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황금 티켓 The Golden Ticket
이 책의 전제에 대해 나는 한시도 미심쩍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구운 참치 샐러드가 놓인 식탁에서 편집자는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 “순례를 한번 해보시죠. 어디든 가서 그에 대해 쓰시는 겁니다.”
처음에 그 말은 황금 티켓을 쥐여 주는 것처럼 들렸다. 머릿속에서 몇 개의 목적지가 해가 뜨는 것처럼 솟아올랐다. 내 세대의 어른들이라면 누구든 흙먼지 날리는 길에 관한 낭만, 또는 적어도 케루악Jack Kerouac 스타일의 몽상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문득 시내에 나타난 신비의 여행자, 낯선 이방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바뀐 삶, 잊을 수도 없고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변화,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숨 막힐 듯한 전망……. 무거운 걸음을 옮겨 일터로 향하거나 어쩔 수 없이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우리는 모두 이런 문화적 신화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정말로 진지한 순례란 혼자 다니는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여행 자체를 통해 자신을 탐구하거나 신과의 관계에 대해, 또는 자신의 삶이나 과거에 대해 탐구하게 되는 그런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여행에서 종착지란 내면의 변모 과정에서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순례는 초기 기독교도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4세기에 에게리아Egeria라는 여성이 프랑스를 출발해 팔레스타인 성지로 향했다. 로마 제국의 안전망과 도로 체계 및 군 검문소들이 보호해 주었다고는 해도 당시 여자 혼자서 여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상상해 보면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만 해도 기독교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기독교도로서 그 먼 거리를 그런 악조건 속에서 여행하다니! 그러나 그녀는 성지까지 다녀오는 순례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매 신도들을 위해 자신의 순례를 글로 남기기까지 했다.
그 글에서 그녀는 예수 수난의 현장에서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쏟았던 일 하며 자신이 목격한 예식과 숭배 등에 대해 썼다. 이 글은 여성이 쓴 글로는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데, 지금은 일부만이 남아 있어서 그녀가 사막과 어둠을 가로질러 깨달음을 향해 가는 여정을 파편적으로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또한 4세기 스페인 출신 로마의 기독교도 시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대해 모종의 애착을 지니고 있는데, 그는 로마까지 혼자 여행하던 길에 한 교회에 들렀던 일을 서술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순교한 어느 성인의 초상화를 보고 감동해서 바닥에 엎드린 채 온종일 흐느껴 울었노라고 썼다. 순례란 그런 것이다. 무릎에서 피를 흘리면서 깨달음의 순간을 향해 기어가는 것 말이다.
그런데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학자로서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지내기를 즐기며 그렇게 오랜 시간 독서를 하지 못하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술을 마시거나 혼자 자거나 혼자 걷거나 심지어는 오랫동안 말없이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그렇다고 도서관에서 옆자리에 누가 앉기를 바라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떼를 지어 순례에 나선다면 그 순례는 결국 웃음거리가 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트 위의 세 남자Three Men in a Boat』(와 몽모런시라는 개) 짝이 날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취한 채 술집에서 출발한 외설스러운 호색한들이 한동안 함께 걸으며 가는 내내 음탕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초서의 순례자들처럼 되거나. 진지하고 집중력이 강했던 젊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 Louis Stevenson조차도 자아 발견을 위한 여행이 당나귀와 함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한 편의 코미디로 바뀌었노라고 하지 않았던가(모디스틴이라는 이름의 그 당나귀야말로 스티븐슨의 책 『당나귀와 함께한 세벤느 여행Travels with a Donkey in the Cevennes』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혼자가 아니라면 길 위에 선 케루악과 같은 순간은커녕 “우리 모두 여름휴가를 떠나요”라는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의 노래 또는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Little Miss Sunshine> 짝이 날 게 틀림없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리틀 미스 선샤인>(2006은 어느 콩가루 가족의 버스 여행을 그린 미국의 코믹 영화. “우리 모두 여름휴가를 떠나요”는 클리프 리처드의 <Summer Holiday>라는 노래의 일부다. ―옮긴이)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는 여행이라도 코미디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지는 않았다. 루르드Lourdes 성지를 줄지어 순례하는 인파라든가 단체 버스로 예루살렘에 온 이들이 성령이 충만한 사진 촬영 장소를 향해 높이 치켜 든 우산을 부지런히 쫓아가는 것이 그 방법인데, 이것 역시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고독하고 절박한 자기 분석이냐 장난꾸러기 친구들과의 동행이냐 양자택일 사이에서 모종의 절충점을 찾기 위해 나는 먼저 변호사인 아내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재판에서 상대의 필사적이며 유력한 논지를 단칼에 박살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아내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당신의 순례에 동행할 순결한 여인이 되기를 바라는 거로군. 아니면 당신이 우리나라보다 오래된 장소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걸 말없이 듣고 있는 과묵한 미국인이 되기를 바라거나.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초대인걸. 그것 때문에 일을 중단할 수는 없어.” (시간에 대한 변호사들의 생각은 우리와는 다르다. 자기 발견을 위한 여행은커녕 즐기기 위한 시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그저 돈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나뉠 뿐이다.)
아내와 함께하는 순례가 결혼의 복잡성과 영혼의 반려에 대한 발견의 여행이 될 것이라고―바보처럼 소리 내서― 주워섬기면 그럴수록 두 사람이 함께하는 여행의 가능성―<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델마와 루이스>?―은 점점 더 희박해졌다. 그래서 나는 유대인 네 사람으로 일행을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대인 넷이 한 기차에 타고 간다는 것은 농담거리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그게 바로 코미디가 될 터였다―. 그러나 우리 넷 중 한 사람은 언제나 기분이 저하되어 있어서 과도하게 지적인 태도로 상황에 임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무리를 이루되 현대적이고 희극적이지 않은 순례를 조직하는 방안을 놓고 고심을 거듭하는 한편, 순례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한층 절박한 문제와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들은 저마다 황금 티켓을 가지고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갈수록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나는 자연이 인상적인 곳은 일단 후보지에서 제외한 터였다. 먼지 나는 길을 달려 호주의 에어스록Ayers Rock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뻔한 영적 변모의 현장으로 가는 여행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벌써 두 권의 책을 쓴 바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곳에 가는 여행이란 거기에서 사는 일의 어려움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점령지구에서 가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유대인 네 사람에게 그런 일은 완전히 의미가 다른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친구들이 제안한 갠지스강이나 후지산, 또는 다른 여러 순례지를 고려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여지없이 관광의 냄새를 풍기게 되어 내가 생각하는 순례의 취지가 훼손될 것 같았다. 소들을 왜 그토록 신성시하는지 당혹스러워하거나, 활짝 핀 벚꽃 앞에서 경외의 표시로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전한 외부인으로서의 경험만이 가능할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미 알고 있던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에 대해 미소 짓거나 아니면 사리sari를 입은 채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신비를 슬프게 흉내 내는 서양인이 되는 것뿐일 터였다. 멍청한 구경꾼이 되거나 원숭이 노릇을 하지 않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나를 편집자가 구해 주었다. “빅토리아 시대를 주제로 한 순례를 해 보세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예의 참치 샐러드 식탁에서 나는 19세기 사상에 관한 새로운 프로젝트와 케임브리지의 내 연구 팀,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을 읽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를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중이었다.
번뜩이는 통찰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는 도처에서 순례가 이루어졌지만, 그 순례는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빅토리아 시대의 순례를 생각하자 내 머릿속은 여러 아이디어와 계획으로 들뜬 채 바삐 움직였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실망감을 목격하자―모로코 연안 섬들이 아니고? 코끼리도 못 본다고?―나는 먼저 빅토리아 시대에 어떻게 해서 순례가 일대 붐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이 순례가 우리를 어떤 놀라운 영토로 안내하게 될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중략)
우리의 계획은 가능한 한 빅토리아 시대의 수단을 이용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안내 책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기차와 도보였다. 정말 불가피한 곳에서는 수레와 말 대신 버스도 무방했지만 자동차나 비행기는 탈 수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우리는 기차 시간표를 참조하고 튼튼한 신발을 신을 것이며 지역의 숙소에 묵을 것이었다. 여정 자체가 순례의 본질적인 일부였기 때문에 서둘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목적지는 다섯 곳이었다. 우선 애버츠퍼드. 스코틀랜드 접경에 있는 월터 스콧 경의 이 귀족적인 저택은 대중의 상상력에 들어온 최초의 작가 집이자 미국에서 가장 먼 곳이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있는 워즈워스의 두 집 도브 코티지Dove Cottage와 라이덜 마운트Rydal Mount로 내려갈 참이었고, 세 번째로는 페나인Pennines 산맥을 넘어 하워스Haworth의 브론테 자매 목사관 집으로, 이어서는, 조금 놀랍겠지만, 스트랫퍼드의 셰익스피어 생가로 갈 생각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물론 빅토리아 시대 작가가 아니지만, 그의 집이 발견되고 국민 시인의 중요성에 대한 증거로서 국가적 기념물로 재건된 것은 빅토리아 시대에 와서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런던으로 돌아와 햄스테드Hampstead에 있는 프로이트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프로이트는 1938년에 이곳에다 상담실을 꾸몄는데, 19세기 빈Wien에 있던 것을 고스란히 복제한 형태였다. 빅토리아 사회에서 현대로의 전환을 대표하는 인물을 하나만 꼽는다면 프로이트가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이 여행은 세기 초 낭만주의 운동의 영웅들로부터 시작해 세기말 가족 로망스의 재해석자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집들은 하나같이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사람들은 작가의 집을 해당 작가 및 그의 창작품의 근본적인 표출로 받아들였다. 작가들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자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과 작가의 자기 표현의 상징을 들춰내는 것이며, 방문객의 자아에 심대한 의미를 지니는 만남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작가들의 집 하나하나가 순례의 장소였으며, 그런 만남에 관한 이야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초서의 말마따나 품위 있는 순례에는 이야기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친구인 데이비드와 헬렌과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나는 특히 데이비드에게 기대가 컸는데, 그는 쇼펜하우어 같은 기질을 지닌 의사여서 우리 여행에 필요한 우울한 분위기를 담당하면서 바람직한 유대인들이라면 여행을 할 때 반드시 챙기게 마련인 의료적 지원 역시 제공해 줄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미미하나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껏 순례에 관한, 그러니까 작가와 그들의 집에 관한 책을 여럿 읽었으며 우리가 방문할 집에 관해 작가들이 쓴 글 역시 충분히 읽은 터였다. 그러나 진짜배기 전기 작가라면 뼛속 깊이 느낄 법한, 사물과 장소에 관한 열정적인 유대감을 아직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사랑하고 필요로 하지만, 작가들과 그들의 물건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존 업다이크John Updike의 타자기나 솔 벨로Saul Bellow의 아파트,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의 바지를 왜 가서 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느니 그들이 쓴 책을 읽겠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나는 묘지를 방문한 적이 없다. 적어도 유명 인사의 묘지를 방문한 적은 없다는 뜻이다. 유명 인사의 자필 서명을 보아도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고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에 관해 연설한 곳에도 가 보았지만, 거기서 연설을 하거나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치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사실 카이사르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다.) 나는 J. K. 롤링이 앉아 있곤 했던 커피숍이 『해리 포터Harry Porter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거나, 제프리 아처Jeffrey Archer 산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쇄말주의Trivialism가 그란체스터Grantchester의 아름다운 사제관과 관련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카우치를 보고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추적해야 할 현상에 대해 점점 더 멀뚱해졌다. 작가가 남긴 흔적이 자아내는 감정적 힘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내게 상상력의 세계, 정신의 세계를 열어젖힌 것은 책들이었다. 그런 위대한 장관으로 이르는 문을 닫아걸고 대신 폭 좁은 현실 속 장소와 물건을 좇을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브론테 자매의 목사관이나 셰익스피어의 출생지를 보는 것이 내가 아끼는 문학에 더 다가가게 만든다는 말인가? 수준 높은 사상가들과 비에 갇힌 일요일의 관광객들이 왜 그토록 작가들의 집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모든 순례자들처럼 나 역시 무언가를 찾는 여정에 나설 참이었다. 두렵지만 그 탐색은 나 자신의 욕망과 맹목, 나 자신의 지적·정서적 치장을 들춰 낼 터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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