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소요유 2장, 3장
천하를 쓸데가 없다
─ 이름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
〈소요유〉 편의 〈2장〉입니다. 〈2장〉의 주인공은 고대의 제왕 요임금과 은자 허유입니다. 실제로는 만날 일이 절대 없었을 두 사람을 장자가 이야기 마당에 불러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읽어보겠습니다.
옛날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양보하면서 말했어.
해와 달이 높이 떠올랐는데 횃불을 아직도 끄지 않는다면 빛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때맞추어 단비가 내렸는데도 계속 도랑물을 끌어대려 한다면 또한 쓸데없는 고생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임금 자리에 앉으면 천하가 다스려질 텐데 내가 아직도 주인 노릇하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천하를 당신께 바칠까 합니다.
그러자 허유가 이렇게 대답했어.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서 천하가 이미 다스려졌는데 내가 당신을 대신한다면 나더러 이름만 차지하란 말입니까? 이름이란 마치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와 같은 것인데 나는 껍데기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뱁새가 깊은 수풀 속에 집을 짓지만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새앙쥐가 황하의 물을 마시지만 배를 채우면 그만입니다. 임금께서는 돌아가시지요. 나는 천하같이 큰 물건을 쓸데가 없습니다. 게다가 요리사가 요리를 잘못한다 하더라도 축문 읽는 사람이 제사상을 넘어가 그 일을 대신하지 않는 법입니다.
堯 讓天下於許由 曰 日月이 出矣어늘 而爝火不息이 其於光也에 不亦難乎아 時雨降矣어늘 而猶浸灌이 其於澤也에 不亦勞乎아 夫子立이면 而天下治어늘 而我猶尸之호니 吾自視缺然하나니 請致天下하노이다
許由曰 子治天下하야 天下旣已治也어늘 而我猶代子면 吾將爲名乎아 名者는 實之賓也이니 吾將爲賓乎아 鷦鷯巢於深林에 不過一枝하며 偃鼠飮河에 不過滿腹이니 歸休乎君하라 予無所用天下爲호리라 庖人이 雖不治庖라도 尸祝이 不越樽俎而代之矣니라
요임금은 순에게 제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현군으로 칭송받는 인물이지요. 그에게는 단주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불초했기 때문에 자신과는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순舜을 발탁하여 천하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자는 그 요임금이 은자인 허유를 찾아와 천하라는 가장 큰 물건을 바치려했다고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실 좋은 물건을 바치면 그것을 받는 사람은 좋아하기 마련이고 게다가 그 물건이란 게 천하라면 더욱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요임금은 허유의 덕을 해와 달에 견주고 때맞추어 내리는 비로 비유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덕은 횃불이나 도랑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덕이 더 큰 허유가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횃불이 빛을 발하기가 어렵다고 했지요. 여기서 빛을 뜻하는 광光 자는 본디 ‘사람의 빛’을 그린 글자입니다. ‘光’ 자의 갑골문은 사람을 뜻하는 ‘人인’ 자의 윗부분에 별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별 모양은 빛을 묘사한 것입니다. 또 고문의 ‘光’ 자는 위에 불을 뜻하는 ‘火’ 자가 있고 아래에 ‘人’ 자가 있는 꼴로 많이 쓰이는데 역시 사람의 빛을 나타내는 글자입니다.
요컨대 요임금의 말은 지금까지 자신이 천하를 다스려왔지만 태양과 같은 덕을 갖춘 허유가 나타났으니 그에게 천하를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때맞춰 내리는 단비와 도랑물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덕德의 기능을 ‘光’ 자로 표현한 것이라면, ‘만물을 촉촉이 적셔주는’ 덕의 기능을 ‘澤택’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澤’ 자는 윤택潤澤의 뜻으로 만물을 적셔주는 것인데 그걸 덕택德澤이라고 하죠. 모름지기 덕광德光과 덕택德澤이 큰 사람이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하지만 허유는 전혀 다른 논리로 대답합니다.
요임금이 태양과 단비로 치켜세웠는데도 허유는 우쭐하지 않고 간단한 비유로 대답합니다. 뱁새가 깊은 수풀 속에 집을 짓지만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새앙쥐가 황하의 물을 마시지만 배를 채우면 그만이라고요. 한마디로 자신은 뱁새와 새앙쥐와 같은 존재로 만족하기 때문에 천하 같은 큰 물건은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더욱이 요리사와 축문 읽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천하가 어떻게 되건 말건 자신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지요. 섣부르게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는 식의 명분을 내걸지 않지요.
막고야산의 신인
─ 미치광이접여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소요유〉 편의 〈3장〉입니다. 〈3장〉의 주인공은 견오와 연숙,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이야기꾼으로 등장하는 접여, 접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인들입니다. 이 중에서 접여는 공자를 만난 적이 있는 초나라의 육통陸通이라는 인물이고 나머지는 모두 장자가 지어낸 가공의 사람들입니다.
견오가 연숙에게 말했어.
내가 접여에게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거창하면서도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끝없이 뻗어나가기만 할 뿐 돌아올 줄 몰라.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마저 느꼈다네. 마치 강물처럼 끝이 없더군. 너무 크게 차이가 나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비슷한 점도 없었거든.
연숙이 견오에게 물었어.
뭐라 그러던
견오가 말했어.
막고야산에 신인이 사는데 그들은 피부가 마치 얼음이나 눈처럼 희고 처녀의 살결처럼 부드러운데 곡식은 먹지 않고 바람과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사해 밖에서 노닌다네. 그들의 정신이 응집되면 백성들이 힘들게 농사짓지 않아도 햇곡식이 저절로 익는다고 하는데 나는 미친 소리라고 여겨서 믿지 않는다네.
肩吾 問於連叔하야 曰 吾聞言於接輿호되 大而無當하며 往而不返일새 吾驚怖其言호니 猶河漢而無極也러라 大有逕庭이라 不近人情焉이러라
連叔曰 其言은 謂何哉오 曰 藐姑射之山에 有神人이 居焉하니 肌膚若氷雪하고 綽約若處子하니 不食五穀하고 吸風飮露하야 乘雲氣하며 御飛龍而遊乎四海之外하니니 其神이 凝하면 使物로 不疵癘而年穀이 熟이라할새 吾以是로 狂而不信也하노라
견오肩吾와 연숙連叔은 가공의 인물로 두 사람의 이름에 담긴 우의寓意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견오의 ‘견肩’은 어깨라는 뜻이므로 남의 말을 듣고 거들먹거리거나 들썩이기 쉬운 경망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습니다. 연숙連叔은 ‘이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근원의 세계인 도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으로 생각이 깊은 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견오가 접여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워낙 황당해서 연숙에게 물어보는 대목입니다. 견오의 생각에 접여의 이야기는 거창하기만 하고 합당한 구석이 없을 뿐더러 이야기가 끝없이 뻗어나가기만 하고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크기만 하고 합당한 구석이 없다大而無當는 것은 이른바 세속적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이야기를 호의적으로 듣는 게 쉽진 않지요. 게다가 접여의 이야기는 끝이 없더라는 게 견오의 하소연입니다. 이야기란 모름지기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야 하는데 접여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서 마치 황하나 한수처럼 아득하다는 겁니다. 그리곤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차이가 나서 인정에 가깝지 않다고 말합니다. 경逕은 좁은 길이고 정庭은 넓은 뜰을 말합니다. 그래서 경정逕庭이라고 하면 차이가 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견오가 전하는 접여의 이야기에서 장자는 막고야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네 명의 신인을 등장시킵니다. ‘막고야藐姑射’는 산 이름인데, 세 글자를 모두 산 이름으로 보지 않고 앞의 막藐자를 따로 떼어서 ‘아득한藐 고야姑射’ 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석도 있지만, 산 이름 앞에 막藐 자가 붙는 경우를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막 자를 수식어가 아니라 산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막고야산에 사는 신인들은 인간의 곡식을 먹지 않고 구름과 용을 타고 사해 밖에서 노니는 존재로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를 뜻하는 ‘유遊’ 개념이 또 등장하죠. 곡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이 인간 세상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당연히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지요.
아무튼 견오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건 이야기도 아니야”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우리도 흔히 새로운 장르를 접할 때 “이건 영화도 아니다”, “이건 소설도 아니다”는 식으로 무책임한 비평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견오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인데, 그가 보기에 접여의 이야기는 미친 소리라는 겁니다. 사실 접여는 본디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초나라의 미치광이楚狂’로 불렸던 사람이지요. 하지만 연숙이 보기에 접여를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연숙이 말했어.
그렇겠지. 본래 장님은 아름다운 옷 장식을 감상하는 데 끼어 들 수가 없고 귀머거리는 아름다운 악기 소리를 감상하는 데 함께 할 수 없는 법이지. 어찌 몸에만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있겠는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자네 같은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이야. 그런 사람과 그런 덕은 만물을 반죽해서 하나로 만들 것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스려주기를 바라지만 누가 구질구질하게 천하를 일거리로 삼으려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그 무엇도 해칠 수 없는지라 홍수가 나서 하늘까지 물에 잠길 지경이라도 빠지지 않으며 가뭄이 들어 쇠나 돌까지 녹아내리고 흙산까지 그을릴 정도가 되어도 뜨거워하지 않을 터. 이 사람들의 때나 찌꺼기를 가지고도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빚어낼 수 있을 걸. 그러니 그들 중 누가 천하를 위해 일하겠다고 나서겠는가.
連叔이 曰 然하니라 瞽者는 無以與乎文章之觀하고 聾者는 無以與乎鐘鼓之聲하나니 豈唯形骸有聾盲哉리오 夫知도 亦有之하니라 是其言也는 猶時女也로다 之人也 之德也는 將旁礴萬物하야 以爲一하나니 世蘄乎亂이로대 孰弊弊焉하야 以天下로 爲事리오 之人也는 物이 莫之傷이라 大浸稽天而不溺하며 大旱에 金石이 流하며 土山이 焦라도 而不熱하나니 是其塵垢粃穅으로 將猶陶鑄堯舜者也니 孰肯以物로 爲事리오
연숙의 나무람은 이보다 더 신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수준 높은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친 소리라고 비난하는 자들은 편견에 사로잡힌 정신적 귀머거리, 장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연숙은 이어서 접여의 이야기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연숙은 막고야산의 신인들은 만물을 반죽해서 하나로 만든다고 합니다. 만물을 하나로 만든다는 말은 만물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한다는 뜻으로 제2편 〈제물론〉의 예고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만물을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통치자가 돼주기를 바라겠죠. 그런데 이 신인들은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번거롭게 천하를 다스리려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무엇도 이들을 해칠 수 없습니다. 하늘까지 물이 가득 차는 홍수가 나도 물에 빠지지 않으며 크게 가물어 흙산이 그을리고 쇠나 돌이 녹아내릴 정도가 되어도 뜨거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외물의 변화에 따라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여 실제로 신인들처럼 곡식을 먹지 않고 바람과 이슬을 마시고 섭생하면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불로장생을 꿈꾸던 제왕이나 도교 학자들 가운데 흡풍음로吸風飮露하다가 화를 당한 경우가 꽤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여겨 듣지 않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문학적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의 귀머거리, 장님이라 해야겠죠.
연숙은 또 다른 예를 들어서 그들을 나무랍니다.
송나라 사람이 은나라의 화려한 장보관을 밑천으로 장만해서 월나라에 갔는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몸에 문신을 새기는지라 쓸 곳이 없었다고 해. 요임금이 천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해내의 정치를 고르게 한 다음에 네 신인을 막고야산에서 찾아뵙고 분수의 북쪽에서 멍하니 천하를 잊어버렸다고 하더군.
宋人이 資章甫而適諸越한대 越人이 斷髮文身이라 無所用之니라 堯治天下之民하며 平海內之政하고 往見四子藐姑射之山하고 汾水之陽에 然喪其天下焉하니라
여기의 송나라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껏 장사 밑천으로 은나라 시대의 장보관을 장만했는데 그걸 가지고 월나라에 가서 팔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월나라는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남쪽 지역으로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기고 살았기 때문에 은나라의 화려한 장보관 따위는 쓸모가 없었거든요. 장사 망했겠죠.
이 대목을 두고 송나라 사람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이 아니라 송나라의 아름다운 장보관을 월나라 사람들이 무지해서 알아보지 못한 것을 나무란 것이라고 풀이한 견해도 있습니다. 앞뒤의 맥락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송나라 사람을 풍자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송나라 사람은 장보관이 훌륭한 문화 상품이라고 생각했고, 요임금은 천하를 보물이라고 여긴 거죠. 그 모두가 다른 데서는 쓸데없는 물건이라는 게 이 대목의 주제입니다.
─『장자강의』, 전호근 지음, 동녘, 2015.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