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미친 사람들 ─ 광사狂士
돌아가자꾸나! 돌아가자꾸나! 우리 고을의 어린 제자들은 한 곳에 미치거나 자신감이 넘쳐 아름답게 문장을 이루었지만 그것을 재단할 줄 모른다.
- 『논어』, 「공야장」 -
만장이 이렇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진나라에서 “돌아가자꾸나. 우리 고을의 어린 제자들은 한 곳에 미치거나 자신감이 넘쳐 세속적 가치를 넘어 삶을 추구하되 초심을 잊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 진나라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어찌 노나라의 광사(狂士)들을 그리워 하신 겁니까?
- 『맹자』, 「진심하」 -
1. 미친 사람들 - 광사狂士
논어에는 종종 미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광자狂者와 견자狷者는 모두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다.
선생께서 진나라 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돌아가자꾸나! 돌아가자꾸나! 우리 고을의 어린 제자들은 한 곳에 미치거나 자신감이 넘쳐 아름답게 문장을 이루었지만 그것을 재단할 줄 모른다.”
子在陳 曰 歸與 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公冶長-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 할 것이다.”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子路-
공자가 함께 하고 싶어했던 광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공자는 스스로 광자는 진취進取하고, 견자는 하지 않는 것이 있다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고 풀이했는데 견자는 ‘하지 않는 것이 있는 사람有所不爲者’으로 그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반면 광자를 설명한 진취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사실 광자와 견자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기존의 해석 중에서 찾아보면 광자는 ‘뜻이 큰 사람’, ‘진취적인 사람’. 견자는 ‘고집센 사람’, ‘끈질긴 사람’ 등으로 번역한 것이 그나마 의미를 잘 전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광자는 문자 그대로 미친 사람을 뜻한다. 다만 미쳤다는 것을 워낙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번역하지 못하고 고상한 덧칠을 해 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해석이었다.
공자는 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진나라에서 노나라의 미친 선비들인 광사狂士들을 그리워했을까? 맹자의 제자들까지 궁금해 했던 주제이다.
맹자에는 만장이 자신의 스승에게 ‘공자가 진나라에서 어찌하여 노나라의 광사를 그리워했는지’에 대해 묻는 대목이 나온다.
만장이 이렇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진나라에서 “돌아가자꾸나. 우리 고을의 어린 제자들은 한 곳에 미치거나 자신감이 넘쳐 세속적 가치를 넘어 삶을 추구하되 초심을 잊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시면서 어찌 노나라의 미친 선비들을 그리워 하신 겁니까?
萬章問曰 孔子在陳曰 盍歸乎來 吾黨之小子狂簡 進取 不忘其初 孔子在陳 何思魯之狂士
이 질문에는 논어에는 나오지 않는 광자에 대한 중요한 단서, 곧 진취進取가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말인 불망기초不忘其初라는 말이 나온다. 진취란 현실적 구속을 넘어進 자신의 삶을 추구取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망기초는 초심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결국 광자란 절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로 초심을 잃지 않고 죽을 때까지 ‘처음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맹자는 ‘공자는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금장이나 증석, 목피 같은 사람을 광자라고 했다.
孟子曰 孔子不得中道而與之 必也狂獧乎 狂者進取 獧者有所不爲也 敢問何如斯可謂狂矣 曰 如琴張 曾晳 牧皮者 孔子之所謂狂矣 何以謂之狂也 曰 其志嘐嘐然 曰 古之人 古之人 夷考其行 而不掩焉者也 狂者又不可得 欲得不屑不絜之士而與之 是獧也 是又其次也
여기서 광자의 예로 든 사람인 금장, 증석, 목피는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사람들이다. 금장은 『장자』 「대종사」편에 자금장子琴張으로 나오는 인물로 추정된다. 장자에 의하면 그는 자상호子桑戶, 맹자반孟子反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자상호가 죽자 슬퍼하기는커녕 맹자반과 함께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또 증석은 공자의 제자 증삼의 아버지로 공자보다 12세가 어렸으며 부자가 함께 공자 문하에서 배웠던 사람이다. 그 또한 노나라의 계무자가 죽자 그 집 문 앞에 기대어 노래를 부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피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마도 두 사람과 비슷한 행적이 있어서 맹자가 함께 거론했을 것이다. 비슷한 행적이란 곧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노래를 부르는 상식에 맞지 않는 기행을 말한다. 고전에는 이와 비슷한 행적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이 나오며 앞의 두 사람 이외에 아내가 죽었을 때 노래한 장자도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어서 공자인들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겠느냐마는 반드시 얻는다고 기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을 생각하신 것孔子豈不欲中道哉 不可必得 故思其次也이라 했다.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군자이다. 군자 또한 수양의 과정에 있는 사람이지만 여기서의 군자는 상대적으로 완성된 인격을 의미한다. 이 같은 군자와 비교할 때 광자는 미완성의 인격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맹자의 이 같은 서열화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짐작컨대 중도를 실천할 만한 사람들은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등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실제로 공자가 광자를 그리워하고 애호했던 정서적인 맥락을 전달해 주지는 못한다. 위의 네 제자들은 광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재단할 줄 아는知所以裁之 사람들이기 때문에 ‘재단할 줄 모른다不知所以裁之’고 규정한 광자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2. 늙는 줄을 모르는 사람 -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다
광자는 무엇엔가 미친 사람이다. 따라서 공자는 무엇엔가 미친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이며 스스로 그러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자로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하자, 공자는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엇엔가 흥미를 가지게 되면 밥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어버리며 늙음이 이르는 줄 모른다.”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무엇엔가 빠지면 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태도, 바로 공자가 제나라에서 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했다고 한 제자들의 기록과 일치하는 말이다. 또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는다고 했는데 공자의 낙樂은 벗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이다. 그 벗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제자들이다. 근심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지만 함께 하는 즐거움으로 그것을 잊는 것이 공자이다. 또 늙는 줄을 모른다고 했다. 공자에게 노자나 장자류의 죽음이나 늙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나 성찰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스스로 늙는 줄 몰랐다는 간단한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늙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늙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삶의 문제로 논의를 전환한 적이 있다. 물론 주희는 공자가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삶을 먼저 알아야 죽음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을 달리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을 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진선진미盡善盡美의 음악에 빠져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했던 공자는 그 스스로가 광자였고, 그런 식으로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던 안연 또한 공자와 같은 방식으로 미쳤던 사람이다. 거친 밥 한 그릇과 맹물 한 사발 마시면서 누추한 곳에 살면서도, 또 쌀독이 자주 떨어져도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던 안연이야 말로 공자에게는 자신의 자식보다 더 정을 느끼게 하는 동질감을 주었을 것이다.
살펴보면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미친 사람들은 꽤나 많다. 이를테면 ‘있음과 없음存在와 無’이라는 주제로 두꺼운 책 한 권을 쓴 사르트르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의식은 어떤 존재가 자신과는 다른 어떤 존재를 함축하는 한에서 그것의 존재 자체에서 그것의 존재가 문제시되는 존재이다.”라는 식으로 읽는 이를 절망감에 빠뜨리는 문장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주제를 십여 년 동안 고민하여 상대성이론을 수립했다. 그런 주제에 그리 오랫동안 빠진 것을 보면 그 또한 미치지 않았다 할 수 없다. 하기야 카프카는 우리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미쳤다는 것의 다른 한 표현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걸 미쳤다고 규정하는 사회야 말로 미친 사회다. 만약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그런 기준에 맞는 것을 정상이라 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미쳤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3. 증점曾點 -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며
어느 날 공자는 수업시간에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각자의 뜻을 말해보도록 권했다. 이 때 나서기 좋아하는 자로를 비롯해서 염구와 공서화가 모두들 제후국을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말했다. 그런데 증점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논어』 선진편에는 공자가 증점에게 너는 어떤 포부를 갖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대목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비파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쨍! 하고 연주를 마무리 짓고서는 비파를 놔두고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늦은 봄날 친구들과 함께 기수에 놀러가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인 후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點爾 何如 鼓瑟希 鏗爾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曰 莫春者 春服 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 喟然嘆曰 吾與點也
공자가 다른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증점은 계속해서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증점의 대답이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고 싶다니... 앞의 제자들이 거창하게 제후국을 다스리는 포부를 말했는데 증점은 기껏 벗들과 목욕이나 하고 시나 읊조리고 싶다고 했으니 야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한심한 서생이라 낮추어볼 만한데 공자는 오히려 감탄까지 하면서 ‘증점과 함께 하고 싶다吾與點也’고까지 했다. 공자에게는 여러 제자들이 제후국을 다스리겠다고 말한 포부보다 증점의 꿈이 더 커 보였던 모양이다. 공자는 무엇 때문에 증점을 가장 높이 평가했을까?
정이나 주희를 비롯한 송대의 여러 주석가들도 증점의 포부가 가장 컸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주희가 평가한 증점의 경지는 이렇다.
“증점의 학문은 인욕이 다한 곳에 천리가 유행하여 곳곳마다 충만하여 조금의 결함도 없음을 아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 때문에 움직일 때 이처럼 조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뜻을 말함에도 자신이 머물러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일상의 도리를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애초부터 자신의 뜻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를 뜻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그 가슴 속이 유연하여 곧장 천지 만물과 함께 위아래에서 함께 유행하여 각기 제 자리를 얻는 신묘함이 은연중에 말 밖으로 드러나니 세 제자들이 자잘하게 세상일에 얽매이는 것과 견주면 그 기상이 다르다. 그 때문에 선생께서 탄식하시면서 깊이 인정하신 것이니 문인들이 유독 이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것도 이런 점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曾點之學 蓋有以見夫人欲盡處 天理流行 隨處充滿 無少欠闕 故其動靜之際 從容如此 而其言志 則又不過卽其所居之位 樂其日用之常 初無舍己爲人之意 而其胸次悠然 直與天地萬物上下同流 各得其所之妙 隱然自見於言外 視三子之規規於事爲之末者 其氣象不侔矣 故夫子歎息而深許之 而門人記其本末獨加詳焉 蓋亦有以識此矣
- 주희 『논어집주』-
과연 주희의 말에 따르면 증점의 사람됨은 천지 만물과 함께 흐르는 장대한 스케일로 표현될 만큼 포부가 큰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제후국을 다스리는 일은 자잘한 세상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애초부터 자신의 뜻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르는 출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광자의 첫 번째 조건은 출사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수양만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 그것을 공자는 위기지학이라고 했다. 공자는 일찍이
“옛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학문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공부한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논어』 「헌문」-
고 말했는데 이를 봐서도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옛사람들의 학문임을 알 수 있다. 증점의 학문은 옛사람을 따른 것이며 그 때문에 광자로서의 조건에 꼭 맞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공문에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더 있었지만 적어도 위에 나온 자로, 염유, 공서화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데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증점은 이름이 점點이고 자는 석晳이다. 공자보다 열두 살 어렸으며 증자로 불리는 공문의 후계자 증삼의 아버지이다.
맹자의 말에 따르면 이 증점이 바로 공자가 말한 미친 사람 광사狂士이다. 『예기』 「단궁하」편에는 노나라 대부였던 계무자季孫夙가 죽었을 때 증점이 그 문앞에 기대어 노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노래를 부른 이유는 초심을 잃어버리고 타협으로 점철되어온 계무자의 생전 행위를 나무라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기도 할 터이다.
진호陳澔 같은 주자학자는 『예기』에서 증점의 행위를 기록한 이유는 증점의 행위가 비례非禮의 일례이기 때문이라 했지만 증점이 세속의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세속의 예절을 기준으로 그를 비난하는 진호의 주석 또한 주제를 벗어난 헛발질이 아닌가.
4. 금장琴張 - 벗을 그리는 노래
공문의 제자는 아니지만 맹자가 든 광사 중에는 금장이라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아쉽게도 맹자 스스로 금장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맹자가 어떤 점을 기준으로 그를 증점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보았는지 불분명하다.
하지만 『장자』에는 자금장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의 행위가 증점의 행동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금장이 바로 맹자가 말한 금장인 듯하다. 주희 또한 장자의 자금장이 금장인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자금장의 이야기는 이렇다.
자상호子桑戶,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 세 사람이 서로 사귀면서 말했다.
“누가 서로 사귐이 없는 것을 서로 사귀는 것으로 여기며, 누가 서로 도와줌이 없는 것을 서로 도와주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 누가 하늘에 올라 안개 속에 노닐어 한없이 넓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여 삶生을 잊고 끝나고 다하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
세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각자의 마음에 거슬리는 바가 없게 되어 마침내 서로 벗이 되었다.
아무 일 없이 얼마 지난 뒤 자상호가 죽어서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는데, 공자가 그 소식을 듣고, 자공으로 하여금 가서 일을 도와주게 하였다. 자공이 가보니 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면서 서로 화답하면서 노래했다.
“아! 자상호여. 아! 자상호여. 그대는 이미 참된 세계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구나. 아!”
자공이 종종걸음으로 그들 앞에 나아가 말했다.
“감히 묻겠습니다. 시신을 앞에 놓고 노래하는 것이 예입니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어찌 예의 본 뜻을 알겠는가?”
子桑戶 孟子反 子琴張 三人相與友 曰 孰能相與於无相與 相爲於无相爲 孰能登天遊霧 撓挑無極 相忘以生 无所終窮 三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友 莫然有閒 而子桑戶 死 未葬 孔子聞之 使子貢 往 侍事焉 或編曲 或鼓琴 相和而歌 曰 嗟來桑戶乎 嗟來桑戶乎 而已反其眞 而我 猶爲人猗 子貢 趨而進 曰敢問 臨尸而歌 禮乎 二人 相視而笑 曰 是 惡知禮意
-『장자』 「대종사」-
자공은 꽤나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공자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저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법에 맞는 행동은 전혀 없고, 생사를 도외시하여 시신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으니 저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저들은 예법의 테두리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고 나는 예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테두리 밖과 안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데 내가 너로 하여금 가서 조문하게 하였으니, 나야말로 생각이 얕았다. 저들은 바야흐로 조물자와 벗이 되어 천지 사이에서 노닐고, 저들은 生을 쓸데없이 붙어 있는 사마귀 정도로 생각하고, 죽음을 종기가 터지는 일 정도로 생각한다. 그 같은 사람들이 또 어찌 사생과 선후의 소재를 알려고 하겠는가. 다른 사물을 빌려 한 몸에 의탁하여 간과 담을 잊어버리며, 귀와 눈의 감각을 없애서 生과 死를 되풀이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다. 무심히 티끌과 때에 오염된 세속 밖에서 이리저리 노닐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에 소요하니 저들이 또 어찌 번거롭게 세속의 예를 갖추어 衆人들의 귀와 눈에 보이게 하겠는가.”
子貢反 以告孔子曰 彼何人者邪 修行无有 而外其形骸 臨尸而歌 顔色不變 无以命之 彼何人者邪 孔子曰 彼遊方之外者也 而丘遊方之內者也 外內不相及 而丘使女往弔之 丘則陋矣 彼方且與造物者爲人 而遊乎天地之一氣 彼以生爲附贅縣疣 以死爲決★潰癰 夫若然者 又惡知死生先後之所在 假於異物 託於同體 忘其肝膽 遺其耳目 反覆終始 不知端倪 芒然彷徨乎塵垢之外 逍遙乎无爲之業 彼又惡能憒憒然 爲世俗之禮 以觀衆人之耳目哉
-『장자』 「대종사」-
자상호는 『논어』에 자상백자子桑伯子로 나오는데 일찍이 염옹이 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됨이 간이하다며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仲弓問子桑伯子 子曰 可也簡 -『논어』 「옹야」-
자상호와 함께 자금장의 벗으로 등장하는 맹자반孟子反은 『논어』에 맹지반孟之反으로 나오는 인물로 공자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맹지반은 자신이 세운 공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패주하는 전투에서 맨 뒤에 머물러 있다가 성문에 가까워지자 자신의 말을 채찍질하며 “일부러 뒤에 처지려 한 것이 아니라 말이 달리지 않아서였다”고 했다.
孟之反 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 曰非敢後也 馬不進也
-『논어』 「옹야」-
전투에서 공격할 경우에는 맨 앞에 서는 것이 용감한 것으로 칭송되고 후퇴할 때는 맨 뒤에 남아서 늦게 후퇴하는 것이 용감한 행위로 칭송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맹지반은 후퇴할 때 일부러 맨 뒤에 남아서 후퇴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 행위를 칭찬할까 염려하여 스스로 ‘말이 달리지 않아서 뒤에 처진 것’이라고 공을 사양한 것이다.
역시 세속적인 명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니 친구 자상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자금장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했던 것이다. 남의 눈치라곤 전혀 보지 않는 그들의 정신세계는 자공 같은 인물이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른바 『장자』에 나오는 송영자宋榮子 같은 인물로 “온 세상이 칭찬한다고 해서 어떤 일을 하지 않고 온 세상이 비난해도 그가 하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인간 유형이다. 논어에는 그런 인물이 군자로 표현되어 있다.
“군자는 천하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없고 절대하지 않는 것도 없다. 단지 올바른 도리義를 따를 뿐이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논어』 「이인」-
무엇을 올바른 도리義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이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둘은 크게 보면 같은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