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의 근본, 효제
유자가 말했다. 그 사람됨이 효와 제를 실천하면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며,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아직 없다.
有子曰 其爲人也 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군자는 근본에 힘을 써야 한다. 근본이 확립되면 도는 저절로 생긴다.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효제수난사
논어의 두 번째 문장은 공자孔子의 말씀이 아니라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말씀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따분하게 효제를 강조하는 이야기라니…. 첫 문장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사람들도 두 번째 문장에서 갸우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유자를 흠잡으며 비난하는 흑색적 방식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유약은 공자 사후 한 동안 공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남은 제자들의 스승 역할을 했을 만큼 뛰어난 제자였다. 물론 공자만큼은 못했다. 한 동안 공자의 역할을 대신했던 유약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런데 예기에는 유약이 말하는 투나 목소리가 공자와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유약은 공자를 닮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급기야 목소리는 물론 몸짓까지 닮게 되었던 것일 게다.
이 문장에서 유약은 효제孝弟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효孝와 제弟는 각각 부모에 대한 사랑과 어른에 대한 공경을 뜻한다. 이 두 가지는 유가가 시대가 바뀌어도 끝까지 지켰던 이념이다. 유가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에는 유가 사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상도 있다. 이를테면 고대의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자사와 맹자학파의 성선설을 그릇된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또 명대의 이탁오 같은 학자는 삭발하고 수염을 길러 승려도 유학자도 아닌 이상한 모습으로 공자의 권위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유가의 서적을 불태웠던 진시황을 최고의 군주로 찬양하기도 하는 등 당시 유학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명말청초의 방이지는 명나라가 망하자 청원산에 들어가 머리 깎고 승려가 되었고 주지까지 되지만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환속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아무리 머리를 깎고 불경을 암송해도 결국은 유학자 방이지였던 게다.
심지어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같은 학자는 대동大同의 이념을 내걸고서, 가족구조를 해체하고 계약형태의 결혼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효제孝弟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유가로 분류된다.
그런데 알고보면 유가에서 강조하는 여러 가지 덕목 중에서 수난을 가장 많이 당한 이념이 바로 이 효제다. 유가에 비판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공익을 해치는 이기주의로 매도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통치의 편의를 위해 유가의 이념을 이용했던 권력자들에 의해 노예의 도덕으로 왜곡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효제를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만들어 개인의 정당한 욕망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오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유가를 표방하는 허깨비 학자들에 의해서도 이런 일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저질러지고 있다.
유약이 한 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이 부분의 내용은 그런 비난에 대한 최초의 항변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인 제스처가 포함되어 있는 발언으로 보아야 한다. 아니면 효제의 의미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이처럼 상하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효제의 효용을 애써 이야기할 턱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효제는 유가가 다른 것은 포기하더라도 끝까지 끌고 가는 이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공자 당시 효제와 국가이데올로기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히려 효제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효제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법가사상가들이다. 상앙은 말할 것도 없고 훨씬 뒤의 사상가인 한비자 같은 경우도 유가의 인애仁愛가 국가를 운영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임금에게 정직한 신하는 부모에게는 포악한 자식이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임금을 속인다고 했다. 효제의 도리와 국가통치의 원리는 서로 모순 대립된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효제를 장려하는 유가의 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시대와 효제
이런 상황에서 유약은 도리어 효제를 실천하는 사람이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는〔범상犯上〕 경우는 오히려 드물며, 또 국가를 혼란하게 하는 일亂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당시에는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유가의 책은 불태워지는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탄압받았던 유가는 화려하게 부활한다. 특히 한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상황을 열어간다. 유교가 국교화된 것이다. 하지만 무제는 사실 동중서 같은 문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유학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동중서를 총애하기는커녕 틈만 나면 죽일 구실을 찾았던 게 무제였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권력을 절약하면서 효과적으로 천하를 다스릴 수 방법이었다. 그는 그것을 유가의 효제에서 찾았다. 대표적인 예로 효렴과孝廉科를 개설하여 효행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하여 벼슬을 주는 제도를 시행한 것을 들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치고 윗사람을 범하거나 난을 일으키는 경우는 아직 없다는 이 구절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가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탄압에 지나지 않는다. 유가의 효제는 진시황이 생각했던 것처럼 공동체 운영의 원리와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한무제가 여겼던 것처럼 공동체에 대한 봉사, 정확하게 말해서 군주에 대한 충성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해주는 순응논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효제는 유가의 목표가 아니라 시작이자 출발점이다. 어쩌면 효제만을 강조하는 주장은 도리어 유가의 이념에 어긋나는 태도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러냐하면 자기 어버이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어버이조차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거짓 딜레마
만약 어느 날 국가가 전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당신의 희생이 불가피하므로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거절하겠다면 당신은 공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사구司寇벼슬(지금의 법무장관 정도에 해당하는 직위)을 하면서 재상의 일을 대신 처리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이웃나라였던 제나라와의 전투에서 어느 병사가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 그 병사는 군법을 어긴 죄로 붙잡혀 왔다. 공자는 그를 처벌하기에 앞서 왜 도망쳤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는 봉양해야 할 늙은 어머니가 있고 자신이 죽으면 노모를 돌 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전쟁에서 도망쳤다고 대답했다. 공자는 진상을 조사해 보고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한 다음 그를 처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상을 내렸다.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물론 한비자는 이와 같은 공자의 행위를 비판했다. 한비자 생각에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백성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해주면 노나라는 전쟁에서 쉽게 패하고 말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국가라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는 거다.
만약 국가운영의 목적이 한 번의 승리에 있다고 인정한다면, 이를테면 손자와 같이 전쟁이 국가의 존망과 개인의 사생을 결정하는 중대사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는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실적으로 한비자의 논의는 정당한 것 같다. 국가는 전쟁에서 승리하든가 아니면 멸망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건 한비자가 대변하는 국가의 처지일 뿐 백성들의 처지일 수는 없다. 백성들은 위의 경우처럼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길을 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굳이 싸움터에서 도망칠 것도 없이 그 전에 아예 다른 나라로 도망하든가 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숨을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비극적 결말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게 백성이다.
『예기』에는 공자가 태산의 깊은 곳에서 세 개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던 한 여인을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시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모두 호랑이에게 잃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 권력의 힘이 미치는 안전한 장소로 가지 않는다. 적어도 그 여인이 사는 곳에는 가혹한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는 고사가 나오게 되었다. 공자는 그 여인의 말을 제자들에게 받아 적게 했다. 가혹한 정치를 피해 이러 저리 도망치는 백성들의 처지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때문에 전쟁터에서 도망친 백성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입장은 한비자식의 국가주의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한비자는 죄지은 자를 보면 미워하지만 공자는 불쌍히 여긴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가 중시했던 효제의 가치가 요즘 말하는 것처럼 편협한 가족주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공자가 강조했던 효제는 오로지 자신의 어버이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어른만을 공경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사람의 어버이를 사랑하는 근거가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을까? 『논어』의 이 구절은 그런 공자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남의 어버이를 사랑하는 도리가 내 어버이를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
강대국 제齊나라의 군주였던 선왕宣王은 한 마리 소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 놓아주라고 명령한다. 맹자는 그런 마음을 두고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어서 선왕에게 소는 사랑할 줄 알면서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고 힐난한다. 전국시대에 백성들이 굶주렸던 이유는 먹을 식량이나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생산량은 그 이전 시기보다 수백 배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맹자는 제후들의 푸주간에는 살찐 고기가 가득하고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가득한데,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들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나뒹군다고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묘사했다. 소 한 마리 끌려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할 줄 아는 제후들이 어찌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맹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확충시키지 못한 데서 찾았다. 제후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배타적 소유욕에 빠져 있었다고 본 것이다.
그 때문에 맹자는 내 어버이를 어버이로 사랑함으로써 그 마음을 남의 어버이에게 미쳐가며, 내 아이를 아이로 사랑함으로써 그 마음을 남의 아이에게 미쳐 갈 수 있다면 천하는 쉽게 다스릴 수 있을 것(노오로이급인지로老吾老 以及人之老 유오유이급인지유幼吾幼 以及人之幼 천하가운어장天下可運於掌)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은혜(사랑하는 마음)를 미루어 갈 줄 알면 사해 안의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은혜를 미루어 가지 못하면 처자식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추은족이보사해推恩足以保四海 불추은무이보처자不推恩無以保妻子).
요컨대 자기 어린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남의 어린 아이를 사랑할 수 있고,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남의 부모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맥락 때문에 송대의 정호程顥같은 학자는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어버이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인각친기친연후人各親其親然後 능부독친기친能不獨親其親)고 한 것이다.
자신의 어버이만을 사랑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고루 사랑하는 것(부독친기친不獨親其親)은 대동大同의 이상이다. 그러나 그런 이상은 각자가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는 행위를 전제할 때 가능하다. 요약하자면 인을 실천하는 것은 효제에 국한되지 않지만 효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효제는 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맹자가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가기 위해서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대상을 우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날을 아끼다[애일愛日]
예부터 글 읽는 사람들 사이에는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고, 진정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 출사표는 말할 것도 없이 제갈공명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기 전 자신의 군주였던 유비를 추모하며 그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글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런데 진정표를 쓴 이밀은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제갈공명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그의 글을 평생 수백 번 수천 번 읽을 정도로 애독했다. 그만큼 옛사람들의 부모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이리라.
삼국지에 따르면 이밀은 본래 촉한 사람으로,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가 죽고 네 살 때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개가하였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 유씨의 양육을 받았다. 촉한이 망한 뒤 진나라 무제가 이밀에게 벼슬을 주어 부르자 그는 할머니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양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이 바로 진정표陳情表다.
“신은 어려서부터 병이 많아 아홉 살이 되어도 걷지 못했으며, 외롭고 고달프게 살면서 어른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숙부나 백부가 없고 형제도 적으며 가문이 쇠퇴하고 복이 박하여 늦게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상복을 입어줄 친척이 없고 안으로는 문에서 손님을 맞이할 동자도 없이 쓸쓸히 지내면서 오직 할머니 유씨에게 의지하며 지냈는데, 그만 할머니가 병에 걸려 누우니 신이 잠시도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신의 나이 금년 마흔 넷이고 할머니 유씨는 금년 아흔 여섯입니다. 때문에 신이 폐하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날은 길고, 할머니 유씨에게 보은할 날은 짧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어린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할머니가 요행이 남은 날을 보존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신은 살아서는 폐하께 목숨을 바칠 것이고 죽어서는 결초보은할 것입니다.”
글을 읽은 무제는 이밀의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지방관들을 시켜 음식과 의복을 보내주는 한편 이밀을 그가 살고 있던 한중의 태수로 제수하여 조모를 떠나지 않고 모실 수 있게 해 주었다. 할머니를 모시는 날이 짧음을 말하는 대목에서 날을 아끼는 이밀의 지극한 효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데 옛사람들은 이를 애일愛日(어버이를 모실 수 있는 날을 아낌)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나라의 율곡 이이가 “옛사람들은 어버이 하루 모시는 것을 삼공의 벼슬과 바꾸지 않았으니 ‘날을 아낌’이 이와 같았다.”고 한 말도 이런 뜻이며, 우리나라 각지에 산재해 있는 ‘애일당愛日堂’이란 당호의 뜻도 마찬가지이다. 농암 이현보는 나이 사십이 넘어 안동의 낙동강 줄기부근에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집을 지었는데 집 이름이 애일당愛日堂이었다. 또 고봉 기대승이 머물렀던 전라도 광주의 월봉서원에도 애일당이 있고, 허균이 머물렀던 강릉 외가도 애일당이었다.
혹자는 애일을 태양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풀이하지만 이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야기다. 애일은 부모가 살아계시는 날을 아끼는 자식의 효성을 뜻한다. 송나라의 주희는 “늘 어버이의 나이를 기억하고 있으면 이미 수를 누리심을 기쁘게 여기고 또 한편으로는 쇠약해지심을 두려워하게 되어서 ‘날을 아끼는 효성’을 저절로 그만두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어버이의 나이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애일愛日의 효성으로 풀이한 것이다.
물론 옛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작정 효성을 강조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백성들 모두가 효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맹자는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쉬는 날을 주어서’ 효성을 닦게 하여 집에 들어가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을 섬기게 한다.”고 했다. 곧 효성을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은 생업을 유지하는 생산적 조건 뿐 아니라 ‘쉬는 날’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인정仁政을 펼 때는 반드시 곤궁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는 외로운 이들에게 먼저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시경에도 “부자들은 괜찮지만 늙고 외로운 사람들이 가엾다.”고 노래했고, 예기에도 “외로운 이를 불쌍히 여기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혜택이 미치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요컨대 부자들보다는 우선 가난한 이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한자에서 ‘孝(효)’라는 글자는 본디 ‘老(노)’와 ‘子(자)’를 위 아래로 배치한 것으로 ‘늙어서 걸을 힘이 없는 노인[老]을 자식[子]이 업고 가는 모양’을 그린 글자다. 결국 효의 대상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약자’이며, 효의 도리란 ‘약자에 대한 배려’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 외로운 사람들이 연이어 죽음을 선택하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 사회에 과연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