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날씨가 추워진 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子曰 歲寒然後에 知松柏之後彫[凋]也
- 『논어』, 「자한」 -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진법을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제사지내는 일은 들은 적이 있지만 전쟁하는 일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시고, 다음날 떠나셨다.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져, 따라갔던 제자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선생을 뵙고는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묻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본디 곤궁하니, 소인은 곤궁하면 넘친다.”
衛靈公 問陳(陣)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 『논어』, 「위령공」 -
세한도를 ‘읽는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서울 봉은사에는 목판 불경을 보관한 건물이 있는데 이를 알리는 현판이 ‘판전’이다. 김정희가 썼다.
<판전(板殿), 1856년, 서울 봉은사> |
1856년에 제작된 이 현판은 왼쪽 낙관부에 ‘일흔 하나 된 노인이 병중에 썼다七十一果病中作’고 쓰인 글이 암시하듯 김정희가 남긴 마지막 글씨다. 어찌 보면 획마다 한없이 삐뚤고 균형도 안 맞아서 어린애가 서툴게 쓴 글씨 같기도 하다. 그런데 명필이라면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김정희 글씨다. 게다가 가장 무르익었을 법한 말년의 글씨라니.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판전'은 무거운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붓의 무게마저 내려놓은 노인의 마음이 담긴, ‘해탈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글씨’일지도 모른다.
추사 김정희는 글과 그림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데 더 놀라운 건 그저 눈으로만 봐서는 그의 작품이 품은 뜻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삶을 통한 체험의 무게와 더불어 시공간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곁들이지 않고서는 그의 글도 그림도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추사는 자기 빛깔이 확실한 예술가다. 눈에 보이는 단편이 아니라 그림에 담긴 정신을 보게 하는 사람. 우리가 감각기관인 눈에만 의지할 때 그 정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또 하나의 눈이 필요한 까닭이다. 추사는 그런 눈 가운데 하나로 문자를 제시한다. 선현의 글에 담긴 정신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눈을 뜨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추사가 그림을 그리는 화인들에게 늘 요구했던 문자의 향기였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전혀 다른 매체라고 생각하는 그림과 글이 만난다. 그림은 글이 되고 글은 그림이 된다. 그래서 세한도 또한, 보아서는 보이지 않고 잘 읽어야 비로소 보인다.
세한도의 탄생
<세한도, 1844년, 종이에 수묵화, 가로 69.2㎝ 세로 23㎝, 국보 제180호> |
1844년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날.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온 지도 어언 다섯 해가 흘렀다. 한 때 생사를 같이하던 벗들도 이젠 소식조차 전해오지 않는다. 그런데 또 다시 육지에서 보내 온 거질의 책이 바다를 건너 김정희에게 전해졌다.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만 리 바깥, 북경에서 여러 해를 두고 구해서 보내준 귀중한 책이다. 모든 사람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데 이상적만은 옛정을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해준 것이다. 김정희는 그를 칭찬하는 뜻에서 갈라진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발문을 썼다. 조선 문인화의 최고걸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얼핏 보면 세한도에는 제대로 그려진 사물이 없다. 단지 네 그루의 나무와 집 한 채만 그려져 있으니 여백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먹도 충분치 않고 붓도 온전하지 못한 듯 여기 저기 갈라진 붓 자국이 화인이 마주한 힘겨운 삶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무슨 나무인지 형태를 분명하게 알아보기 힘든 왼 쪽의 두 그루 나무, 그리고 세부 묘사가 전혀 없는 한가운데의 집을 보면 기우뚱하기도 하고 대칭이 맞지 않아 허술하기도 하여 도대체가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고 그린 것 같지 않다. 마치 앞으로 더 가필해서 완성해야 할 그림이거나 아예 그리다가 흥취가 사라져 붓을 던져버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림을 처음 들여다보면 그림보다 오히려 오른쪽 위에 단정하게 쓰여진 ‘歲寒圖(세한도)’라는 세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림의 제목이다. 그림에서 이런 식의 제목은 감상을 도와주기보다는 도리어 방해가 되기도 한다. 뜻이 분명한 글은 때로 보는 이의 예술적 상상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희는 늘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고 사의寫意를 중시했다. 이런 태도 때문일까, 추사의 글자체는 그림 같다. 그럴 만큼 추사는 글씨를 그림처럼 쓰고 그림에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세한도의 경우는 더 그렇다. 세한도라는 제목에는 “이 그림은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김정희의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읽기
세한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갈라진 붓으로 그려진 그림과는 달리 세한도에 쓰여진 글씨는 단정하기만 하다. 특히 제목인 ‘세한도歲寒圖’ 세 글자는 마치 그림을 볼 때 시선을 옮기는 차례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써져 있고, 그 왼쪽에서 다시 세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 네 글자가 있다. “우선藕船은 이 그림을 감상하라.”는 뜻이다.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다. 그리고 바로 왼쪽에 완당阮堂이라는 김정희의 호가 쓰여져 있고 그 아래에 완당의 이름 ‘정희正喜’ 두 글자가 붉은 색 인장에 음각으로 찍혀 있다.
다시 그 아래에는 마치 사람의 다섯 손가락이 ‘歲寒圖’라는 세 글자를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솔잎 그림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글씨의 세계에서 그림의 세계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세한도의 풍경은 참으로 이상하다. 한마디로 세한도에 그려진 사물들은 수수께끼투성이다. ‘세한’이라는 말의 유래가 《논어》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고 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나면 세한도에 그려진 나무는 당연히 소나무와 잣나무(또는 측백나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맨 오른쪽에 있는 나무를 살펴보자. 줄기가 울퉁불퉁한 것으로 보아 소나무가 틀림없다. 하지만 솔잎은 두 개 또는 세 개인데 이 나무의 잎은 다섯 개다. 그렇다면 잣나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잣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정희는 나무의 실제 모습을 관찰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는 말인가?
이상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나무는 형태가 잣나무인지 측백나무인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가지의 형태가 지면과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잣나무인 것 같다. 그런데 잣나무와는 달리 가지가 마주보고 있지는 않다.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한 가운데 있는 집의 모양도 이상하다. 엉성하게 그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쪽 오른편의 처마 각도는 완만한데 뒤쪽의 처마는 각도가 급하다. 집을 저렇게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혹 뒤쪽 처마가 무너져 내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또 앞쪽에 보이는 문은 원형인데 안으로 열려 있는 모습을 그린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가옥은 우리나라에는 없다.
그렇다면 세한도는 김정희가 자신이 유배되었던 제주의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닐뿐더러 수종을 알 수 없는 나무와 있을 수 없는 집을 그린 괴이한 작품인 셈이다. 그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려서 세한도라 이름을 붙이고 이상적에게 주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왜 이 작품이 500년 조선 문인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물론 세한도의 풍경은 이상하기도 하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볼품없음이야말로 ‘세한의 풍경’이다. 세한도는 어떤 면에서든 풍요의 산물이 아니다. 평생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내고 붓 천 자루를 닳게 했던 김정희의 필력으로 한 글자를 쓰기도 어려운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황폐의 끝에서 탄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사는 발문을 통해서 ‘세한의 풍경’을 넘어서는 그림을 보여준다.
세한도가 명작인 이유는 바로 이 그림 한 장에 그가 추구한 불멸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추사는 늘 ‘문자의 향기’를 강조했다. 따라서 추사의 그림을 감상할 때는 단지 눈에 보이는 ‘그림’에서만이 아니라 문자의 향香이라 할 수 있는 ‘정신’을 보아야 한다. 다행히 추사는 그림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된 까닭을 발문에 자세히 써 놓았는데 그 발문을 통해 우리는 수 천 년 전부터 세한의 시련을 극복해 온 오래된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추사가 맞잡은 손, 사마천 그리고 공자
세한도 발문에는 어려운 시절,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제자의 사랑을 지극하게 마주잡는 추사의 손이 있다. 그리고 그 손은 단지 제자에게 뿐만 아니라 수천 년 전 사마천과, 더 나아가 공자에까지 맞닿아 있다.
일찍이 사마천은 《사기》〈정세가鄭世家〉에서 “권세와 이익으로 만난 관계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고 나면 사귐 또한 끝난다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의 각박한 세태를 보면서 사마천은 자신의 앞날에 닥칠 불행한 운명을 예견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불행은 그가 한漢의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면서 시작되었다. ‘사마천의 세한’이 시작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흉노를 정벌하던 이릉은 5천의 군사를 이끌고 8만의 적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 그러자 애초 이릉이 승전보를 전해올 때마다 충신이라고 환호하던 한나라의 신료들이 하루아침에 이릉을 배신자라고 비난하였다. 그 때 사마천은 홀로 이릉의 용기를 높이 표창해야 한다고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얻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마천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거세 형벌인 궁형의 치욕을 감내하면서 오제 시기부터 한무제 시기에 이르는 3천 년 간의 역사를 53만 8천여자로 기록한 《사기》를 저술하였다. 《사기》는 치욕과 발분의 소산인 것이다. 그는 스스로 “과거의 일을 기록하여 미래의 사람을 기다린다述往事 思來者”는 말로 자신이 《사기》를 저술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이처럼 사마천은 올바른 말이 막히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과거의 일을 정확하게 기록함으로써 미래에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는 한편 〈백이열전〉을 통해 세상에 정의란 게 있는지 묻고 있다. 의로운 선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늘의 도리天道는 사람을 사사로이 사랑하는 일이 없어서 늘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 같은 이는 과연 착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인덕을 쌓고 깨끗하게 행동했는데도 결국 굶어 죽었으니 말이다. 또 공자는 70명의 제자 중에 유독 안연을 가리켜, 배우기를 좋아하고 성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막상 안연은 쌀독이 자주 빌 만큼 가난해서, 지게미나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일찍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내려준다는 복이 도대체 이런 것인가.
그런가 하면 도척이란 자는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로 쳐서 먹는 등 포악한 짓을 저지르면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휘젓고 다녔다. 그렇지만 타고난 수명을 누리며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았다. 이런 결과는 대체 무슨 덕을 따라서 그리 된 것인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행실이 나쁘고 거리낌 없이 못된 짓을 저지르고서도 죽을 때까지 편안하고 즐겁게 살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부유하게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쩌다 작은 생물이라도 다칠까봐 땅조차 가려 밟으며, 말을 삼가서 때를 살핀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고, 길을 갈 때도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 공정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사람들이 도리어 재앙을 당하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천도란 옳은가 그른가.
- 사마천, 《사기》
사마천은 이렇게 묻고 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이나 백이숙제와 같이 올바른 도리를 실천한 의인에게 세상은 어떤 보답을 주었단 말인가? 도대체 이 세상에 정의란 게 있기는 있는 것인가. 사기 전편을 통틀어 이처럼 절실한 질문은 없다. 그런데 사마천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이런 항변을 통해서 정의로운 소수의 사람들을 지지함과 동시에 후손들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는 사마천의 그런 요구에 분명하게 응답했다. 그래서 세한도 발문을 통해 사마천의 정신에 절대 동의하며 손을 내민다.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좇아 그것을 얻기 위해 마음과 힘을 이토록 허비하는데 그대는 권세와 이익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마침내 바다 바깥 초췌하고 바싹 마른 늙은이에게 돌아가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듯 하는구나. 태사공(사마천)은 이르길 “권세와 이익으로 만난 관계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고 나면 사귐 또한 끝난다.”고 했다. 그대 또한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스스로 도도히 흐르는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는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 <세한도 발문>
사마천이 알고 김정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느 시대든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권세와 이익을 좇는다. 하지만 그런 상식은 그의 제자 이상적 앞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자신의 스승에게 변함없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제자에게 김정희는 공자의 말, ‘세한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빌어 도도한 권세와 이익에도 아랑곳 않은 이상적의 마음을 높이 칭찬하며 고마워하고 있다.
공자께서 이르시길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을 통틀어 시들지 않으니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그대로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일 뿐이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그대로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일 뿐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단지 날씨가 추워진 뒤의 소나무와 잣나무만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이전에 더 잘해준 것이 없었고 이후로 더 덜어진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겠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성인께서 특별히 칭찬하신 것은 한갓 늦게 시드는 굳센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뒤에 감동한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 <세한도 발문>
모든 나무가 다 시들어버린 혹한의 계절에 소나무와 잣나무만은 여전히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공자는 이 나무들을 칭찬했다. 그런데 추사는 이렇게 묻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이나 날씨가 추워진 뒤나 똑 같은 소나무요 잣나무인데, 왜 공자는 유독 날씨가 추워진 뒤의 소나무와 잣나무만을 칭찬했단 말인가? 그리곤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그 굳센 지절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렇다. 이 굳센 지절이야말로 추사가 추구한 불멸의 정신이다. 지금 창 밖에 부는 세찬 바람도 저 멀리 달아나게 할 정신, 그 정신이 이 세한도에 있는 것이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감내해야 했던 '세한'은 곤궁하고 누추하고 고독한 시절이었다. 추사의 유배 생활은 당시 그가 남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기가 막히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숱한 풍토병과 눈병에 시달려 약을 구해달라고 하는 등등 구구절절한 내용이 가득하다. 실제로 추사는 겨울에는 한풍으로, 여름에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고난과 역경의 삶을 구차하게 연명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이상적이 보내 온 책에는 아직도 추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벗의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한 벗의 절개는 한편으론 추사의 절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적은 그런 절개를 틀림없이 스승 추사에게서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은 배운 대로 실천한 것뿐이다. 따라서 세한도는 두 스승과 제자의 우정과 절개로 붓질한 그림이기도 하다.
세한도에 담긴 단아하고 굳건한 정신은 단지 도도하고 강건한 성품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배당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의 풍파, 즉 세한이 있었기에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그 정신이 표현된 것이 세한 이후에도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퇴락한 집이다. 추사의 세한도에는 세한의 계절을 모두 거치면서도 그 시간을 이겨내고 극복한 숭고한 정신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세한도는 따뜻하다
맹자는 일찍이 “동시대의 선비들과 사귀어서 만족하지 못하면 올라가 옛사람을 사귄다.” 고 말한 적이 있다. 맹자가 사귀고 싶어 한 옛사람은 누구였을까? 《논어》 제1장 두 번째 구절을 보자.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반갑지 아니한가.
논어는 본디 책으로 존재하던 기록물이 아니다. 두 세대 동안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가 제자의 제자시대에 가서 기록한 것이 논어다. 그러니 그런 말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은 정말 기적중의 기적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이런 평범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먼 곳遠方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한문에서 遠(원)이라는 글자는 공간적 거리가 멀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길이가 길다는 것을 표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먼 곳에서 찾아온다遠方來”는 말을 단순히 공간적으로 먼 곳에서 찾아온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먼 곳에서 찾아온 벗은 바로 아득한 과거에서 혹은 미래에서 찾아오는 벗을 말한다. 맹자가 공자를 찾아오고 사마천이 공자를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천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서로 사귀는 벗이 전하는 반가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벗은 뜻이 같은 사람이다. 자신의 시대가 아무리 어지러워도 그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를 지지하고 일깨우며 우정을 확인한다.
공자는 일찍이 “추구하는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공자는 “만약 부유해질 수 있다면, 비록 채찍을 잡는 마부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 그렇지만 부유해지는 게 내 몫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다. 또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온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야 비로소 깨끗한 선비가 드러난다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깨끗한 선비는 저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부귀를 이토록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 <세한도 발문>
그렇다. 사마천 말처럼 공자가 말한 세한의 뜻은 바로 온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야 비로소 깨끗한 선비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저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부귀와 권세를 이토록 가볍게 여기기에 그 선비의 정신은 오래도록 빛난다. 우리의 삶에 추위가 온다는 것은 시련이다. 하지만 시련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날씨가 추워졌을 때 삶의 가치가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세한도로 돌아와, 그림의 오른쪽 아래를 보자. 그 곳에는 붉은 인장에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양각으로 선연하게 찍혀 있다. ‘길이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이는 멀리 한나라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정의 맹세이거니와 추사의 인장은 누구나 바라는 공연한 다짐이 아니라 세한의 계절을 통해 이미 입증된 우정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흔하디흔한 맹세와는 격이 다르다. 게다가 추사는 이상적뿐만 아니라 멀리 사마천과 공자라는 또 다른 귀한 벗도 만나게 해준다. ‘길이 서로를 잊지 않는’ 벗들이 시공을 뛰어넘어 손 내밀고 있으니 세한도는 더 이상 추운 그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