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덕행에 뛰어난 네 명의 제자들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었고 언어에는 재아, 자공이 있었고, 정사에는 염유, 계로가 있었고, 문학에는 자유, 자하가 있었다.
- 『논어』, 「선진」 -
덕이 뛰어나면 형체는 잊어버리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니 이것을 두고 참으로 잊어버렸다고 한다.
- 『장자』, 「덕충부」 -
공자는 제자들에게 육예, 곧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가르쳐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막상 공자 자신은 육예보다 이른바 공문사과孔門四科로 불리는 덕행·언어·정사·문학의 네 과목을 중시했다. 이 네 과목 중에서도 공자가 가장 중시했던 과목은 말할 것도 없이 덕행이다. 선진편의 이 대목에서 공자는 덕행에 뛰어난 네 명의 제자들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 네 명이야말로 공문을 대표하는 현자들이다.
그런데 이 네 명의 제자들은 하나 같이 커다란 결핍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민자건은 절름발이였고, 염백우는 나병 환자였으며, 염중궁은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연은 쌀독이 자주 빌 정도로 가난했다. 그런데 공자는 이들을 가장 사랑했다. 왜 그랬을까?
1. 절름발이 제자 민자건 - 갈대옷을 입고 수레를 몰다
공자의 제자 중에 안연 다음으로 덕이 훌륭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던 민자건은 절름발이였다. 민자건의 자字인 ‘건騫’은 ‘건蹇’자와 통하는 글자로 ‘절름발이’라는 뜻이다. 또 그의 이름은 ‘손損’인데 손은 신체적인 결손을 뜻한다. 그러니 이름도 자도 모두 절름발이, 불구자라는 뜻이다. 『손자병법』 아닌 『손빈병법』으로 유명한 손빈孫臏의 이름인 ‘빈臏’은 앉은뱅이라는 뜻이고 그가 실제로 앉은뱅이였던 것처럼 민자건은 자신의 신체적 결손을 그대로 이름과 자로 삼았다. 손빈은 동문이었던 위나라의 장군 방연에 의해 정강이뼈를 잘리게 되는데 그 뒤에 ‘앉은뱅이 손씨’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민자건은 일찍이 노나라의 실력자인 계손씨가 제멋대로 비費땅의 읍재로 임명하고 사신을 보내오자 한 번 더 자신을 데리러 오면 노나라 북쪽의 문수를 넘어 제나라로 떠날 것季氏使閔子騫 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옹야>이라고 하며 단호하게 벼슬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씨는 무엇을 보고 민자건에게 자신의 고을을 맡기려 했던 것일까? 무릇 크고 작고를 떠나서 한 고을을 다스리는 자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덕’이다. 민자건의 훌륭한 덕은 공문에서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던 모양이다.
효행으로 유명한 민자건에게는 ‘의로어거衣蘆御車:(갈대옷을 입고 수레를 몲)’라는 가슴 아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일찍 친모를 여읜 그에게는 계모가 있었고 계모 소생의 두 이복 동생이 있었다. 계모는 교묘한 방법으로 전처소생인 민자건을 학대했다. 즉 겨울이 되자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솜으로 누빈 옷을 지어 입히고 민자건에게는 갈대꽃을 옷 속에 넣어 누빈 후 입혔다는 거다. 여름용 소재를 겨울옷에 넣어서 입힌 셈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출타하는 길에 민자건을 시켜 수레를 몰게 하였는데 추위로 손이 곱아 수레를 제대로 몰지 못했다.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가 갈대꽃으로 누빈 옷을 확인해 보고는 계모를 쫓아내겠다고 이야기 하자 민자건은 아버지에게 울면서 이렇게 말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계시면 한 명의 자식만 추위에 떨면 되지만
어머니가 떠나시면 세 자식이 모두 외롭게 됩니다.”
[母在則一子寒 母去則三子獨 『韓詩外傳』]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마음을 고쳐먹고 이후로는 민자건에게 자기소생의 자식들과 똑같이 잘 대해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죽하면 공자가 자신보다 15세가 어렸던 민자건을 두고 “효자로구나! 민자건은. 사람들이 그 부모와 형제들의 칭찬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孝哉 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선진>”고 칭찬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민자건이 효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로부터 ‘孝哉’라고 칭송받은 제자는 그 이외에는 없었다. 또 공자는 “이 사람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적중한다夫人不言 言必有中”고 칭찬했다. 민자건은 말 수가 적지만 실천은 훌륭한, 곧 덕행이 빛나는 제자였다.
맹자 또한 “민자건과 안연은 성인의 전체를 갖추었다閔子顔淵則具體而微”고 하여 안연과 대등한 지위로 민자건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子夏, 子游, 子張 등의 제자가 성인의 일부분을 갖추는 수준과 견주어 성인의 전체를 갖추었다고 칭송함으로써 민자건의 덕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민자건이 대부에게 벼슬하지 않았으며 더러운 군주의 녹을 먹지 않았다不仕大夫 不食汙君之祿<중니제자열전>고 했다. 그렇다면 민자건은 백이 숙제의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할 만하다.
2. 병으로 일찍 죽은 염백우 -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논어에는 단 한 번 공자가 자신의 제자를 삶의 저편으로 떠나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 주인공은 염백우冉伯牛다.
백우가 병에 걸리자 선생께서 문병하시면서 창문으로 그 손을 잡으시고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 보구나.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伯牛有疾 子問之 自牖 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옹야>
이런 사람과 이런 병이란 표현에서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란 뜻이고 ‘이런 병’이란 ‘이런 몹쓸 병’이란 뜻이다. 염백우가 걸린 병은 아무래도 전염병이었던 듯싶다. 나癩환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 때문에 공자는 감염을 피하기 위해 방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창문을 통해 손을 잡았던 것이다. 주희는 백우의 집안에서 군주를 대하는 예를 갖춰 공자를 대했기 때문에 공자가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창을 통해 영결했다고 주석했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는 풀이다.
아마도 공자가 사랑하는 제자를 문병하면서 방안으로 직접 들어가 그를 보지 않고 창문으로 손만 잡은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그리 풀이한 듯하다. 하지만 감염을 우려해서 방안에 직접 들어가지 않는 것은 평소 위생관념이 철저했던 공자의 생활태도로 미루어 본다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혹 주희는 공자가 애제자를 떠나보내는데 감염이 두려워 직접 만나지 않고 창문을 통해 영결하는 것을 매정한 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주희는 공자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수에 넘치는 행위를 월권으로 경계했던 여러 가지 일화를 간과했거나 공자의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철저한 위생관념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일 터이다.
애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 통곡을 하면서도 ‘수레를 팔아 안연의 곽을 마련하게 해 달라’는 안연의 아버지 안로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공자이며, 정직으로 유명한 미생고라는 사람이 ‘식초를 빌리러 온 사람에게 식초가 없다고 거절하지 못하고 옆집에서 빌려다 식초를 빌려준 일’을 두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판子曰 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隣而與之<公冶長>했던 것이 공자다.
물론 감염의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이나,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 앞에 수레는 물론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애도하는 스승의 절절한 모습을 바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에게는 그런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일에 관해 논의하지 않는다不在其位 不謀其政<泰伯>고 월권행위를 경계한 말도 같은 맥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위나라 왕숙王肅의 위작으로 알려졌다가 최근 왕숙의 활동연대보다 더 오래된 판본이 발견되어 문헌의 신뢰도가 높아진 『공자가어』에도 “염경冉耕은 노나라 사람으로 자가 백우伯牛였고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나쁜 병에 걸렸다.冉耕 魯人字伯牛 以德行著名 有惡疾”고 염백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염백우의 이름은 경耕이고 백우伯牛는 자이다. 경耕은 밭을 간다는 뜻이고 우牛는 소다. 伯은 맏아들이라는 뜻이니까 빼고 해석하면 소가 밭을 가는 것처럼 염백우는 마음의 터전心地에 덕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하지만 뿌린 씨를 거두지 못하고 삶을 접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가 “싹을 틔우고서도 자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자라나고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구나!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子罕>”하고 탄식한 것은 아마도 염백우를 위한 것이었나 보다.
3. 천민 출신 염중궁 - 남면을 허許하다
안연을 예외로 치고 나면 공자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인물은 단연 중궁이라 할 만하다. 논어의 옹야편은 바로 중궁의 이름인 ‘옹雍’으로 시작하는 편이기 때문에 옹야雍也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로 그 옹야편 첫 번째 문장에서 공자는 중궁을 이렇게 평가했다.
“염옹이는 남면할 만하다.子曰 雍也 可使南面”
남면이란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천자나 제후에게나 허용되는 말이다. 더욱이 남면의 뜻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보면 물리적인 힘이 아닌 덕의 감화력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곧 덕치를 이상으로 하는 공자의 정치적 이념 중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이른 무위無爲의 정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논어에는 이곳과 뒤의 위령공편에서 순임금을 두고 “무위로 천하를 다스린 사람은 순일 것이다. 대체 무엇을 하셨던가? 자신을 공손히 하고 남쪽만 바라보았을 뿐이다.子曰 無爲而治者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한 대목을 합쳐서 겨우 두 차례가 나올 뿐이다. 순임금의 경우야 본래 고대의 성왕으로 이름이 높으니 그를 무위의 성군으로 찬양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치고, 중궁은 이름 없는 필부에 지나지 않는데 덕합일국德合一國의 군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무위의 정치를 베풀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칭찬한 것은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그런데 늘 중용을 추구하면서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고까지 하며 지나침을 그토록 싫어했던 공자가 어째서 이런 지나친 말을 했을까?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어 노나라 귀족 계강자가 제자 중 자로, 자공, 염구의 능력에 대해 묻자 공자는 세 사람 모두 정치에 종사할 만한 훌륭한 인재라고 대답했다. 이를테면 자로는 과단성이 있기 때문에 정치에 아무 어려움 없이 종사할 수 있을뿐더러 제후국의 병권을 담당할 만하다고 칭찬했고, 염구는 재능이 많기 때문에 정치에 종사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또 공서적이 작은 보좌관이 되고 싶다고 하자, 공서적이 작은 보좌관이 된다면 누가 큰 보좌관이 될 수 있겠느냐며 극찬했다.
실제로 제자들은 그만큼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자공의 경우는 노나라, 위나라, 제나라 등 삼국의 재상을 역임하기도 했으니 공자 문하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이라 일컬을 만하다. 하지만 그들은 공자가 보기에 이 네 명의 제자들보다는 못했다.
공자의 문하에는 남궁괄이나 맹무백 같은 귀족들의 자제부터 번지 같은 농민출신은 물론 자로 같이 시정市井에서 주먹 쓰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궁은 가장 신분이 낮은 천민에 속하는 인물이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는 중궁의 아버지가 천인賤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공자가어』에는 중궁의 아버지가 불초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자가 염옹을 두고 남면할 만 하다고 넘치게 칭찬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신분이 가장 낮은 천민출신이었기 때문에 공자는 오히려 중궁의 덕을 더욱 높이 평가한 것이다. 개천에서 용난 경우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같은 옹야편에서 중궁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얼룩소의 새끼라 할지라도 털이 붉고 뿔의 크기가 적당하다면 사람들은 비록 제사에 쓰려고 하지 않겠지만 산천의 귀신들이 그를 버리겠느냐.子謂仲弓曰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 其舍諸<雍也>”
주희를 비롯한 주석가들은 공자가 절대 중궁 앞에서 중궁의 아버지를 저런 식으로 비유했을 리가 없다고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여기의 이우犁牛는 얼룩소를 뜻한다. ‘얼룩소가 어때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얼룩소는 잡색우雜色牛이기 때문에 제사에 쓰지 않는다. 현재 물건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물物자는 갑골문에서는 ‘쓰지 말라勿’는 뜻으로 쓰인다. 물物자는 문자 그대로 소를 뜻하는 牛와 말라는 뜻인 勿자가 합쳐진 글자인데 갑골문에서는 物자가 勿자의 뜻으로 쓰였다.
勿은 얼룩무늬를 그린 상형문자이다. 또 제사에 바치는 희생물에서 희생犧牲의 犧자는 본래 색깔이 순수한 소를 의미하며 牲자는 집에서 키우는 소, 양, 돼지를 의미하며 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뜻하는 살殺과 구분되는 희생물이다. 아울러 중국 고대의 주나라에서는 붉은 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털이 순적색純赤色인 소만이 제사의 희생물로 선택될 수 있었다. 따라서 공자가 말한 얼룩소 이우犁牛는 절대 희생물로 선택될 수 없었는데 그런 차별을 공자는 사람들이 쓰지 않으려 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공자는 산천의 귀신들이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중궁의 비천한 혈통이 그의 뛰어난 덕행을 가릴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처럼 천민 출신의 제자 중궁을 남면할 만한 훌륭한 덕행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출신이 훌륭한 덕행을 가리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다. 세상을 보면 늘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공자의 문하에서는 그랬다.
4. 가난한 제자 안연 -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마실물로
법가 사상가 상앙商鞅은 인의仁義의 힘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의로 덕을 이룬다는 것은 허구라고 생각했다. 하여 덕은 강함에서 생기고 강함은 힘에서 생기므로 결국 덕은 물리적인 힘에서 생긴다德生於强 强生於力고 주장하고 인의의 무력함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한편 물리적인 힘을 생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강력한 법률통치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산에서 토끼 한 마리가 도망치면 백 사람이 토끼를 잡기 위해 쫓아간다. 요순같은 성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토끼 한 마리를 백 사람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토끼에 대한 법적 소유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거리에서 토끼를 팔면 비록 도척같은 자라 할지라도 감히 훔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도척이 어질어서가 아니라 토끼에 대한 법적 소유가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적 소유가 확정되어 있으면 도척 같이 흉악한 자도 감히 남의 물건을 넘보지 못하고, 법적 소유가 확정되어 있지 않으면 제 아무리 어진 사람이라도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간다는 이야기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는 법률적인 통제만이 인간을 움직일 수 있다는 그 다음의 이야기이다.
상앙은 “인仁한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인을 실천할 수 있는 있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인을 실천하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물리적인 강제력을 가지는 법률에 비해 자발적인 동의와 참여를 필요로 하는 인의는 확실히 무기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 자신의 인仁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실천하게 했던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안연이다. 아마도 상앙은 안연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그 때문에 상앙은 일찌감치 세상에 굴복하고 노예의 도덕을 따랐다. 노예의 도덕이란 상대의 악행을 근거로 나의 선을 입증하려고 하는 비열한 방식의 도덕적 규정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가혹한 법률이 필요하다는 식의 비자발적인 강제성을 정당화하는 주장이 그에 해당한다.
하지만 위대한 인격의 위대한 감화력은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맹자는 그런 인격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감화된다所過者化고 표현했고, 노자老子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백성들은 저절로 감화된다我無爲而民自化”고 했다. 맹자는 물론이고 노자도 안연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나보다.
공자는 안연이 제자로 들어온 뒤로 문인들이 더욱 친해졌다自吾有回 門人益親고 했다. 안연의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공자는 일찍이 안연을 두고 “석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는다三月不違仁”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인에 머물렀다고 했을 뿐이다.
사실 인은 대단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유가의 성왕으로 받들어지는 문왕을 칭송한 시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물렀다.爲人君 止於仁”고 했다. 곧 인은 군왕이 백성들을 다스릴 때 필요한 덕목이다. 안연의 인도 다르지 않다. 안연의 인은 친화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공자의 제자들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를 안연에게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안연은 쌀독이 자주 빌 정도로 가난했고, 그 사실은 거의 틀림이 없다.
『장자』 「인간세」편에는 공자와 안연이 대화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공자가 안연에게 재계齋戒하라고 권고하는 대목에서 안연은 공자의 요구에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집안이 가난하여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훈채를 먹지 못한 지 몇 달이 되었으니 이 정도면 재계했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回之家貧 唯不飮酒 不茹葷者 數月矣 若此則可以爲齋乎”
보통 재계라고 하면 냄새나는 음식물, 곧 술과 훈채를 먹지 않고 피하는 것不飮酒 不茹葷과 기타 부정 탈 일을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일화는 안회가 재계하기 위해 따로 그런 음식물을 가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음을 알려준다.
가난은 앞에서 이야기한 장애가 아니라고 생각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난보다 더 큰 장애나 결함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오히려 신체적인 결손이 있다 하더라도 가난하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장애일 수 없다.
아무튼 안연은 공자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바람에 꼭 맞을 수 없는 둘도 없는 제자였다. 그 때문에 공자는 안연을 유일한 호학好學의 제자로 인정했으며 그가 죽었을 때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통곡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공자 문하의 제자들 중에서 이상의 네 사람은 공자가 덕행으로 인정한 제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의 맹자 또한 “염우(염백우), 민자, 안연 이 세 사람이 덕행을 잘 말했다.”고 칭송했는데, 주희는 해당 부분의 주석에서 “세 사람이 덕행을 잘 말한 까닭은 자신들의 몸에 그것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친절하고 맛이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덕충부德充符, 덕의 기표記表 - 신체적 결손과 덕의 비례관계
동아시아 고전 중에서 덕이 충만한 사람들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을 들라면 나는 『장자』 다섯 번째 편 덕충부德充符를 꼽을 것이다. 덕충부란 덕충지부德充之符, 곧 그 사람의 덕이 충실하다는 사실을 표시해주는 부호符號라는 뜻이다. 곧 참으로 도道를 체득한 인물이 자신의 수준 높은 내면성에 부합하는 형상을 갖춘다는 뜻이다. 장자는 어떤 사람들을 덕이 충일한 사람이라고 보았고 그 부호는 무엇인가. 덕충부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면 대답은 간단하다.
덕충부의 첫 번째 주인공은 올자兀者, 곧 절름발이 왕태王駘이다. 장자에 나온 그에 관한 얘기는 이렇다.
노나라에 발 잘리는 형벌을 받은 왕태란 자가 있었는데, 그를 따라 배우는 제자의 수가 공자와 같았다. 더욱이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배우는 이들은 텅 빈 채로 가서 가득 채워 돌아온다고 했다.
두 번째 주인공은 신도가申徒嘉인데 그 또한 절름발이이다. 그런데 신도가는 유명한 정치인인 정나라 자산과 함께 백혼무인伯昏无人에게 배우는 사람이다. 자산이 신도가 같은 절름발이와 함께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자 신도가는 선생의 문하에서는 절름발이니 재상이니 하는 구분이 없다며 자산을 질타한다.
세 번째 주인공은 숙산무지叔山无趾인데 그의 이름인 무지无趾의 지趾는 발의 복사뼈 아랫부분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앞의 두 사람처럼 절름발이이다. 여기서 그는 노자의 제자로 공자에게 깨우침을 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애태타哀駘它는 절름발이에다 곱사등이인 중증장애인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불쌍함을 느끼게 하는 추한 용모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노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남자들 중에 그와 함께 지내본 사람은 그를 사모하여 떠나지 못하며, 여자들은 그를 보고 나면 자기 부모에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청하는 사람이 몇 십 명에 이를 정도였다. 심지어 그와 함께 생활해 본 노나라 애공은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려 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인기지리무순闉跂支離无脤은 발이 없는闉跂 절름발이에다가 사지가 지리멸렬하며支離 게다가 입술이 없는无脤 언청이이다. 그런데 위나라 영공은 그의 매력에 빠져 그와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에 보통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또 옹앙대영甕㼜大癭은 항아리만한甕㼜 커다란 혹大癭을 달고 있는 기형인인데 제나라 환공이 그와 대화한 뒤 역시 보통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그를 좋아하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장자』에는 덕충부 뿐만 아니라 도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제물론」에서 도를 아는 인물로 나오는 남곽자기南郭子綦는 성곽의 남쪽에 사는 천민이다. 남곽南郭의 ‘곽郭’은 내성외곽內城外郭의 곽으로 남곽은 성곽의 남쪽 지역을 말하며 고대에는 내성에는 주로 상층부의 사람들이 살았고 외곽에는 주로 하층민들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남곽자기는 외곽은커녕 외곽의 바깥쪽 그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약한 남곽의 바깥에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성 안에 사는 귀족 안성자유顔成子游가 그를 찾아와 스승으로 모시며 도를 묻는다.
일국의 군주인 문혜군文惠君에게 양생의 도를 가르쳐 주는 인물인 포정庖丁은 백정의 다른 호칭이다. 백정白丁이란 말의 뜻은 요즘의 백수白手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을 뜻하며 고대에는 농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천한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상민常民 이하의 신분에 해당하는 천민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 또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지리소支離疏는 턱이 배꼽 아래에 숨어 있고, 어깨가 이마보다도 높이 솟아 있는,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신체를 가진 형용불가의 기형인이다.
이처럼 장자는 자신의 글 속에서 세속 인간들의 육체적 조건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고 참다운 덕은 형상을 초월한 내면성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 세속의 사람들이 가장 추하다고 여기는 절름발이, 꼽추, 언청이 같은 불구자들을 들어 그들로 하여금 도를 말하게 했다. 그로테스크한 기형불구의 인간들에게 도를 말하게 하는 장자는 형체에 구애받고 외형적인 것, 외적인 권력 등에 집착하는 세속 인간들의 슬픈 어리석음을 크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