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소요유 4장, 5장
커다란 박씨 이야기
─ 장자, 표주박을 타고 강호에 떠다니다
〈소요유〉 편 〈4장〉과 〈5장〉은 장자와 그의 영원한 맞수 혜시의 논쟁입니다. 〈서무귀徐無鬼〉 편에는 장자가 혜시의 무덤가를 지나면서 이제는 자신의 말 상대가 없어져서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장자》가 끝날 때까지 등장하는 맞수 혜시와 장자의 논쟁을 들어보겠습니다.
혜시가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어.위나라 왕이 나에게 커다란 박씨를 주기에 내가 심어서 키웠더니 그 열매의 크기가 다섯 섬이나 되더군. 거기에다 물을 담았더니 그 무게가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고, 그걸 쪼개서 표주박으로 만들었더니 너무 넓고 평평해서 담을 수 있는 게 없었어. 터무니없이 컸고 나는 그게 쓸모가 없다고 여겨서 부숴버리고 말았다네.장자는 이렇게 대답했어.자네는 참으로 큰 걸 쓰는 데 서툴군. 송나라 사람 중에 대대로 손 트지 않는 약을 잘 만드는 이가 있었는데 대대로 솜 빨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먹고살았어.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비싼 값을 주고 약 만드는 비방을 가르쳐 달라고 했어. 가족들을 모아놓고 상의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솜 빨래를 업으로 삼아왔지만 푼돈밖에 벌지 못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큰돈을 벌게 되었으니 비방을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 나그네는 비방을 얻어 오나라 왕에게 가서 이야기했는데 월나라가 쳐들어오자 오나라 왕이 그 나그네를 장수로 삼아 겨울에 월나라 군대와 수전을 벌여 월나라 군대를 크게 이겼어. 오나라 왕은 땅을 쪼개 그 나그네에게 영지를 하사했지. 손 트지 않는 비방은 똑같이 알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영지를 하사 받고 어떤 사람은 솜 빨래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어. 쓴 곳이 달랐기 때문이지. 지금 자네에게 다섯 섬짜리 박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걸 가지고 큰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아니하고 넓고 평평해서 담을 것이 없다고 걱정하는가. 자네에겐 여전히 꼬불꼬불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惠子謂莊子曰 魏王이 貽我大瓠(호)之種하야늘 我樹之成호니 而實이 五石이오 以盛水漿호니 其堅이 不能自擧也어늘 剖之하야 以爲瓢호니 則瓠(확)落하야 無所容이러라 非不呺(효)然大也이언마는 吾爲其無用하야 而掊之호라莊子曰 夫子固拙於用大矣로다 宋人이 有善爲不龜(균)手之藥者 世世에 以洴澼絖으로 爲事어늘 客이 聞之하고 請買其方百金한대 聚族而謀曰 我世世에 爲洴澼絖호대 不過數金이러니 今一朝에 鬻技百金이런대 請與之호리라 客이 得之하야 而說吳王이러니 越有難이어늘 吳王이 使之將한대 冬에 與越人으로 水戰하야 大敗越人하여늘 裂地而封之하니 能不龜手는 一也로대 或以封하며 或不免於洴澼絖하니 則所用之異也니라 今子有五石之瓠이어든 何不慮以爲大樽하야 而浮乎江湖하고 而憂其瓠落하야 無所容고 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인저
장자는 큰 물건을 작게 쓰려고 하는 혜시의 비뚤어진 마음을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송나라 사람 이야기를 해요. 송나라 사람 중에 손 트지 않는 비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기술로 기껏 솜 빨래를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백금을 주고 그 비방을 얻어 전쟁에서 승리하여 제후가 됩니다. 손 트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은 같은데 한 사람은 솜 빨래하는 일을 면치 못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제후가 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이 비유는 장자 전체의 사상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장자답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쓸모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는 결국 쓸모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혜시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큰 물건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쓸모없다고 여긴 혜시의 꼬불꼬불하게 꼬인 마음을 비판하는 데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꼬불꼬불하다는 것을 봉蓬 자로 표현했는데 봉은 본래 꼬불꼬불하게 자라는 쑥을 말합니다. 《순자》에 보면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받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게 자란다蓬生麻中 不扶而直”고 했는데, 여기서도 봉이라는 쑥이 본래 꼬불꼬불하게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앞서 이 우화에 보이는 장자의 논리는 혜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장자가 마지막에 혜시를 나무라면서 “큰 박씨를 가지고 있다면 강이나 호수에 띄우면 되지 어째서 쓸모가 없다고 하는가”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에 이르면 스스로 말한 쓸모의 논리를 넘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커다란 박을 갈라 만든 배를 물 위에 띄워놓고 한가로이 강물 위를 떠다니는 장자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쓸모없음을 오히려 대용으로 여기는 이야기는 바로 다음 장에 이어집니다.
소요와 방황을 아는가
─ 낮잠자는 장자
〈소요유〉 편 〈5장〉도 〈4장〉과 마찬가지로 장자와 혜시의 논쟁입니다. 주제도 거의 비슷합니다만 〈4장〉의 수준을 넘어서 두 사람의 견해가 보다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어.나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중나무라 하더군. 커다란 줄기는 울퉁불퉁해서 먹줄에 맞춰 자를 수 없고 작은 가지는 구불구불해서 그림쇠나 곱자에 맞질 않아. 그래서 길가에 서 있는데도 목수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네. 지금 자네의 말도 이 나무와 같아서 크기만 하지 쓸모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이 듣지 않고 다 떠나버리는 게야.장자가 이렇게 대꾸했어.자네는 살쾡이를 본 적이 없나? 몸을 바짝 낮추고 엎드려서 놀러 나온 짐승들을 엿보다 아무 데나 뛰어다니는데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가리지 않다가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잡혀 죽고 말지. 그런데 저 검은 들소는 크기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지만 크기만 할 뿐 쥐새끼 한 마리도 잡질 못해. 지금 자네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그게 쓸모없어서 걱정된다면 어찌하여 무하유의 고을 아득한 들판에 심어두고 그 곁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그 아래에서 한동안 거닐다가 잠깐 낮잠이나 자지 않는가. 도끼에 베여 일찍 죽을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칠 이가 없을 것이니 쓸모없다는 것이 어찌 괴로운 일이기만 하겠는가.惠子謂莊子曰 吾有大樹호니 人이 謂之樗라 하더니 其大本은 擁腫하야 而不中繩墨하고 其小枝는 卷曲하야 而不中規矩라 立之塗호대 匠者不顧하나니 今子之言이 大而無用이라 衆所同去也로다 莊子曰 子獨不見狸狌乎아 卑身而伏하야 以候敖者하야 東西跳梁하야 不辟(피, 避)高下하다가 中於機辟(벽, 繴)하며 死於罔罟하나니라 今夫斄(리)牛는 其大若垂天之雲하니 此能爲大矣로대 而不能執鼠하나니라 今子有大樹호대 患其無用이어든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廣莫之野하고 彷徨乎無爲其側하며 逍遙乎寢臥其下오 不夭斤斧하며 物無害者하리니 無所可用이어니와 安所困苦哉리오
비유로 삼는 사물만 바뀌었을 뿐 서사 구조가 〈4장〉과 동일합니다. 앞서 커다란 박씨 이야기를 했던 혜시는 여기서 커다란 나무를 비유로 들며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커다란 나무 이야기는 《장자》에 여러 차례 나오지요. 320만 년을 산다는 상고시대의 대춘, 산을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로 키가 크지만 장석이 쓸모없는 나무라 했던 역사수, 남백자규가 상구의 들판에서 보았던 그늘 속에 수천 마리 소가 쉴 수 있을 만큼의 거목, 그리고 〈제물론〉 편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목大木이 나옵니다. 《장자》에서 나무가 현자의 이미지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생명체 중에서 나무가 가장 오래 사는 존재이기 때문일 겁니다. 《장자》의 중요한 열쇳말 중의 하나인 ‘양생養生’을 잘하는 생명체라 볼 수 있지요.
혜시는 여기서 그런 나무가 쓸모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혜시는 이른바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 곧 흰말은 말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 당대의 논리학자로 나와 너의 ‘차이’에 주목한 사람입니다. 이 경우 사물의 내적 연관성보다는 외적 차이가 더 중요해집니다. 사실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을 극단으로 몰고 가면 분리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때로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지요. 한때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죠. 그런 말 속에 숨어 있는 폭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말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배제를 정당시하는 ‘소동小同’의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혜시의 ‘백마비마론’은 그런 소동의 논리를 깨는 데 유효합니다. 소동이란 특정 지역 또는 특정 학교, 특정 기업 등에 적용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소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게 상위의 가치를 침범하면 해악이 큽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의 가치가 국가나 민족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 나라의 근대사가 잘 알려주고 있지요.
이에 반해 ‘대동大同’은 ‘부동不同’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태도입니다. 즉, 상대와 나의 차이를 알고 공존을 꾀하는 것입니다. 사실 차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타인과 어울려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혜시는 이런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당시 천하가 진나라로 통합되는 분위기에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속되게 말하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눈치 없이 진나라의 천하와 위나라의 천하는 다르다고 외친 겁니다. 그 당시 분위기 파악을 가장 못한 사람은 단연 맹자였습니다. 온 천하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땅을 빼앗는 전쟁에 골몰하고 있는데 홀로 인의仁義를 외치고 다녔으니 만난 임금들마다 모두 맹자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게 바로 맹자가 위대한 까닭이죠. 그 점에서만은 혜시도 마찬가지이고 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혜시는 여기서 커다란 나무를 비유로 들면서 장자의 말을 사람들이 듣지 않는 까닭은 크기만 하지 쓸모가 없기 때문大而無用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버린다衆所同去也’고 말한 데서 천하의 이야기꾼 장자가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혜시가 장자의 아픈 데를 찌른 거죠. 하지만 장자는 세상에서 쓸모가 있다고 하는 자들을 ‘이성狸狌’, 곧 살쾡이로 비유하면서 바로 반격합니다. 시랑豺狼이라 하지 않고 이성이라고 한 것은 상대가 절친한 벗인지라 많이 봐준 표현입니다. 시랑은 승냥이로 흔히 살쾡이보다 악질적인 짐승으로 그려지거든요. 어쨌든 이놈들은 몸을 바짝 낮추고 있다가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데 뛰어난 자신의 재능을 믿고 높은 곳 낮은 곳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날뛰다가 결국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고 맙니다. 사람으로 치면 남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마는 전쟁광들이라고 할 수 있죠.
이 편은 〈소요유〉 편의 마지막 장으로 장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열쇳말이 연이어 나옵니다. 장자는 혜시에게 무하유지향의 아득한 들판에 커다란 나무를 심어놓고 그 아래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소요 방황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고을’이라는 뜻과 함께 ‘삶을 해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理想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도 장자의 무하유지향과 비슷한 착안에서 만들어진 말이지요.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에서 없다는 뜻인 ‘ou’와 장소를 나타내는 ‘toppos’를 합쳐서 만든 낱말이므로 말뜻도 비슷합니다. 흔히 좋지 않은 의미로 쓰는 방황彷徨은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당나라 태종 때의 도사 성현영成玄英은 방황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둔다縱任”는 뜻으로 풀이했고 《경전석문》의 저자 육덕명陸德明은 방황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猶翶翔也”고 풀이했습니다. 《장자》에서는 날아다니는 것이 자유를 상징한다고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장자강의》, 전호근 지음, 동녘, 2015.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