 업고 걸어가는 늙은 자연, 이상하게도 그 처연한 모습에서 어떤 평화가 느껴졌다.
또다른 장면은 런던 바비칸 센터에 전시된 〈Rain room〉이다. 어둡고 거대한 방 한쪽에 인공의 비가 쏟아져내리는 사각의 공간이 있었다. 그 속으로 걸어들어간 관객들은 빗속을 걸어다녔다. 하지만 실은 그 정교한 기계장치 속에서 사람들의 몸은 전혀 젖지 않았다. 천장에 뚫린 무수한 구멍들을 올려다보면 비가 쏟아지지 않는 통로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빗줄기 속에 빛나는 사람들의 실루엣, 그러나 그들은 젖지 않은 몸으로 비의 방을 유유히 걸어나왔다.
두 장면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비에 젖은 자는 더 이상 젖지 않는다’와 ‘비를 관람하는 자는 끝내 젖지 않는다’. 사람이 성장하고 문명이 진화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비와 해와 바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 아닐까.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는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구부러진 손가락들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자주 들르던 자선 가게charity shop가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기금을 모으는 곳이었는데, 사람들이 기부한 중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판매하는 일이 모두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곳에서는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중고 CD를 2~3파운드에 살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한국에서 발매되지 않았거나 오래전 절판된 음반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 가게를 자주 찾았던 또다른 이유는 한 점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사십대 중반의 그 남자는 장애로 심하게 일그러진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은 초식동물처럼 선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가 자유롭지 못한 입술과 혀로 간신히 무어라 웅얼거릴 때, 나의 귀는 그의 낯선 영어 발음에 친숙하게 반응했다. 키 큰 영국인들이 머리 위로 빠르게 토해내는 말보다는 거의 더듬거리는 말이 오히려 정답게 느껴졌다.
가게에는 종일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레퍼토리가 나쁘지 않았다. 흥겨운 곡이 나오면 그의 구부러진 손가락들은 허벅지를 투욱 투욱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음악 소리를 뚫고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그 마찰음이 내가 더 귀기울여 듣고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CD를 고르는 동안 내 시선은 그 슬픈 몸의 움직임에 더 오래 머물곤 했다는 것을.
물건을 골라 계산대 위에 놓으면 그의 손가락은 이내 음악에서 풀려나 컴퓨터 자판의 숫자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뒤틀리는 손으로 아주 천천히 숫자 버튼을 눌렀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손가락들은 자주 에러를 냈다. 그러면 친절한 그의 동료가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물건을 사려고 기다리는 고객들 중에 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짜증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내민 지폐를 받아 넣고, 그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거스름돈을 건넸다. 크고 작은 동전들이 오그라든 손가락들에서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흔들리는 물통 속의 물처럼 찰랑거리는 동전들, 나는 그 소리가 무슨 노래라도 되는 것 같아서 동전을 지갑에 쉽게 던져 넣지 못했다. 동전을 손에 꼭 쥐고 걸으며 그가 들려준 음악의 여운을 느끼고 싶어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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