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챙이는 언제 개구리가 되는가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 부유하고 자유방임적인 60대 부모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내 편일 영재 씨, 하복 네 벌과 동복 네 벌, 도합 여덟 벌의 교복과 책가방 여섯 개를 가지고 있었고, 공부는 못했다. 1996년 여름이었다.
그리고 막 퇴학당한 참이었다.
여덟 벌의 교복을 못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남색 몸통에 네모난 하얀 칼라가 턱받이처럼 달려 있어서 입으면 정박아처럼 보이는 교복이었다. 누군가가 “정박아 같아”라고 말하자, 그 교복은 특별해졌다. 정말 그건 턱받이 같아서 음식을 흘리거나 하다못해 침이라도 흘려서 그 턱받이가 제 본분을 다하도록 배려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이 교복이 좋았다. 정박아이면서 정박아처럼 보이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아무도 우리를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 중학교 성적이 좋은 애들만을 모아놓은 고등학교 교복은 일종의 신분이었으니까. 애들은 학원에 갈 때도, 주말에 패스트푸드점을 갈 때도 교복을 입는 걸 선호했다.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성적이 좋을 뿐인 정박아들. 나는 성적도 좋지 않은 정박아였다.
도내 각 중학교에서 두세 명만 입학할 수 있는 고등학교라는 건 그렇다. 첫 시험을 보고 나면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진다.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열등생이 된다. 그 열등생 무리 중 하나가 나였고, 나는 공부를 못한다는 게 그렇게 슬픈 일인지 몰랐다. 그리고 성적은 습관이 된다는 것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태어난 이유, 살아야 되는 이유를 찾지 못하며 침울해진다. 그러니 열등생으로 변신해버린 우등생들은 정박아가 될 수밖에 없다. 정박아투성이인 그 학교에서 가장 정박아가 나였으므로 누구보다 그 교복을 좋아했다. 공부를 못해도, 학교를 좋아하지 않아도, 교복을 좋아할 수 있다. 미구 씨 앞에서 이렇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미구 씨가 내 엄마가 아니라면 멋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로 두기에는 좀 피곤한 면이 있다. 그녀만의 습관이라는 게 있었고 미구 씨의 하루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작동되어야 했다.
이를테면, 아침마다 미구 씨는 베이지색 실크 가운을 입은 채로 에스프레소 더블을 마셨다. 커피 용액이 삼 분의 일쯤 남았을 때 설탕을 넣었다. 각설탕이라야 했다. 젓지 않는다. 데미타스 잔 바닥에는 염전에 드러난 소금 알갱이들처럼 설탕 결정들이 남는다. 각설탕이 떨어지면 커피를 마시지 않았고, 하루 종일 기력이 없다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바닥에 남은 설탕을 핥아 먹기 위해서 나도 미구 씨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면에서나 완벽하고, 완벽하고 싶어 하지만 남들한테는 그렇게 보이는 걸 원하지 않는 미구 씨. 쿨하게 보이고 싶은 거다. 남편이나 자식도 그래주길 원한다.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피곤하다. 그렇지만 남에게 내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구 씨의 이 ‘남’에는 남편과 자식도 포함되었다.
미구 씨는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면서 공부를 못하는 나도 물론. 하지만 성적으로 나를 혼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세상에 그보다 중요한 일이 훨씬 많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나는 알았다. 미구 씨가 그렇지 않음을. 그녀는 신문을 보다가 찡그리곤 했다.
“직무 유기나 업무 태만이 문제야.”
그러고는 세상이 삐걱거리는 것은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넋두리처럼.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목적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혼잣말처럼 하는 혼잣말은 혼잣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피붙이란 시큰하고, 지루하고, 코웃음이 나고, 애처롭고, 피곤한 것이다.
미구 씨가 이런 말을 비롯해 이런저런 것들을 삼갈 때는, 오직 영재 씨가 함께 있을 때였다.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어려워하지 않는 미구 씨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이 영재 씨였다.
그건 영재 씨가 미구 씨가 말하는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미구 씨는 주관이 분명한 사람답지 않게 자기한테도 엄격하고 객관적인 편이었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약해졌는데 그 우월이 돈이나 힘 혹은 교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 설명하기 어렵다. 누구보다 먼저 나와서 눈을 치우는 옆집 아저씨일 때도 있었고, 손에 꼭 쥔 사탕을 내미는 낯선 남자아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미구 씨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이럴 때의 미구 씨가 좋았다.
영재 씨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아빠네 집의 머슴이었다. 이제부터 머슴이 아니라고, 정착금을 줄 테니 나가 살라고 내 아빠의 아빠의 아빠가 말했지만, 영재 씨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거절했다. 영재 씨의 아버지는 군산인지 목포인지 하는 데서 전기기술자로 일했다고 한다. 내 아빠의 아빠가 목장을 하게 되면서 영재 씨의 아버지는 우리 집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는 목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것도 배울 의지가 없었던 아빠의 아빠를 대신해 목장을 사실상 운영했다.
내 할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는 걸 평생의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농사는 짓기 싫었기 때문에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잘 알지 못했다. 이재에 그리 능한 것이 아니어서 사업을 벌일 때마다 논이나 밭이 사라졌고, 산마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목장이었다. 할아버지는 목장 운영에 어떤 재능도 흥미도 없었지만, 자기가 관여하지 않는 게 목장을 위한 최선이라는 것을 알 정도의 이해력은 있었다.
내 아빠도 그런 할아버지의 아들이어서 돈을 만지는 데 재능이 없는 사람인데, 할아버지를 보면서 느낀 게 있는지 자신이 관여하지 않는 게 우리 집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빠는 나보다도 소나 목장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이 부유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영재 씨 덕이라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깨닫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모두에게.
영재 씨의 아빠가 목장 일을 시작할 때 영재 씨는 세 살이었다고 한다. 세 살 영재 씨가 소젖을 우동 면발 굵기로 짜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미구 씨는 영재 씨가 무엇을 했어도 잘했을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영재 씨가 우리 모두를 대신해 목장 일을 해주었다. 나이가 들자 영재 씨는 목장 일을 직원들에게 맡기고 우리 집과 목장을 오가며, 미구 씨와 아빠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해주었다. 선산 관리, 사소한 소송, 정원수 가지치기, 고장 난 모터펌프 수리 같은. 자신과 마음이 맞는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도 영재 씨의 일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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