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을 열면서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알아? 이게 고슴도치 같은 거야. 어디서 고슴도치 한 마리가 불쑥 들어와서 이미 살고 있는 다른 고슴도치와 만나 서로 껴안는 시늉을 하는 거야. 껴안으면 어떻게 될까? 서로 찌르게 돼. 상처가 나고 피가 나지. 얼마나 아프겠어? 서로 껴안으면서 살자 하는 꿈을 꾸고 여기 들어왔는데, 도시에서 적응 못 한 사람이 시골에서는 적응을 할까? 못해.
그럼 어쩌지? 서로 마음을 내면 될까? 그것도 잘 안 돼. 결국 자연이 하는 거야. 자연이 보듬어 안아주는 거지. 사람이 자연하고는 상처를 주고받을 일이 없으니까. 자연이 치료를 해주는 거야. 여기서 살다 보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거 없이 다들 활기차. 얼굴도 밝아져. 자연이 가진 치유 능력이야.
이곳 사람들, 마음이 넉넉하고 친절해. 스스로에게 일깨움이 일어나서가 아니야. 다 자연한테서 배운 거야. 씨앗 하나 뿌리면 거기에 수백 수천 알이 열리잖아. 땅과 햇살과 물과 바람이 스물네 시간 우리에게 베푸는 거야. 한 알만 심으면 수백 알 수천 알을 준단 말이지. 그런데 그게 유기물이라서 괜히 아끼려다가는 다 썩어버리니까 다른 이들과 나눌 수밖에 없어. 자연에서 나는 건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배우게 되는 거지. 농촌 사람이 도시 사람보다 특별히 착해서도 아니고 마음이 넉넉해서도 아니야. 그저 자연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거지.
*
1994년이야. 여기서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그때 정말 엄청나고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지. 그즈음 내가 《우리교육》에 〈실험학교 이야기〉를 연재했어. 아무런 경험도 없고 실천도 해보지 못한 채 내 머릿속 상상만으로 쓴 글이었어. 그런데 전관유 군이 그 글을 읽었나 봐.
창전동에 있던 보리출판사로 나를 찾아왔어. 자기도 나랑 생각이 같다고, 선생님이 농사지으면 자기를 맨 먼저 불러달라고 간곡히 이야기하더라고. 관유 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런저런 일을 하는 중이었지. 그때 나는 그러냐 하면서 알겠다고 대답만 했어. 관유 군의 마음 깊은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는지, 강의 다니느라 분주했고 글이나 쓰면서 건달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어.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결단은 차일피일 미루었던 거지.
그렇다고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야. 건성이었지만 숨 쉬고 살 만한 땅을 알아보기는 알아봤어. 내가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친구나 후배에게 부탁해 농사지으며 함께 모여 살 만한 곳이 있을지 봐달라고 했어. 혹 폐교된 학교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도 했지. 지금의 변산공동체학교에서 산을 넘으면 운호리라는 곳이 있어. 그 운호리에 곧 폐교될 학교가 있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지. 직접 찾아다니지는 못했어도 그렇게 내 나름의 마음을 내기는 했어.
나는 오래전부터 걸핏하면 “언젠가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 거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어. 대학교 다닐 때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결혼하고 나서도, 또 운 좋게 교수가 되어서도 말이야. 언젠가……, 그 ‘언젠가’를 잡아당긴 이가 관유였어. 일을 저지르려면 계기가 있어야 하나 봐. 사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스스로 마음을 내는 것인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관유와의 만남으로 첫발을 내딛은 거지.
관유가 나를 만나고 돌아간 뒤 어느 날, 관유 군에게서 이번에는 편지가 왔어. “선생님, 저희 아버지가 남겨주신 논밭을 팔아 현금으로 갖고 있는데, 계좌번호를 알려주시면 이 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돈으로 땅을 사요” 하는 거야. 무척 당황했어. “그러지 말고 일단은 통장에 그대로 가지고 있어봐요. 내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땅을 알아보리다……” 했어. 이 일이 정말로 큰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적극 땅을 알아보러 다녔지.
태안반도에 가보니 생각과 달랐고, 변산반도에 와보니 갯벌이 있어 바다살림도 하겠고 변산국립공원이 있으니 산살림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어. 또 너른 들판도 보였어. 고부평야, 흥덕평야, 만경평야로 이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지. 그래 여기가 좋겠다 해서 변산으로 왔어.
처음에는 운호리를 갔댔어. 그런데 그곳은 땅이 너무 좁고 으슥한 골짜기에 집들이 들어앉아 있더라고. 어림잡아 마흔 가구 정도가 약초 농사를 지으면 딱 좋은 곳이구나 싶었어. 하지만 그 이상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어. 운호리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 계곡을 따라 쭉 가다 지름박골 산길로 올라와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 운산리가 보이더라고. 산이 소쿠리처럼, 꽃잎처럼 땅을 감싸고 있지 뭐야. 정말 아늑하더라고. 여기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산을 내려와 운산리 어르신께 가서는 여기서 살고 싶은데 땅은 어떻게 구하느냐고 물었지. 잠깐 기다리라며 마을 이장을 불러주더라고. 땅이 있기는 있는데 1만 2000원은 줘야 한 대. 사겠다 하고 샀지. 알고 보니 이 땅은 동네 사람들이 농사지을 곳이 못 된다고 여기던 땅이었어. 그래서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당 1만 원에 거래되던 땅을 우리는 2000원 더 주고 산 거였어. 어쨌든 관유하고 나하고 절반씩 돈을 대서 이곳 땅 2800평을 장만했어. 그게 1995년 일이야.
*
1995년, 그때만 해도 일기는 쓰지 않았어. 아직 충북대 교수로 있으면서,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환교수로 활동 중이었지. 서울대 철학과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존재론’을 강의했어. 일주일에 세 시간 한 강좌만 맡으면 되었거든. 나머지 시간은 이곳 변산에 내려와 지냈어.
처음에는 관유 군 혼자서 농사를 지었고 나는 학교 수업 마치고 왔지. 관유 군은 지독한 원칙주의자였어. 하루는 땅 구한 거 보고 싶다는 후배하고 같이 변산을 찾았는데, 보리밥에 반찬이라고 내놓은 게 된장이랑 이것저것 아무 풀이나 뜯어가지고 상에 올린 거야. 살아생전 처음 보는 풀이었어.
“된장에 쌈하면 먹을 만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당황스럽더라고. 손님도 있고 한데 식은 보리밥에 풀과 된장만 내놓은 걸 보니까.
“먹는 풀인가?”
“옛 어른들이 5월 단오까지는 염소가 먹는 풀은 사람이 먹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첫 식사였지. 그 후로 풀을 뜯어 먹으며 생활했고 풀로 김치도 담가 먹었지. 관유 군은 무척이나 엄격한 사람이고, 타협을 모르는 불같은 사람이야. 그 때문에 관유 군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공동체에서 불화의 근원이 될 수도 있었지. 말을 돌려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하는 스타일어어서 상처를 주게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관유 군에게 배운 게 많아.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배웠지. 내게는 꼭 필요한 우정 어린 사람이야. 내 삶의 자세나 태도를 만들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
그나저나 땅만 샀지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부안 김씨 재실에서 재지기 노릇을 했어. 재지기가 옛날에 어느 정도 천대를 받았느냐면 동네 꼬마들도 재지기를 부를 때는 그냥 이름을 불렀어. “누구누구야” 하고. “완규야, 우리 아버지가 오라고 하신다” 이런 식으로. 집성촌에서 재지기는 가장 밑바닥, 노비 비슷한 것이었지. 재지기는 집성촌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야. 먹고살기 힘들어 집성촌 재실에 딸린 논밭을 일구어 먹으면서 재실 관리해주고 제사 때는 음식 마련해주는 거지. 평소에는 동네 종살이도 하면서.
때마침 그 무렵 부안 김씨 재실에서 재지기를 찾고 있었어. 원래 재지기를 하던 분이 계셨는데, 물이 부족해서 크레인으로 웅덩이를 깊이 파 거기 물을 저장해놓았는데, 그 재지기 분이 술을 마시고 길을 가다가 웅덩이에 빠져 돌아가셨대. 그래서 우리가 동네 이장에서 이야기해 재지기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지. 재지기가 되면 재실에 딸린 논하고 밭을 공짜로 부쳐 먹을 수 있었으니까. 내 제자 부부를 불러들여 재실에 살면서 관리하게 했어. 그렇게 시작한 재지기 노릇이 1995년부터 2003년까지 9년 동안 이어졌지. 그러니까 변산공동체는 남의 집 셋방살이로 시작한 셈이야.
사실 우리는 싸가지 없는 재지기였어. 재지기는 유사儒士들이 재실에 오면 굽실굽실하고 손 비비며 공손하게 굴어야 했지. 그쪽 입장에서도 재지기라고 하면 그저 옛날의 종살이하던 사람들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을 거야.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런 걸 잘 모르잖아. 나는 조금 알기는 알았지만 굽실거리는 성격이 못되고, 재지기로 들어온 제자 부부 또한 그렇고……. 부안 김씨 입장에서 보자니 이전과는 달리 재지기가 뻣뻣한 거야. 그래서 재지기 노릇을 하는 우리를 못마땅해했어. 게다가 재실을 공동체를 찾는 손님들 숙소로 썼거든. 부안 김씨 어르신들은 그 손님들하고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고 하는 것도 꼴 보기가 싫었던 모양이야. 시간이 좀 지나자 우리가 농사짓는 땅을 빼앗으려 들었지. 유기농으로 농사짓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처음 하는 유기농이라 그런지 온통 피밭이었거든. 벼보다 피가 더 많았어. 그걸 본 동네 사람들이 일러바치고 부근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농사를 저렇게 짓게 놔둬서는 안 된다 하면서 논을 달라고 하기도 했어. “그렇게는 못 한다” 했지. 원래 재지기는 수확량 일부를 꼭 내야만 하는 건 아니거든. 다 자기가 갖는 거지. 넓은 밭도 딸려 있었고.
어쨌거나 그때 우리가 참 한심했지. 다들 농촌에 갓 들어온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를 비롯해 대부분이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었어. 초기에는 네 명이었지. 나, 과유, 심장섭(제자) 부부. 장섭이가 재지기로 들어왔었지. 농사지을 줄을 뭘 알겠어? 게다가 그때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쓴 《유기농 자연농법》 책을 읽은 터라 농사는 풀도 매주지 않고 그저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고 그게 자연농법이다 생각했어. 고추를 심었는데 고추는 온데간데없고 바랭이풀만 잔뜩 나 있어. 밭이 죄다 이 모양이었어. 풀이 그렇게 빨리 올라올 줄은 몰랐어. 내버려두니 초봄에는 풀 자라는 속도가 더디어, 아 이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5월 되고 6월 되니 풀이 걷잡을 수 없이 자랐어. 뿌리가 단단히 박혀가지고 호미로는 뽑을 수가 없어. 하다하다 안 돼서 낫으로 베었어. 아휴, 이런 걸 본 동네 사람들이 오죽했겠어. 저것들이 지금 농약은 안 친다고 하지, 그라목손 2000원어치만 사서 뿌리면 2000평 논밭 풀이 다 잡히는데 그것도 안 한다고 하지, 유기농이다 자연농이다 하는데 논밭은 엉망이지, 동네 사람들이 정말 못 볼 꼴을 보았던 거지. ‘저것들이 여기 캠핑하러 왔나’ 하는 눈빛이었어.
어쨌든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1996년이 되어 광식이도 오고 희정이도 오고…….
*
1995년 첫해 농사는 완전히 망치고, 이듬해 두 번째 농사도 망쳤지. 한 2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아, 잡초는 있다” 싶었어(내가 그사이에 섣부르게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냈거든). 잡초가 있어. 어느 핸가는 약초까지 잡초로 바뀌어버렸어. 그다음부터는 풀을 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남자는 골반이 발달하지 않아서 여자와는 달리 오리걸음하고 밭을 매면 죽을 지경이거든. 그때 스위스에서 영농유학을 1년 반하고 온 분이 있었어. 풀무원공동체를 운영하던 원경선 선생의 사위였어. 스위스도 우리나라처럼 산지가 많은데 경운기로는 산지 밭을 못 갈아. 그래서 사람이 주로 하는데 남자가 서서 풀매는 기계를 그분이 발명한 거야. 우리도 그 기계를 가져다가 풀을 맸어.
조금씩 풀을 잡아가며 농사를 지었어. 재실의 밭이 처음에는 굉장히 척박했어. 화학비료를 너무 뿌리고 땅심을 전부 뽑아서 쓰기만 하고 보충하지 않아서였지. 중산리에 저수지가 있어. 꽤 큰 저수지인데 물이 마를 때면 비를 타고 내려온 낙엽들이 켜켜이 저수지 바닥에 쌓여. 저수지 물이 말라 있을 때 가서 물 먹은 낙엽들을 마대에 넣어가지고 와서 재실 논밭에 깔아주기 시작했지.
동네 어른들은 “그거 영양소가 물에 다 녹아버려 거름이 안 되는 것이여.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먼” 하며 말렸지.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부엽토를 날라다 땅에 깔아줬어. 어떤 때는 10센티미터 두께로 깔아주기도 했어. 깔아주니 두 가지가 좋아. 하나는 풀이 안 나서 좋고 또 하나는 보습 효과가 있더라고. 햇빛이 들이치지 않으니까 땅에 습기가 유지되었어. 밭에 검은색 비닐멀칭을 해주는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마늘을 심었더니 마늘 농사는 거름을 주지 않았는데도 우리 밭이 제일 잘되는 거야. 마늘을 그저 심기만 했어. 마늘종 올라오면 부엽토 깔아주고. 그게 다였는데도 잘됐어. 나중에 그곳에 고추를 심었는데 고추 농사도 제일 잘되었어. 동네에 비가 많이 내릴 때면 고추들이 다 말라 죽었어. 탄저병으로. 그런데 우리가 부엽토로 기름지게 만들어놓은 밭에 심은 고추는 안 죽는 거야. 한참 뒤에는 동네 어른들이 “그것 참 희한하다” 하면서 우리 밭을 구경 올 정도였어. 그렇게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갔지.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