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소요유 1장
장자의 첫 번째 편은 〈소요유逍遙遊〉인데, 여기서 ‘유遊’는 ‘논다’는 뜻입니다. 온 천하가 전쟁에 미쳐 날뛰는 시대에 어떻게 노는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놀 뿐만 아니라 낮잠 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장자는 〈소요유〉 편에서 ‘소요’를 ‘침와寢臥’ 즉, ‘낮잠 잔다’는 말과 짝을 이루어 쓰고 있거든요. 결국 장자는 첫 편부터 낮잠 자면서 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노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가치 기준을 바꿔야만 가능해집니다. 만약 맹자라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무슨 노는 얘기인가하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맹자는 절대로 노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 〈소요유〉 편에 나오는 〈1장〉의 이야기는 대붕大鵬 이야기입니다.
물고기 새가 되다
─ 변화의 의미와 은유
저 멀리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이 곤이야. 곤의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아무도 몰라.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해. 붕의 등이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어. 이 붕새가 온 힘을 다해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이 새는 바다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못이야.
北冥有魚하니 其名爲鯤이니 鯤之大는 不知其幾千里也로다 化而爲鳥하니 其名爲鵬이니 鵬之背는 不知其幾千里也로다 怒而飛에 其翼이 若垂天之雲하니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하나니 南冥者는 天池也라
북명北冥, 北溟은 저 아득한 북쪽 바다, 곧 하늘의 바다입니다. 명말청초의 학자 방이지方以智는 이 대목의 마지막에 ‘남명’을 ‘하늘의 바다〔천지〕’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의 ‘북명’도 천지임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상의 바다죠. 그러니 크기의 제한이 없습니다. 그 아득한 바다에 사는 물고기의 이름이 ‘곤’입니다. 그런데 이 곤의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장자가 큰 물고기의 이름으로 쓴 ‘곤鯤’이라는 글자는 본디 ‘물고기의 새끼’, 또는 ‘물고기의 알’이라는 뜻입니다. 장자의 재치가 돋보이죠. 가장 작은 사물을 빌려 가장 큰 사물에 비유합니다. 반대로 가장 큰 것을 또 가장 작은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장자》를 읽으려면 이런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비유란 게 쉽질 않아요. 예를 들어 《시경》에는 희고 올록볼록한 굼벵이를 비유로 들어 미인의 아름다운 목덜미를 표현한 시가 있습니다. 〈석인碩人〉이라는 시인데요. 그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손은 부드러운 삘기 같고/피부는 엉긴 기름 덩어리 같고/목덜미는 굼벵이 같고/이는 박씨 같고/매미 머리에 나방의 눈썹이라네. 〔手如柔荑/膚如凝脂/領如蝤蠐/齒如瓠犀/螓首蛾眉〕
손을 삘기에 비유했는데 만약 하얗고 부드러운 삘기가 뭔지 모른다면 이런 표현을 이해할 수 없겠지요. 또 목덜미가 굼벵이 같다고 했는데 아마 여인의 목덜미가 굼벵이처럼 하얗고 올록볼록했나 봅니다. 지금 우리가 굼벵이를 가지고 미인의 목덜미에 견주면 이상하게 받아들이겠지요. 이것은 각 시대의 미적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 딸아이의 경우 자연학교 체험을 다녀오고부터는 벌레를 보면 손바닥에 올려놓고 기어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곤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징그럽다고 생각했지요. 아마도 벌레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딸아이보다 징그럽다고 하는 제 자신이 잘못 길들여진 것이겠죠. 이해하지 못하는 비유라도 그게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면 한번쯤 자신의 감각을 반성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장자》를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마천이 “글을 짓고 말을 붙이는 데 뛰어났다善屬書離辭”고 이야기한 것처럼 장자는 비유에 뛰어난 문학가였습니다. 장자의 비유에 근접한 사람을 들라면 조선시대 문장가 연암 박지원을 들 수 있습니다. 장자가 주로 거창한 비유를 들먹인다면 박지원은 아주 작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온 천하가 들어 있지요. 예를 들어 〈공작관문고서〉에는 시골 사람과 같이 잠을 잔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잔 적이 있었는데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서 어떤 때는 토하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휘파람 부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탄식하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숨을 크게 내쉬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불을 부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물이 솥에서 끓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빈 수레가 덜컹거리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 쉴 때는 드르렁 하고 톱질하는 소리가 났고 내뿜을 때는 마치 새끼 돼지가 씩씩대는 것 같았다. 〔甞與鄕人宿 鼾息磊磊 如哇如嘯 如嘆如噓 如吹火 如鼎之沸 如空車之頓轍 引者鋸吼 噴者豕豞〕
어떻습니까? 200년 전에 한문으로 쓰여진 글인데 번역해놓고 보니 바로 곁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습니까?
장자는 사물의 성질에 꼭 맞게 비유를 들면서도 그 속에 논리적 극한을 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천지가 손가락 하나와 같고 만물이 한 마리 말과 같다는 식이지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비유를 들지 않고 논리적 극한을 직접 드러내는 표현도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곤’이라는 물고기는 《주역周易》에서 땅을 상징하는 괘인 곤坤과 발음이 같습니다. 본래 주周나라는 유목민이 세운 나라로 하늘을 숭배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주나라 역, 곧 《주역》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괘가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농경민족이었던 은殷나라의 역에는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먼저 나옵니다. 그 다음에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괘가 나오지요. 그래서 은나라의 역을 ‘곤건역坤乾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곤에는 만물의 시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장자》 첫 편에 나오는 주인공도 우연히 물고기의 시원을 뜻하는 곤鯤입니다. 최초의 물고기를 뜻하기도 하고 물고기의 알이나 치어를 뜻하기도 합니다. 장자는 그것을 엄청나게 거대한 물고기로 그려냅니다. 그래서 장자의 ‘곤’에는 극대와 극소가 공존합니다. 뿐만 아니라 ‘화이위조化而爲鳥’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물속에서 헤엄치는 존재인 이 ‘곤’이 변화를 거쳐서 ‘새’가 됩니다. 변화를 뜻하는 ‘화化’는 《장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화化’ 자 위에 땅을 뜻하는 ‘일一’을 그으면 죽는다는 뜻인 ‘사死’ 자가 되죠. 사실 화자의 왼쪽에 있는 ‘인人’ 자는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비匕’ 자는 죽은 사람을 그린 것입니다. 화살표로 그리면 ‘人→匕’의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化’는 산 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사멸하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변화입니다. ‘화化’ 자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은 기존 존재의 소멸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물고기가 새로 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인데 장자는 이 둘을 같다고 합니다. 장자의 뜻을 이해하는데 학자 방이지의 견해가 도움이 됩니다. 방이지는 《주역》 〈건괘〉 편에서 ‘잠룡’과 ‘비룡’의 얘기를 끌어와 《장자》의 ‘대붕’을 풀이합니다. 건괘는 여섯 개의 양효陽爻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효는 물속에 있는 잠룡潛龍을 상징하며 다섯 번째 효는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을 상징합니다. 물속에 잠겨 있던 용이 하늘을 나는 용이 되는 거죠. 결국 ‘잠’과 ‘비’의 차이에 주목하면 전혀 다른 존재로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용’이라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곤’과 ‘붕’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다른 존재로 보이지만 사실은 연속적인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런 논리는 삶과 죽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대종사〉 편에 보면 “무無를 머리首로 여기고 삶을 등脊으로 여기고 죽음을 꼬리尻로 여긴다”는 말이 나옵니다. 삶과 죽음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속적인 존재라는 것이지요. 삶과 죽음이 같은 것이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방이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中庸》을 이야기합니다. 《중용》에 “솔개는 날아 하늘가에 다다르며 물고기는 깊은 물속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 시는 본래 《시경》 〈한록〉 편의 구절입니다. 《시경》은 말할 것도 없이 유가의 대표 문헌이지요. 공자의 손자 자사가 《중용》에서 이 시를 인용하면서 ‘솔개는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존재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뛰노는 존재지만 사실은 둘 다 같은 이치’라고 이야기합니다. 방이지는 공자의 집안에 본래 한 폭의 ‘천연도泉淵圖’가 있었는데 장자가 그것을 훔쳐다가 곤붕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장자를 유가로 끌어들인 것이지요. 아무튼 물고기가 새로 변화하는 이야기는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곤붕의 이야기로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가 같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만물의 동일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제물론〉 편에 가장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소요유〉 편에서는 일단 붕새의 엄청난 크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합니다. 엄청난 크기의 붕새가 날아오르면 날개가 마치 하늘의 구름인가 착각할 정도죠.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곧 바다에 큰 바람이 불면 그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목적지는 하늘의 바다인 남명南冥, 南溟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자신이 창작한 이야기를 세상에 우언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그게 마치 다른 사람이 이미 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처럼 또 다른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어디까지가 장자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전해오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장자강의』, 전호근 지음, 동녘, 2015.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